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준 Feb 28. 2024

[책] 죽음을 통한 생에의 감사

김준일 <나는 캐나다의 한국인 응급구조사>

죽음은 삶의 일부분이며, 잘 죽는 것은 우리 삶의 마침표를 잘 찍는 것과 같습니다. 환자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돌아보면서, 자신에게 진짜 중요한 것들을 잘 가꾸며 살다 보면 언젠가 다가올 죽음 또한 잘 맞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52쪽)


죽음이란 무엇일까. 산다는 건 무엇일까. 다분히 철학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며 이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죽는 게 잘 죽는 것일까?


아마 이런 질문에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는 직군이 의료계 종사자, 특히 first responders 즉 파라메딕이 아닐까. 아플 때, 다쳤을 때 우리는 자연스레 119를 떠올리고 필요하면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면 소방서의 구조 대원들은 초 단위까지 줄여 가며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현장에 도착해 요구조자를 돕는다. 이는 일견 무척 당연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살갗이 찢어져 몸속이 훤히 보이고, 뼈가 부러져 피부 밖으로 빠져나와 있고, 무언가에 깔리거나 짓눌려 있는 사람을 구조해야 하는 그들의 일상을, 그들의 마음을.


그들의 입장이 직접 되어 볼 수는 없겠지만 간접적으로 경험할 방법은 있다. 캐나다에서 파라메딕으로 근무하고 있는 저자 김준일 <나는 캐나다의 한국인 응급구조사>에는 파라메딕으로서 그의 일상과, 사람들을 구하고 도우며 느끼는 감정, 파라메딕으로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고뇌 등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응급구조사의 면면이 정리되어 있다.



일반인은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어쩌면 끔찍할 수도 있는 온갖 상처와 죽음 들을 일상적으로 목격해야 하는 사람들. 죽음의 문으로 끌려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든 돌아오게 만들어야 하는 그들 직업의 무게. 파라메딕이라는 직업을 택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뇌해야 하는 것들. 다름 아닌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일을 하기 때문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생각들. 누군가를 돕지 못했다는 생각이 내가 다침으로써, 용서를 받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용서를 구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라는 거대한 죄책감과 자기비난으로 돌아오는, 과중한 짐을 짊어지는 직업.


물론 119 대원들이 늘 생사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때는 처마에 벌집이 있다거나, 들개나 멧돼지가 사람들을 위협하고 다니는 등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 발생했을 때다. 그럴 때 우리는 당연하게 응급구조사를 찾는다. 그런데 우리가 잊고 있는 게 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밥벌이를 위해 일을 하는 (물론 사명감을 갖고 이 직업을 택한 분들도 많을 거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근로자라는 측면에서) 일반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업의 특수성을 고려한다고 해도 그들의 어깨에 얹힌 타인의 생명이라는 무게는 사람으로서 쉬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일 테다.


