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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 Sep 16. 2022

짧은 도망.

여행이거나, 일탈이거나, 쉼표라거나.


여행이나 일탈을 결정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느닷없이 이뤄진다. 적어도 올해 유월의 경우에는 특히나 더 그랬다. 무언가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움직였던 것 같다. 바다여야만 했다. 그리고 멀면 멀수록 더 좋았다. 그렇다고 제주도까지 먼 거리의 기분은 아니었다. 주문진에, 언제부턴가 점찍어 놓았던 모든 공간이 바다인 펜션을 나는 숨도 쉬지 않을 태세로 결제해 버렸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으니까. 유월을 비수기로 나눈다는 사실을 나는 올해에서야 처음 알았다.


기차를 타러 가는 길, 무심히 출퇴근하는 매장을 지나쳤다. 모두의 표정과 그곳의 오늘이 어제와 그대로임을 찰나에도 알아보았다. 나는 여기가 아닌 곳으로, 다른 곳으로 갈 거야. 혼잣말이라도 할 기세로 떠올리니 갑자기 카페인이 생각나 근처 다른 매장에 들러 콜드 브루를 한 잔 샀다. 평소에는 하지 않을 일이었다. 아마도.


강릉역은 2년 만이었다. 구면인 역이었지만 역명판을 보는 것만으로도 현실과 조금 동떨어져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올랑거렸다.

주문진 숙소까지는 택시를 탔다. 인상이 좋아 보이는 기사님과 숙소까지 가는 동안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강릉에서 택시투어를 하다 보면 재미있는 손님들을 많이 만난다고 하셨다. 모르는 사람에게 듣는 알 듯 모를듯한 이야기들도 이 여행에 포함되는 거겠지, 나는 때때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 아저씨께 수고하시라 말씀드리고 목적지에서 문을 열자마자 짠내가 훅 끼쳐 왔다. 몇 분을 달려왔을 뿐인데 역에서부터 여기까지도 나게에는 다른 곳이었다. 그 완전한 다른 곳, 이라는 감각이 그저 좋았다. 어쩌면 나는 익숙한 곳에서 도망쳐 나와 '얘 너 다른 곳에 온 거야.' 증명이라도 받고 싶었던 게 아닐까.


드디어 체크인, 문을 열고 나는 적막 속에 잠시 멍. 하니 서 있었다. 신발도 벗지 못하고 보이는 풍경을 그냥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당연한 감각이겠지만, 일상이 아니었다. 여기는 다른 세계였고 나는 무언가를 처음 체험하는 힘없는 여행자였다. 다리 힘이 풀리는 느낌이라 신발을 벗고 새하얀 타일로만 이루어진 방에 발을 디뎠다. 공간의 세 면 전체가 모두 바다를 위한 프레임이었다. ‘살아가면서 이런 풍경은 또 처음 보는구나’ 하고 나는 겨우 깨달았다. 퍽이나 묘한 경험이었다. 어느 구석의 어느 구석에서도 바다를 볼 수 있었다. 하늘은 분 단위로 농도를 바꾸고 있었고, 바다는 하늘에 따라 색온도를 서서히 낮춰가고 있었다. 멍하니 앉아서 나는 그것을 의미 없이 바라보았다. 이런 의미 없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어쩌면 나는 전부터 그걸 알고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아, 나는 지금 현실과 멀구나.



 머물고 있지만 현실이 아니구나, 란 생각에 미치자 눈물이 났다. 소리도 없이 눈물이 나서 조금 흘렸다. 부자연스럽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았지만 그대로도 괜찮았다. 나는 나인걸로 되는 시간 안에 있었으니까.





적막한 공간 속에 시간만이 부드럽게 흐르고 있었다. 이곳은 내가 머물 곳이지만 머물던 곳은 아니었다. 그 점이 나를 굉장히 안심시켰다. 하늘색의 채도가 조금 더 떨어졌을 때 앞바다에 산책을 나갔다. 이름 모를 돌들, 이름 모를 파도들. 모래사장은 작은 조그만 바다였다. 어업을 하는 곳이라는 흔적이 군데군데 붙박여 있었다. 짧은 시간 직접 맡은 바다는 짭짤하고, 희었다. 나는 장노출로 흐르는 파도를 담았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였다.




저녁을 먹기 전에 나는 반신욕을 하기로 했다. 노오란색 오리 모양의 입욕제를 가져왔기 때문에 꼭 사용해야 했다. 온수를 따끈하게 흘리는 동안 노란 오리가 퐁퐁 녹으며 물의 빛깔을 바꾸었다. 실재하던 입욕제의 형태가 녹아서 사라지는 걸 보면서 녹을 것들은 녹겠지, 그래 결국은 녹아 버리겠지 , 이렇게 뭐든 금세 녹으면 정말 좋겠다. 다 괜찮아질 거라는 마음들도 이 입욕제처럼 형체 없이 부드럽게 녹았으면 좋겠다. 모습을 바꾸는 형태, 그 자체를 바라보며  몸을 담갔다. 따뜻했다. 따뜻해서 체온이 조금씩 오르는 기분이 드는데 새삼 '너 스스로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엄청 애썼네.' 하는 생각이 번듯 들었다. 미묘하기도 하지. 스스로에게 필요한 시간, 그 시간을 알아채는 타이밍은 늘 이런 식으로 찾아오곤 했다. 힘들다고 악다구니를 써 대는 몸을 모른 척한 지 오래되었다.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몸을 따뜻하게 한 뒤 혼자 회를 시켜 먹었다. 사진을 찍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앞을 보고 있으려니, 혼자 앉은 허공에서는 말이 돌지 않는구나, 누군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까, 하는 생각 따위를 했다. 쓸쓸해서도, 적막해서도 아니었고, 말을 '하고파서'도 아니었다. 평소에도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었고, 누군가와 함께 왔더라면 대화보다는 그냥 말을 했을 것이다. 감탄사를 말하거나 현재를 다 잊어버린 기분으로 깔깔거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건 원치 않았다.


