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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황 Apr 24. 2023

사랑과 창의성

오후 4시 반의 디저트


피낭시에는 녹인 버터와 구운 아몬드 등을 함께 섞어 구워내는 쫀득한 식감의 네모난 디저트다. 금괴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피낭시에’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피낭시에는 디저트 가게마다 저마다 개성이 강하기 때문에 자신의 입맛에 맞는 피낭시에를 찾으려면 여러 가게를 둘러봐야 한다.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단골 가게에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맛보기 어려운 적절한 쫀득감과 버터의 풍미를 갖춘 피낭시에를 수시로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단골 가게는 피낭시에뿐 아니라 다양한 프랑스 디저트를 구워낸다. 요즘 딸기 철에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 그 옆에 자리한 캐러멜 케이크, 맨 끝에는 토치로 구워 설탕을 톡톡 두드려 먹는 맛이 있는 크림 브륄레가 있다. 문 옆에는 피낭시에, 진주조개 모양의 마들렌, 버터 쿠키 몇 봉지 등이 소담하게 놓여 있다. 가격도 적절하다. 두세 개 집는 것이 내 경제적 양심에 위배되지 않기에 네 개 정도의 피낭시에를 항상 봉지에 넣는 편이다. 다른 가게보다 천 원 정도는 항상 더 싼 것 같다. 게다가 이것저것 골라 봉지에 담고 나서 함께 마실 커피를 주문하면 너무 고맙게도 커피를 그냥 내려준다. 그런데 이 커피조차-전문 메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적당히 볶은 커피콩의 향내가 물씬 풍기고 묵직한 것이다. 대전의 명물을 흔히 성심당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 가게를 꼽는다.



은아, 곧 다가오는 너의 생일을 함께 기뻐하기 위해 오늘도 변함없이 이 가게를 들러 주문한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샀어. 우리 집은 이제까지 다른 곳에서 케이크를 주문한 적이 없지. 이 케이크에는 진짜 바닐라빈이 콕콕 박혀 있고 예쁘고 신선한 딸기, 마치 ‘세상에 하나뿐인 딸기’ 동화에 나오는 딸기가 숨겨져 있으니까. 많은 시간, 하고 싶거나 사고 싶은 것들의 목록은 많은데 돈이 적다는 한탄을 할 때가 있어. 그럴 때마다 나는 어은동 빌라 한 모퉁이에 조용히 자리 잡은 이 가게에서 따뜻한 베티 나르디 민트 초코티와 캐러멜 케이크 한 입을 함께 먹는 상상을 해. 혹은 따뜻한 우유와 피낭시에를 함께 먹는 상상도 하지. 그러면 입 안에 침이 고여. 꿀꺽 넘길 때 주변에서 보이는 화분이나 침대가 더 반짝이는 듯해. 마치 그 위로 잔 물결이 만드는 윤슬처럼. 이 가게는 내게 너무 소중해서 이사 온 집과 너무나 멀어도, 네가 좋아하는 캐치 티니핑 같은 캐릭터로 만든 케이크가 없대도 나는 항상 이곳만 찾아서 오게 돼. 은은한 단내가 가게 안을 따스하게 두르고 있는 이곳. 이런 가게가 많을 것 같지만 소중한 가치를 지켜나가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처럼, 마음에 쏙 드는 가게는 주변에서 별로 찾아볼 수 없어.