현장에서 환자의 벗겨진 얼굴 가죽을 보았을 때 우리가 받았던 충격 역시 그 브리핑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로써 눈을 감아도 여전히 보이는 보글거리는 피거품을 포함하여, ‘환자 케어와는 별 상관없고 중요하지 않지만 우리 눈과 귀와 마음속에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다. (…) 우리는 어서 다음 출동을 준비해야 했다.
(…)
하지만 내 마음속에 불어닥친 소용돌이는 가라앉을 줄 몰랐고, 그 탓에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능력이나, 무엇을 보고 느끼는 행위 모두 엉망진창이 되어서 나는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26쪽)
환자가 살아 있는 동안 만나는 마지막 사람이 되기 싫다는 이유로 도망치듯 멀어지고자 했던 내가 결국 다시 불려 들어와 그의 가슴을 누르게 된 것은 그가 살아 있던 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본 사람, 그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었던 사람으로서 책임져야 하는 마무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44쪽)
나는 지금 훌륭한 파라메딕으로서 그가 가졌던 평안함과 침착함을 얻고자 애쓰는 중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실력 있는 파라메딕이 되기 위한 대가가 그저 내 시간과 노력에서 그칠 것인지 아니면 C처럼 나의 내면까지 바꿔야 하는 것일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57쪽)
몸은 뒷마당에 앉아 새파란 하늘을 보고 있는데도 머릿속은 시뻘건 피바다 속에서 허우적대며 ‘그때 그 환자, 그걸 이렇게 했으면 뭐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80쪽)
신고자가 전하는 말을 그대로 듣고 있을 수밖에 없고,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을 드러낼 수 없으며, 먼저 전화를 끊을 수도 없는 911 신고 접수자에게 그것은 단순한 감정 노동의 수준을 넘어서는 가학적 폭력이었으며,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자신의 심장에 날카로운 칼이 푸욱 꽂혀 순식간에 수백수천 번 토막 나는 난도질 같은 것이었다. (82쪽) 
→ 마지막 가는 길, 혼자 가고 싶지 않았던 걸까. 하지만 왜 그 순간에 911 직원을 죽음의 목격자로 만들어 버린 걸까. 그 직원에게는 앞으로 살아갈 인생이 있는데. 죽은 순간이 외롭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산 자에게 상처를 남기는 지독한 이기심.
화상을 입거나 다치면 아이들에게 좀 덜 미안해질까? 그러면 나중에 내가 죽을 때 면죄부 한쪽 귀퉁이라도 잡고 빌어볼 수 있지 않을까? (90쪽)


<나는 캐나다의 한국인 응급구조사>를 읽어 보려 마음먹었던 건 단순한 호기심에서였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점차 내 마음도 함께 무거워져갔다. 그리고 의외의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오늘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기 시작한 거다. 책은 죽음을 목도하기에 한편으로 깨달을 수 있는 살아있음에 대한, 오늘도 평범한 일상을 살았음에 대한 감사함을 일깨운다. 지금 이렇게 잘 살아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이고 운이 좋은 건지, 행복한 건지.


혹시라도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매일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이 가끔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지? 그렇다면 당신 일상 중 어떤 하루는 눈앞에서 가족이 사고를 당하는 모습, 심지어 그 가족의 목숨이 끊어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날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러면 당신이 느끼는 그 지루함에 오히려 감사하게 될 것이다. (70쪽)
하지만 잔뜩 출력한 이력서를 가슴에 품은 채 보이는 회사마다, 공장마다, 식당마다 들어가 나를 써주지 않겠냐고 매달리던 그 절박함을 아로새기고,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것을 감사히 되새기면서 이 길을 끝까지 뚜벅뚜벅 가볼까 한다. (109쪽)
참 별것 아닌데… 우리가 매일 가족들과, 사랑하는 이들과 스쳐 지나가듯 나누는 사소한 일상일 뿐인데, 신기하게도 삶의 끝에 다다르면 그런 사소한 일상은 죽기 전 마쳐야 하는 신성한 의식이 되고 만다. (…) 오히려 바로 그런 사소한 일상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행복을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이고, 행복했던 기억만큼 우리 삶에서 중요한 건 없기 때문일 것이다. (206쪽)
분명 누구나 꿈꾸는 이상적인 환경은 아니었지만 저와 제 가족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제법 잘 살아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제가 만족하는 법을 모른 채 불만을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고 있었던 것뿐이었지요. (251쪽)


나의 상처와 죽음도 중요한 고민거리지만, 타인의, 특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상처와 죽음에 관해 우리는 얼마나 생각해 보았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가족이 곁에서 사라질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콧날이 시큰해진다. 책을 읽으며 눈가가 젖었던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존재가 희미해진다는 게, 사라진다는 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저자가 현장에서 겪은 이야기를 읽으며 저도 모르게 눈가가 글썽 해졌다.


