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시작을 응원하며
수능에 관련한 기억이 딱 세 개가 떠오른다.
이 세 기억들은 그리 긴 기억은 아니다.
그냥 짧게, 그 순간만 기억나는데,
*
첫 번째 기억
: 고등학교 1학년, 새벽 공기와 친구들
당연히 내가 수능을 봐야 하는 해는 아니었다. 학교에서 나는 어떤 팀(?)에 속해있었는데, 아마도 그 팀에 있는 3학년 선배 학생들을 응원해야 했던 것 같다.
사실 아닐 수도 있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게, 내가 1학년이었는지 2학년이었는지도 사실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한 70퍼센트 정도로 1학년이었던 것 같은 건, 그때 같이 응원을 갔던 친구는 기억나기 때문이다. 그 수능을 보는 선배들과 친하진 않았고, 응원을 함께 가던 다른 학년 선배들도 아예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다른 학년 선배? 1학년 맞나 보다) 그때 나는 우리 학교와 친구들을 좋아하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별 친분도 없는 사람들을 응원가는 것도 나름 괜찮았다.
우리가 새벽에 각자 나와서 학교 문 앞에서 만났는지, 그 학교가 어디였는지, 이런 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새벽에 그 차가운 새벽 공기를 들이마시며 친구들과 우리의 자리를 지켰던 게 기억난다. 그리고 다른 학교 학생이든 우리 학교 학생이든, 내가 모르는 수험생들이 학교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게 기억난다. 그렇게 모두가 들어간 후, 아직 아침이지만 거의 점심시간 정도는 된 것 같던 그 오전에, 친구들과 어떤 길을 함께 걷다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기억, 조금 피곤하다고 생각하던, 그 기억들까지만 난다.
내가 그때 별생각 없었던 것도 기억난다.
그냥 찬 공기를 친구들과 다 같이 맡으며, 시험을 보는 게 아니라 응원을 하고 있다는, 그냥 단순한 설렘과 그것보다도 더 단순한 즐거움만 있었을 뿐.
새벽 공기 덕분인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친구들 덕분일 수도.
*
두 번째 기억
: 고등학교 3학년, 소리와 배신감
그다음. 첫 번째 기억에서 내가 1학년이었다는, 그 기억이 맞다면 2년 후, 이제는 내가 수능을 볼 차례가 되었다.
이건 첫 번째 기억과는 달리 ‘아닐 리’ 없는 정확한 기억이다. 세 기억 중 가장 긴 기억인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영어를 망쳤기 때문이다.
영어를 망친 건 아주 의외의 사건(?)이었다. 평소에하던 것보다 한 등급이 내려간 것도 아니고, 거의 세 등급이 확 내려간 정도의, 정말 말 그대로 망쳤다고 할 정도로 망쳤기 때문이다. 나는 사회탐구 영역을 (문과였다) 잘 못했는데, 그냥 외우기가 싫었던 건지 국어, 수학, 영어 이 세 과목에 그나마 자신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수학과 영어에 기대를 거는 사람이었다.
국어는 생각보다 아주 괜찮았다. 수학은 너무나 잘 풀렸다. 수학학원 선생님과 그 학원을 같이 다니는 내 친구와 같이 이 문제는 어땠고 저 문제는 어땠다는 이야기를 할 생각도 했다. 물론 쉬는 시간에. 그리고, 점심시간이 지나서였나? 영어시험이 시작되었다.
그 소리가 언제부터 났는지는 모르겠다. 듣기 문제부터였나, 아니면 듣기가 끝나고 읽기부터였나. 문제를 풀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작지만 길게 계속되었고, 결국 나는 그 소리에 단단히 말려버렸다. 지금 나는 특정 거슬리는 소리가 반복되는 걸 듣고 있으면 스트레스를 확 받는 스타일인데, 그러고 보니 그게 그때부터였을까? 어쨌든 영어를 망친 이유는 그거였다. 어떤 소리가 났고, 내가 그 소리에 말렸다는 것.
영어 시험이 끝나고 쉬는 시간, 나는 멍해있는데 주변에서 이번 영어가 너무 쉬웠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 소리가 나만 들렸나 싶었다. 내 귀에는 영어 지문이 교재에 나온 것과 거의 똑같이 나왔으며, 너무 쉬웠다는 말만 들릴 뿐 ‘나는 어렵던데’라는 말도 들리지 않았고, 그 소리에 관한 이야기도 없었다. 이제 이 시점에서는 그 소리가 미스터리 한 게 되어버린 셈이다. 아니, 정말 나만 들었나?
어쨌든 너도나도 다 쉬웠으면, 이번엔 내가 느끼기에도 그냥 망쳐버린 나는 이 시험 자체를 망쳐버린 게 틀림없으므로, 의욕이 확 떨어졌다. 그다음 과목은 어차피 평소에도 자신이 없었던 과목들이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가.
사실 시험이 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가 이 기억의 포인트이다. 시험을 망친 건, 그때는 너무 큰 일이었기 때문에 그 순간에는 당연히 너무나 큰 충격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시간이 지나니 지금의 나와는 그 정도의 큰 상관은 없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수능을 한 번 더 봤고, 두 번째 수능에서는 평소 하던 대로의 괜찮은 점수를 받았으니까.
지금의 나와 큰 상관이 있는 문제는, 집으로 돌아와서였다. 그걸 자세히 말하고 싶진 않다. 그냥, 그날 이미 조금 어두워진 저녁, 집으로 돌아온 그 시간에 전화를 걸어온 수학학원 선생님으로부터는 그분다운 위로의 말을 들었는데, 그런 내 옆에 있던 엄마에게는 마찬가지로 그분다운 말을 듣고는 생각지 못한 배신감이 들었다는 것만 말하겠다.