어쩜 이렇게 달고 부드러운 디저트를 만들 수 있을까. 가게 주인인 파티시에는 유명한 요리학교를 수료했지. 그런데 이력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여기 처음 왔을 때 나는 스콘을 자주 먹었어. 몇 년 전에는 잼을 팔지 않았기 때문에 트리플 딸기잼을 맛보려고 스콘을 사 먹게 됐지. (물론 스콘도 겉은 바삭바삭, 속은 촉촉해서 한 입 물어보면 반하고야 말지.) 트리플 딸기잼에는 딸기 말고도 몇 가지 베리 류가 들어가는 것 같아. 뭉근 뭉근하게 끓여냈을 텐데도 과육의 씨와 덩어리가 입안에서 기분 좋게 느껴질 만큼의 작은 조각으로 씹히는 질감이 좋지. 그래서 너도 이 집의 잼만 빵에 발라서 먹잖아. 처음 이 잼을 맛봤을 때 너무 맛있다고 감탄을 했어. 그분은 조그만 통으로 두 개 정도의 잼을 주시더구나. 자신이 만든 잼을 이렇게 좋아해 줘서 기쁘다며 함박웃음을 짓는 그분의 표정에서 아까움, 뻐기는 마음 등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지. 단지 이것뿐이라면 그분(과 그분의 언니를)에 대해 적절히 말하지 못한 거야. 언제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기다리던 귀한 사람처럼 “오셨어요!”라며 따뜻하게 환대해 주셔. 그러면서 내가 고른 몇 가지 디저트를 봉지에 담는 동안 내 이야기를 끌어내시지. 나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호들갑스럽게 너와 완이에 대해, 17년째 적응 중인 직장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거야. 나는 어디서도 만나볼 수 없는 너무 훌륭한 이야깃꾼인 것 같고,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사람으로 변신하는 것 같아.



사실 디저트가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어. 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라고 온몸으로 내게 반응해 주는 깨끗한 거울과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45분 거리를 차 타고 달려가 굳이 케이크를 사는 것 같아. 사람이 어떻게 한결같을 수 있겠니. 몸이 아픈 날도 있고 마음이 공허할 때도 있지. 하루종일 손님을 기다리는 가게 주인이야말로 이런 날이 얼마나 많겠어. 손님들이란 하루의 한 때만 복작복작, 정신을 쏙 빼놓고 나머지 때에는 매정할 만큼 얼굴을 내밀지 않을 때가 많지. 어떤 날에는 자신의 불만을 가게 안에 두고 가는 나쁜 손님도 만나겠지. 그런데 그분은 한 번도 자신이 만나는 진상 손님에 대해 푸념을 한 적이 없더라고. 복작복작한 한 때를 견디느라 늦은 오후, 특히 4시 반에는 몸이 욱신욱신할 텐데도 나를 귀하게 대해 주시더라고. 무엇보다 내가 겪은 일들을, 내가 살아내는 날들에 감탄하는 그분의 얼굴이 환하게 빛날 때, 나는 내가 살아있는 게 다행이라고, 살아서 이 맛있는 피낭시에를 먹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 꼽아 마시며 이분과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나를 긍정하게 돼. 그래서 우리 가족의 생일, 나와 네 아빠의 결혼기념일 등 마음에 새기고 싶은 날, 나는 이분을 찾아 케이크를 주문하는 거야.



나는 끝내 이분처럼 다른 사람의 말에 감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직장 내에서 그저 옮겨 다니는 식물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할 때 “그럴 수 있어요.”와 같은 말이 아니라 “우리 나이가 되면 진짜 그런 고민이 자꾸 생기는 것 같아요.”라고 하면서 인류애를 느끼게 하는 그분(과 그분의 언니)같이 말할 수 있을까? 먼 거리를 달려와 목이 마른 사람에게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적시에 내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이 세상을 살아내며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주는 따뜻한 마음을 더 기르고 싶어. 그분 생각을 했더니 내 어깨 뒤에 놓은 캐슈너트 초콜릿과 피낭시에 향이 느껴지는 것 같아. 그분이 매일 11시 반에 화분을 내놓으며 시작하는 본격적인 일과 전에 홀로 진행했을 마법의 숙성 과정을 생각하게 돼. 근사하지만은 않고 때로는 매우 귀찮을 수 있는 긴 준비의 시간. 그 시간 외롭지 마시라고 감사의 문자를 보내. “저희 가족의 행복한 순간에 늘 함께 해주셔서 감사해요.” 네가 자라서도 이 분이 만드는 멋진 피낭시에를 맛볼 수 있기를, 그리고 외로울 때 그 가게에서 다정한 사람의 온기를 느끼기를 바라며 나는 이 분에게 계속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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