이제 아이들의 마음까지 다치지 않게 지켜줄 차례였는데 정작 마음이 아프기 시작한 건 나였다. 외상 흔적을 살피기 위해 들어 올린 아이들의 머리카락은 곱게 땋여 있었다. 아마도 제 엄마의 솜씨였겠지만 이제 그녀의 손길이 이 아이들에게 닿을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그러다 아까 사망한 엄마의 맥박을 확인하느라 그녀의 손목을 잡았던 기억이 났고, 잠깐 멈칫했던 것도 같은데 내 손을 아이들의 머리, 뺨, 그리고 손에 살포시 얹어주었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아이들에게 제 엄마의 마지막 손길을 전해주고 싶었다. (73쪽)
하지만 돌아갈 수도 없을 만큼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것, 그리고 그 상태로는 가까운 미래에 자신의 삶이 멈출 수 있다는 것 정도는 본인들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186쪽)
→ 응급실에서 의사를 포함해 모두에게 외면을 당하고 흐느끼던 노숙자의 뒷모습이 상상된다. 한 인간의 가치, 존엄의 타락. 측은하다. 그러나 자신의 존엄을 떨어뜨린 건 다름 아닌 그 자신. 아마 그 지점이 가장 처절하게 후회되고 슬픈 지점 아닐까.
그리고 베이스로 돌아와서 평소와 같이 업무 일지를 작성하는데 내 근무복 단춧구멍에 매달려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이 눈에 띄었다. 아마 좀 전에 그녀를 뒤에서 안아 일으킬 때 붙었을 것이다. 조금 전까지 바닥에 누워 있던 환자에게 거기서 그렇게 잘 거냐고 냉소했던 나는 내 옷에 붙은 그 머리카락을 보자 그만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마치 ‘나, 더 살고 싶어요. 제발 붙잡아 주세요’라고 소리 없이 외치는 것 같아서… (228쪽)
“힘들게 해서 미안해… 같이 살아줘서 정말 고마워… 여기서 더 힘들게 있지 말고 어서 가… 사랑해…” (249쪽)


버스에서 읽으며 현웃 터졌던 장면


한 편의 메디컬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었다. 물론 이 책에 묘사된 이야기들은 현실이고 드라마와는 다르지만, 너무 생생하게, 파라메딕으로서 보고 느끼는 것을 설명하고 있어 마치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했다.


경험이 부족한 내게 파라메딕이라고 할 때 떠오르는 인물은 둘뿐이다. <고스트 위스퍼러>의 주인공인 멜린다의 남편 짐, 그리고 <경찰서 옆 소방서>의 송설. 가상의 두 인물에게서는 공통적으로 보이는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들도 월급을 받으며 일하는 근로자일 것이다.


생사의 갈림길이 나뉘는 최전선에서 애쓰는 사람으로서 지니는 사명감이나 책임감도 있겠지만, 저자 역시 어쩌면 그저 한 명의 근로자에 불과할 테다. 특별한 성인saint이 아니라 그저 일반인이며, 그저 일터가 생사의 최전선일 뿐인 것이다. 그가 캐나다에 처음 자리 잡던 때 먹고 살 일을 걱정하며 절박하게 일을 구했던 시절을 묘사했듯, 파라메딕이 처음 되었을 때 불타는 사명감보다는 ‘이제는 그래도 직업이 생겼으니 우리 가족을 조금은 안정적으로 부양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듯, 이 역시 밥벌이를 위해 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일에는 자신이, 타인이 부과하는 커다란 부담이 있다. 그가 ‘돕는’ 것이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 전 예상한 바와는 달리 마지막 장을 덮기까지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건 역설적이지만 ‘삶’이었다. 죽음을 바라보며 오히려 삶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매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라메딕의 일상과 그들의 고민이 궁금하다면 물론 추천하지만, 지금 나의 삶이 정체되어 있다고 느낀다면, 사방이 꽉 막혀 숨이 막혀 일상이든 뭐든 그 어떤 것에도 신경을 쓸 수 없다면, 일상과 삶의 가치에 관해 고민하고 싶은데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일독을 권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책] 고개를 들어 나무를 보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