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9.)
오늘은 누구나 경험하는 경우와 그렇지 못하는 경우 두 가지를 한 날에 모두 겪은 날이었다. 아침에 읽은 아이들의 일기 중에 두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쓸 게 없어 고민하다 엄마에게 물어보고 물어보다 그것을 일기로 쓰는 게 낫겠다 싶어 쓴 글이었고 다른 하나는 흔하디 흔한 아침밥에 관한 이야기. 누구나 경험하지만 그것을 글로 쓸 생각을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글은 아이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늘 겪고 살지만 그 하찮게 보이는 삶을 글로 써서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만드는 힘. 이것이 글쓰기가 가진 힘이다.
우리 1학년 아이들은 두 달 동안 이러한 글쓰기의 가치를 깨닫는 시간으로 보낼 것이다. 맨 아래의 글은 이제 갓 글의 세계로 입문하는 한 아이의 글을 옮겨 보았다. 일상에서 말은 참 많이 하는 아이인데, 아직 그것을 글로 푸는데 어려움이 많다. 읽기도 아직 부족하니 쓰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그럼에도 꾸준히 써 오는 게 대견하다. 아주 천천히 바뀌고 있다. 겨울방학 때 가정에서 조금만 더 신경 써 주시면 거의 1학년 교육과정을 따라잡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되면 자기 삶을 좀 더 풍성하게 써 낼 수 있을 게다.
날짜: 2024년 11월 18일 월요일
날씨: 덥기도 하고 춥기도 하다.
제목: 일기 쓸 일이 없는 날 | 박**
오늘 일기 쓸 게 안 써 오른다. 쓸 게 없어서 엄마에게 물어 봤다.
"엄마, 쓸 게 안 떠 올아."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그럼, 일기 쓰지 마."
그러자 내가 말했다.
"엄마 어떻게 안 써. 안 쓰면 안 되지 않아?"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괜찮아."
그래서 안 쓸까 고민했다. 그러자 생갔났다. 엄마랑 말한 걸 썼다. 좀 그런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잘 쓴 거 같다.
날짜: 2024년 11월 18일 월요일
날씨: 몸이 얼어버릴 것 같은 날
제목: 아침밥 | 한**
오늘 아침밥이 갑자기 바뀌었다. 원래는 토스트, 시리얼, 주먹밥, 호떡이었는데 갑자기 오늘만 호빵으로 바뀌었다. 호빵이 정말 따듯했꼬 달콤했다. 호빵은 하얀색이고 안에 팥이 들어 있었다. 호빵이 너무 동그랬다. 왜 호빵으로 바뀌었냐면 내가 어젯밤에 다른 아침밥으로 먹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침밥은 정말 맛있었다. 나는 한 개를 다 먹었다. 또 먹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 먹었다. 그래서 아쉬웠다. 다음에는 빨리 먹어서 더 많이 먹을 거다. 왜냐하면 너무 맛있기 때문이다.
날짜: 2024년 11월 18일 월요일
날씨: 너무 너무 추운 날
제목: 집중을 잘 한 날 | 유**
나는 (짧게) 머리를 깎았다.
(선생님이)너무 집중을 잘했다고 했다.
선생님이 머리를 대머리로 하라고 했다.
다음에도 잘 해야지.
이렇게 늘 경험하고 겪는 일과 달리 점심시간 이후에는 평상시에는 잘 겪지 못하는 일을 겪고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학교가 준공이 되고나서 생긴 것 중에 하나는 학교 건물 뒤편 산책로 낮은 턱 아래 숲밧줄이라는 걸 해 놓아 그네랑 그물망을 쳐 놓았는데, 아이들이 쉬는 시간만 되면 거기서 노는 게 요즘 풍경이다. 오늘은 5교시라 우리 반 여자 아이 둘이 또 산책로로 걸어 교실로 들어가잖다. 그래서 그러고마 하고 그네도 태우고 그물망 근처를 지나치려는데, 4-6학년 여자 아이들이 떼로 모여 나를 부르는 게 아닌가? 여느 때처럼 나를 그렇게 친근하게 부를 일이 없던 아이들이 웬일인가 싶었다. 그런데 자꾸 자기들이 있는 그물망으로 나를 부르는 게 아닌가? 일단 올라와 보란다. 그래서 올라갔고 의심을 하면서 아이들이 원하는 한쪽 귀퉁이 끝으로 올라 뒤를 돌아서려는 순간. 아이들은 양쪽으로 늘어서서는 마구 그물을 눌러 대는 게 아닌가?
그러자 그물망의 든든한 울타리 돼주었던 은행나무 잎이 떨어지는가 동시에 열매까지 떨어지면서 내 머리와 가슴, 등으로 타고 내렸다. 때때로 터지기도 하고 구르면서 은행나무 열매 특유의 향이 코를 찌르는 듯했다. 나는 이놈들 하며 녀석들에게 달려들듯이 일어났고 한창 웃으며 나를 골려 먹는 재미로 발을 구르던 아이들은 그제야 서둘러 도망치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잡을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좋았다. 선생과 아이들이 격의 없이 노는 학교. 이 재미라도 있어야 우리 아이들이 한 곳에서 6년을 다닐 수 있지 않겠나. 누구도 잘 경험해 보지 못할 일을 나는 오늘 겪으면서 내년이면 이 학교를 끝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지기도 했다. 누구나 경험할 수는 있지만,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은행나무 폭탄 맞기...나는 아이들의 글과 장난에서 잠시 행복했었다.
오늘은 아이들을 만난지 262일째 되는 날이었고 아이들과 헤어지기 44일을 앞둔 날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