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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가든 Aug 12. 2024

아주 잠깐의 파란 순간

올여름의 책 1: 여름의 피부_이현아 (푸른숲)


언젠가부터 그해 여름에 색을 입히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라고 했지만 사실 정확히 기억나는 건 재작년부터였으니 전혀 오래되지 않은, 새로운 눈(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재작년여름은 회색빛이 섞인 연파랑과 분홍이었고,

작년여름은 어둡지 않은 아주 진한 초록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인 올여름은, 선명한 오렌지색.


#ff6600


나는 몇 주 전, 내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몇 주 동안 이 색깔을 떠올리고 있다는, 심지어는 갈망하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는 그래, 올여름은 주황이다!라고 외쳤다. 물론 -밖이었으니- 마음속으로.


이 주황의 기간에 나는 다른 지역에 잠깐 살고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일상을 갑자기 마주하게 된 나는, 다행히 낯섦의 두려움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낄 정도로 그 일상에 즐겁게 빠져들었고, 낯섦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기분 좋은 설렘이 더 큰 상태로 두 달을 살았다.


그때의 내 상태야말로 낯설다고 할 수 있었는데, 내 자신이 낯설다는 게 기뻤던 그때의 내 상태와 선명한 주황색이 닮아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짧지만 강했던 그 기쁨의 향과 맛도, 딱 당도 높은 오렌지 그 자체일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올여름의 색깔을 떠올리면서,

어울리지 않을 위험이 있는 선명한 주황색 모자를 사려다 참았고, 그 지역의 미술관에 갔다가 그곳에서만 살 수 있는 주황색 노트를 사지 않은 걸 후회했다.

다시 우리 지역의 우리 동네에 돌아와서는 작년부터 내 책상 위에 있던 저 책이 내 머릿속에 있는 딱 그 주황색이라는 게 새삼스러워져서, 여름이 가기 전에는 한 번 더 읽어야 한다며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된 거 올여름이 가기 전에 주황색인 무언가를 가져야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올여름을 상징하고 기념할 선명한 주황색.



*


이 상태에서 읽은 책이었다.

‘여름의 피부’라는, 책이나 영화를 볼 때 계절감 같은 주변 환경이 중요한 나에게는 딱 봐도 여름에 읽어야 그 만족감이 더 높을 것 같은 제목에, 선명한 정석의 파란색 책등이 눈에 띄어 집어 들었다.


여름의 피부_이현아 (푸른숲)


저자인 이현아 작가는 그림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몇 개의 그림들과 자신의 생각을 노트에 채우기 시작했고, 그 노트를 반절 정도 채웠을 무렵에는 그 그림들 속에서 공통된 색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인 이름을 붙일 수 있는 하나의 색이라기보다는 ‘푸른 기운’에 가까운 어떤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렇게 그는 그 그림들과 이어져 있는 자신의 유년과 여름과 우울과 고독을 호수처럼 잔잔하게 이야기한다.


책을 읽기 시작하며 저자가 이 책에 모아놓은 그림들에서 그 ‘푸른 기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끝까지 읽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림에서 푸른 기운을 봤다기보다는 그의 글에서 잔잔한 푸른 기운을 느낀 것 같다. 그리고 수상할 정도로 시종일관 주황이었던 나의 여름이, 아주 잠시동안이었지만, 잔잔한 파랑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느꼈다.


나는 지금까지의 여름들 중, 아니 지금까지 몇 번이고 반복되어 지나쳐 온 계절들 중에서도 올여름에 그림을 참 많이 봤다. 책으로도 봤고, 특히 전시회에서 많이 봤다. 그리고, 그 그림들을 들여다보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 그들을 보면서 문득문득 궁금해하기도 했다. 저분은 저 그림을 보면서 지금 어떤 생각을 할까?


아직 여름이 한창인 8월의 지금, 자정을 넘긴 시각에 이 푸른 책을 덮으며 그때의 그림들과 사람들을 떠올린다. 눈앞의 그림을 보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색을 보았을까.

그리고 나는 그때 어떤 색을 보았지?


그렇게 올여름 갔던 전시회들을 떠올리고 있자니 내가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그림에서도, 가난하고 건조한 그림에서도, 익살스러운 그림에서도 조금씩 다른 농도의 주황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나의 여름이 온전한 주황이었음을, 그래서 그 그림에서도 주황을 볼 수 있었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파란색이 좋다고 말했던 주변의 몇 사람들과, 파란 영화들과, 그 영화 속 인물들을 생각하고,

마지막으로는 이 푸른 책의 저자가 이 그림들을 보는 뒷모습을 마음대로 떠올려본다.

어쩌면 그림에서 색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과 감성에 더해, 그가 푸른 기운을 머금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림들에서 자신과 연결되는 푸른 기운을 발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는 여태까지 만난 누구와도 닮지 않은 사람이다. 앞으로 그를 만날  없다면 나는 어떤 종류의 인간을 영영 잃어버린 기분이  거다. 그래서 단어와 단어를 붙여 그에 대한 특별한 묘사를 만들어 보려다 실패했다. 고유한  앞에서는  말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슬픔, 자기만의 외로움, 자기만의 아름다움, 자기만의 침묵, 자기만의 낯섦. 그런 것들 앞에서 나는 투명해진다.
(213쪽)



*


짧았던 파란 순간을 지나 내 한여름이 다시 나의 주황으로 돌아왔음을 느끼며 나는, 이 책 덕분에 올여름을 상징하고 기념할 선명한 주황색을 가지고자 했던 어딘가 초조함이 섞여있던 그 생각을 가볍게 내려놓게 되었다.

내가 미술관에서 봤던 그 그림들 중 내 마음에 스며든 몇 개의 그림들이, 바로 그 상징과 기념이 되어있음을 발견하면서.


이 정도면 올여름, 나의 주황색을 충분히 가져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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