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가든 Oct 16. 2024

모던 러브의 움직임 <나쁜 피>

별안간 씨네필의 피가 돌길래

_ 레오스 카락스의 신작 <IT’S NOT ME>를 기다리며, 저번에 쓰다가 묵혀뒀던 글을 이어서 써본다.

별안간 씨네필의 피가 돌길래…



지금까지 레오스 카락스의 작품을 네 작품만 본 사람으로서, 개인적으로 슬슬 추워지고 있는 이맘때쯤에 그 작품들이 보고 싶어 진다. 아, <아네트>는 여름에 너무 생각난다. 이번 여름 끝자락에도 그랬고, 그래서 오프닝곡 ‘May We Start?’를 주야장천 들어댔다. 그리고 나머지 <소년, 소녀를 만나다>와 <나쁜 피>는 슬슬, 이렇게 그대로 늦가을이 되면 아마도 더 생각날 것이다. 그때를 좀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완전히 서늘한 계절과 레오 카락스의 청춘물의 조합을 내가 이제 정말 완전히 좋아하나 보다. (나머지 한 작품은 취향이 아닌 상태로 남아있기에.. 쉿)


이번에 개봉하는 작품은 mnm에서 수입해서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을 했다고 한다. (+ 어머 12월에 개봉한다고!) 그래서 레오스 카락스 감독도 내한한 소식을 sns로 봤는데, 꽤 잘 잊고 있(다고 생각했) 던 나의 씨네필의 피가 다시 돌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사실 그의 작품들을 좋아하지만 그 정도로 좋아하는 건 아닌데, 내가 정말 사랑하는 영화감독들의 소식을 들었을 때 느끼는 팬으로서의 엄청난 설렘과, 지금처럼 이렇게 영화 마니아로서 피가 도는 느낌은 살짝 다른 것 같다. 겹치는 부분이 있긴 해도.


그런데 뭐.. 그 피가 다시 신나게 돌아봤자 그저 영화 마니아일 뿐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조용히 집에서 그의 영화들을 다시 보면서, 새로운 작품을 영화관에서 볼 수 있을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니 그렇게 하기로 한다.

생각난다고 했던 세 영화들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그 순서는 계속 바뀌긴 하는데, 사실 이 작품이 내 마음속에서 1위를 한 적은 없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요즘엔, 왜인지 이 작품이 생각난다. 나쁜 피!



*

<나쁜 피>(1986)


<나쁜 피>(1986)는 청춘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으로, STBO라는 바이러스가 퍼진 어느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사랑 없는 섹스를 하면 이 바이러스에 걸리는 상황에서, ‘알렉스’는 죽은 아버지의 친구들로 인해 같이 STBO의 백신을 훔치는 큰 일에 참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알렉스는 사랑하는 연인 ‘리즈’을 떠나고, ‘안나’라는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된다. 이 이야기의 외로움과 슬픔은 역설적이게도 사랑이라는 것에서 피어난다.


아무도 나에게 공감해주지 않는 것 같았거나, 갈피를 잡지 못하던 어릴 때의 음울함과 치기가 함께 담겨있는 이 작품의 분위기는 레오스 까락스의 작품들을 볼 때 가장 중점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분위기의 기초라는 생각이 든다. <아네트>에서도 보통 밝고 화려한 작품들이 대부분인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활용하면서도 스토리는 물론이고 음악에서도, 감독 특유의 연출에서도 우울함과 자조적인 분위기가 흐른다. 그러니까, 그의 작품들은 확 밝은 건 물론이고 어딘가 께름칙하지 않은 작품이 없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이 우리 인간의 우울하거나 폭력적인 부분을 보여주고, 그럼에도 사랑을 말하기 때문에 자조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나쁜 피>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걸 명백히 보여주지 않고 추상적인 방법으로 보여준다는 게 이 영화가 독특하게 느껴지는 이유들 중 하나인 것 같다. 배경도 가상의 독특한 질병이 퍼지는 어느 도시이며, 영화 속 주인공들은 시를 읊듯 대사를 말하고, 주인공들은 각각 자신이 향해있는 사람 또는 무언가를 향해 직선으로 달리기만 하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소통은 무언가에 막혀있는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러다 세 명의 주인공들이 모이게 된 마지막 장면에서 그 답답함이 묘한 슬픔으로 승화되는 기분이었다. 그들이 조용히 시처럼 웅얼대던 추상적인 말들과, 그것과는 반대로 폭발하던 움직임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와는 상관없다는 듯, 그것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남는 것 같았다. 그 대단한 사랑이라는 게 나쁜 피를 막을 수 없는 것과는 상관없이 할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드니 라방의 움직임은 그것만으로도 참 설득력이 있다. 사실 지금 레오스 카락스의 다른 영화들보다 이 영화가 끌리는 이유도 이 움직임이 주는 그 특유의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인 것도 있다. 언제든 안 그러겠냐마는.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다 짐작할만한 바로 그 장면 이야기이다. 그 장면은 참 볼 때마다 신기하다. 몸을 어떻게 저렇게 쓸 생각을 했으며, 어떻게 저렇게 쓸 수가 있으며, 저렇게 몸을 움직여서 이런 장면이 나왔으니 얼마나 신났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한다.