그 소리와 강한 배신감.
쓸데없이 아직도 너무 강하게 남아있는 기억인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
세 번째 기억
: 고등학교 졸업한 해, 그 노래와 다른 것들
사실 이때의 기억은 가장 단순하고 짧다. 그러니까, 가장 복잡한 감정 없이 순도가 높은 느낌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이때, 전년도에 너무 감각이 예민해서 수능을 망쳤으며 이번에는 좀 제대로 다시 수능을 봐야 했던 사람이라기엔 좀, 편안했다. 심지어 왜인지 자유로움 같은 걸 살짝 느끼기까지 했다.
이 기억의 포인트는 노래이다. 나는 그날 아침 일찍 아빠의 차를 얻어 타고 내 시험 장소인 학교로 향했다. 아빠는 아빠답게 별 거 아닐 거라는 듯이 웃으며 인사를 해주었고, 나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학교 안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내가 집을 나와서 그 학교 안까지 들어가던 그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시간 내내 나는 노래 하나를 듣고 있었다. ‘이거 하나만 들으면 시험 보는 동안 이 멜로디가 머릿속에 계속 맴돌아서 이번에도 망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래도 그냥 그 노래 하나를 들었다. 오히려 그 노래를 멈추면 자신감이 확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조금 떨리긴 했다, 당연한 거지만. 근데 차에서 내려, 이 노래가 청량하게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학교를 향해 걸으면서는, 이상하리만큼의 편안함이 느껴졌다. 내 옆에 지금 아무도 없는 게 편했고, 지금 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응원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알거나 아끼는 누군가를 응원하는 걸 천천히 걸으며 보고 있자니 오히려 편안해졌다. 이게, 나만의 일이 아니라 이 많은 사람들의 큰일이라는 걸, 어쩌면 내가 이 시험을 생각할 때의 크기보다 훨씬 크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그저 이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이고, 그냥 잠시 작은 등장인물로 이 장면에 들어가 있는 사람인 것처럼 여길 수 있었다. 그래서 자유로웠다. 차에 있을 때까지 있었던 기분 나쁜 긴장감과 어색함은 그렇게 확 사라졌다. 대신 기분 좋은 이른 홀가분함과 익숙함이 느껴졌다.
그 청량한 노래 덕분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나와 상관없던 주변 사람들 덕분이었을 수도 있고, 첫 번째 기억처럼 찬 공기 덕분일 수도 있다. 아니면 두 번째 기억의 압박감에 비해 지금 너무 괜찮다는, 그때의 내 마인드컨트롤 덕분일 수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때의 수능날은 꽤 상쾌했고 생각보다 편안했다는 것이다. 그 상쾌하고 편안했던 아침의 기억 몇 분만이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고, 그 몇 분의 기억이 이 노래에 조금 담겨있다는 것도.
*
그리고 다른 기억은 없다.
이게, 매년은 아니지만 아주 가끔, 올해 같은 해에, 오늘이 수능 날이라는 걸 실감하고는 그때를 생각하면 꼭 생각하게 되는 기억 세 개다. 딱 이 세 기억만 난다. 아예 사라지지도 않고, 기억력이 별로인 나로서는 너무나 신기할 정도로 그때의 기억을 잘하는 내 친구가 기억을 끄집어내 주지 않는다면 새로운 게 떠오르지도 않는다.
다만, 즐거웠던 기억은 어째 작년보다 더 옅어져 있는데, 좀 옅어졌으면 하는 기억은 생각할 때마다 또렷이 살아서 다시금 그때의 감정을 떠오르게 하는 걸 느끼긴 한다.
이런 기억도, 감정을 느끼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다른 게 내 마음대로 될 리가 없었다는 걸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나를 알게 되면서 만드는 진짜 생각들과 강렬한 감정들은 수능날이 아니라, 그전의 아주 조금의 몇 기억들과 그 후의 매 순간이었다는 것도. 수능 그 이후, 그러니까 무언가가 결정된 후, 이제 이 상태로 새로운 뭔가를 시작한 후의 그때가 진짜였다.
수능이 아무것도 아닌 건 전혀 아니지만, 수능을 보고 나서의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린 건 아니었다는 거다. 이런 건 그런 존재도 아니며, 그런 존재가 되어서도 안 되는 그런 것임을, 그때도 지금도 안다.
세 번째 기억의 그 노래는 이 아티스트의 또 다른 시작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 수능날, 나 역시 그러길 바라며 계속 들었고.
다행히 나는 이때의 수능 결과를 가지고 어찌어찌 새로운 시작을 하긴 했다. 근데 그건 정말 그냥 말 그대로 시작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거의 십 년이 지난(!) 지금, 내 주변의 사람들이 이미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을 해서 전개해나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나는 그들이 이미 완성한 단계를 이제 시작하려는 계획을 간신히 세운 상태이다. 정말 방금.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수능과 비슷한 경험이 몇 번 있었다, 그게 수능만큼 커다랗게 느껴졌냐고 하면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이 계획에도 수능 비슷한 게 있다.
하지만 날짜를 따져보니, 이번에 느끼게 될 건 찬 공기가 아니라 약간 더운 공기일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신경을 긁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때보다는 괜찮을 것이다. 또 비슷한 상처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닐 테니 적어도 충격 같은 건 없을 것이다.
그냥, 그땐 어떤 노래를 듣게 될지, 그건 좀 궁금해진다.
우리의 시작을 응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