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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담 Jan 06. 2020

1/5_방탈출 보드게임

매일매일 일기 쓰기 프로젝트(4/365)

 제주도에서 놀고 온 친구들이 감귤 크런치 초콜릿과 함께 흥미로운 물건을 들고 왔다. 바로 방탈출 보드게임인데 2만 원이 넘는 사악한 가격에 비해 터무니없게도 1회용이다. 진행에 자르거나 접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어서 다회 플레이는 불가피하다고 한다. 이런 물건을 덥석 사 오다니 그 열정을 누가 말리리라. 우리도 방탈출을 좋아하지만 이 친구들은 타 지역에 갈 때마다 서너 군데씩 방탈출 카페 도장깨기를 하고 올 정도로 방탈출 마니아여서 후기를 들을 때마다 매번 혀를 내두르게 된다. 


 게임의 테마는 이러하다. 항해 중 정체불명의 폭풍우에 휘말려 눈 떠보니 이상한 해변이고 주변의 모든 사물은 자물쇠로 잠겨 있으며 누군가 남긴 편지 한 장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게임 시간은 1시간에서 2시간이고 난이도는 별 4개 반이다. 처음 세팅은 박스를 열었을 때 제일 처음 보이는 설명서에 적혀 있으며, 설명서를 다 같이 꼼꼼히 읽고 그 후 시키는 대로 따라 하면 자연스럽게 시작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2시간 반이 걸려 탈출했다. 처음에는 6명이서 시작했는데, 조그마한 종이조각에 적힌 힌트들을 돌려보는 데에 물렸는지 초장부터 한 명이 이탈했다. 이후 막히는 부분이 생길수록 한 두 명씩 이탈하더니 종국에는 단 2명(보드게임을 사 온 장본인들)만이 남아 힌트를 후하게 써가며 탈출했다. 나는 탈출 직전에 그만두었다. 도저히 마지막 단서를 찾을 수가 있어야지.


 어쨌든 끝을 보고 나니 이제는 가치가 없어진 종이 조각 한 뭉치가 우리 집에 남았다. 다들 버리자고는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누구 하나 쿨하게 쓰레기통에 가져다 넣는 사람이 없었다. 나도 필요 없는 물건이지만 멀쩡한(?) 물건을 버린다는 것에 죄책감이 들어 지금도 가만히 놓아진 저 상자만 물끄러미 들여다볼 뿐이다. 참 웃긴 일이다. 저것들도 불과 몇 시간 전엔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는데.


 그래도 잠시나마 놓아둘까 한다. 새로운 가치를 찾아주는 일은 어렵겠지만. 무가치해진 지금이라도 영영 쓰레기가 된 것보단 나을 테니까. 어쩌면 편해 보이기도 한다. 매일매일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사람들과 다르게 자기 할 일을 다 끝내고 고요해진 참이니. 사람 마음이 웃기다. 괜한 감정이입만 안 했어도 바로 버렸을 텐데. 종이조각과 인간은 너무나 다른데 그까짓 비유가 뭐라고. 새벽이 사람을 우습게 만드는 거지. 어쨌든 내일을 치열하게 또 살아가야 하니까 나도 어서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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