나쁜 피에서 알렉스가 춤추며 뛰는 장면

그리고 그것도 그건데, 저렇게 춤추며 뛰어다니는 걸 보통 현실에서는 하지 않기 때문에 희열이 느껴지는 것도 있다. 사실 나는 이 동네를 저렇게 춤추며 뛰어다니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단연 프란시스 하의 그레타 거윅과 그의 오마주 대상인 나쁜 피의 드니 라방이다. 그렇게 아쉬운 대로 데이비드 보위의 모던 러브를 들으면서, 내적 댄스를 (당연히 머릿속으로) 추며 집에 오곤 하는 것이다.


프란시스 하(Frances Ha, 2014)에서 프란시스가 춤추며 뛰는 장면

이런 순간은 마구 발산할 수 없어 꽤 답답하지만, 그래도 내 몸 안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느껴지긴 하기에 나름 즐겁다. 그러니까 드니 라방의 움직임이 주는, 내가 좋아하는 그 터지는 에너지는 화면을 뚫고 나온다. 이 영화가 조용하지만 강렬함이 느껴지는 이유도, 특히 춤추며 뛰는 이 장면뿐만 아니라 영화의 여러 장면들에서 존재하는 배우들의 극적인 움직임, 특히 드니 라방의 다양한 움직임 덕분도 있지 않나 생각한다. 몸으로, 얼굴로 만드는 모든 움직임 말이다.


어쨌든, 모던 러브라니. 매번 볼 때, 들을 때, 생각할 할 때마다 단순하고도 즉각적인 희열이 느껴진다. 각 시기에서의 요즘 애들, 그러니까 현대의 청춘들인 알렉스도 프란시스도, 각자의 현대적 사랑을 위해 그토록 영원할 것처럼 달렸던 게, 또는 달릴 수밖에 없던 게 그 에너지 덕분일까? 사람을 향해있든, 꿈을 향해있든 폭발적이었던 청춘의 에너지 말이다.

다른 것보다도 이 영화가 떠오르는 건 아마도 나에게, 세상은 쉽지 않고 관계는 엇갈리는 와중에도, 사랑하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다는 걸 소리치기보다는 몸의 움직임으로 외치는 듯한 그 에너지가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


래오스 카락스의 작품은 참 묘한 방식으로 강렬하다. 그게 그의 영화에 ‘진입’하기에 어려운 지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공감하기에 어렵거나, 특유의 분위기에 몰입하기에 어렵거나, 정말 무슨 이야기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니까. 이렇게나 자신만의 세계가 확실하다. 하지만 그 세계를 한 번 경험해보고 나서 감독의 다른 작품이 궁금하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었다면, 바로 다른 작품도 경험하는 걸 권하고 싶다. 어떤 작품이든, 그날 꽂히는 걸로. 굳이 장면마다 어떤 의미를 찾고 캐내고 하면서 보기보다는, 그냥 그 기묘하게 에너제틱하거나 또는 불안하게 조용한 시 같은 장면들이 흘러가는 걸 바라보길.


일단, 나부터도 아직 보지 못한 그의 영화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도전하리라는 생각으로, 조만간 나쁜 피와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또 찾아볼 것 같다.

잇츠낫미 개봉을 기다리면서.


Modern Love - David Bowie



매거진의 이전글 이제 그만큼은 아는 확신 <바닷가의 루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