에일 한 캔을 사러 가는 길, 사람 손을 잘 타는 애교냥을 만났다. 캄캄한 바다의 한 자락을 걸어 5분 거리에 편의점을 들러 이것저것 사 가지고 돌아오는 동안, 츄르를 줄까 생각했던 친구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애옹 거리는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 소리를 따라 내려가 보니, 배가 고파 쓰레기봉투를 뜯는 길냥이가 있었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녀석이 부디 먹기를 바라며 츄르 하나를 적당한 거리에 짜 두고 돌아갔다. 계단을 오르면서 보았더니 멀찌기서 보던 치즈 태비가 그 흔적을 열심히 먹어치우고 있었다.



저녁에 시원하게 마시려고 잠시 에일을 냉동실에 넣어 뒀는데, 그걸 잊는 바람에 반쯤은 슬러시가 되어 버린 에일을 마셨다, 마신 건지 씹어 먹은 건지. 뭐 아무래도 좋았다. 맥주라면 꼭 한 캔이 좋다. 기분이 적당히 좋아지는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양.



하루짜리 여행이 휴식보단 시간에 쫓겨 일정을 소화하게 되는 과정인 걸 알아서, 사실 당장 다음 날의 일정도 없었다. 그냥 나는 지금 내가 어디쯤에 서 있고, 얼마큼 걸었고. 얼마큼 더 걷고 싶었는지, 그걸 가늠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잠을 들 때는 세찬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들으며 잤다. 쪽창을 몰아붙이는 바람은 마치 바깥의 무언가를 부술 것처럼 기세 등등했다. 조용히 음악을 켜 두었다가, 결국은 쪽창을 닫고 잠을 청했다. 바람이 우는 소리를 듣는 기분이어서.


아침은 맑고 쨍했다. 언제 바람이 불었냐는 듯 고요한 하늘을 보면서, 어젯밤 산책 때 가보려고 했던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경포에서 시작해서 가능하다면 안목까지 걷고 싶었다. 불가능한 계획이었겠지만, 우선은 바다를 걷기로 했다. 애매한 시간으로 예약된 고속버스 시간 때문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점심으로는 순두부를 먹기로 했다. 그냥 그거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택시를 잡았다. 기사 아저씨는 '산책하실 거면 더 이른 시간에 움직이셨으면 좋았을 뻔했어요, 이른 아침이 더 예쁜데, ' 하고 나 대신 아쉬워해 주셨다. '사실 머물 시간이 많지 않아서요.' 대답하지 못하는 입이 썼다.


경포부터 안목까지 걷는 건, 사실상 무리였고 나는 모래사장을 걸으며 배고픈 사람처럼 셔터를 눌렀다. 파도가 들어왔다 나가는 장면, 파라솔, 멀리 있어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사람들. 그리고 누군가 찍어줄 일 없는 내 사진을 정성스레 찍었다. 유월의 나를 남겨두고 싶었다. 바람이 불었다. 머리가 마구 흩날리는데 하필 나플나플한 원피스를 입고 가 그냥 흔들려가며 열심히 걸었다. 그날 오후 두 시간 동안 내가 한 것은 걷고, 나를 찍고 누군가를 찍고 바다를 찍은 것뿐이었다. 배터리가 간당해질 때쯤, 800미터 정도 떨어진 이전에 가 본 적이 있었던 단골집을 찾았다. 장사를 쉬는 날인지 고양이만 문 앞에서 애 옹 거리고 있었다. 나는 어제 샀던 츄르를 그 고양이에게 건넸다. 대신 들어간 옆 집 순두부는 아무 맛도 안 났다. 그냥 그대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결제를 하고 나오면서 기다려서 순두부 젤라토 한 컵을 사서 나오는 길. 나는 천천히 먹고 싶은데, 아이스크림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말캉말캉하게 반 정도 남은 아이스크림. 다시 현실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마지막 장면이 너무 슬픈 엔딩이네 싶어서 피식 웃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혼자서 찍어낸 사진들을 보았다. 그냥 너무 좋다, 너무 좋다. 이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저 공간에 나는 어떤 마음을 두고 돌아올 수 있었나, 걸은 바다에서 정성스레 찍은 셀카는 뒷모습까지 현실이 지긋지긋해 잠시 도망 나온 사람의 그것이었다. 여행에는 목적을 달지 않았다 늘. 그런데 이번 여행은 일탈도 아니고 여행도 아니고 그냥,

도망을 온 것이었구나. 잠시.

일상이 아니고,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있던 곳에서 멀리 떨어질 때에 느껴지는 안정감. 나는 그것을 휴식이라고 부르는데, 짧은 도망이었다. 종종 생각이 나면 사진을 들여다본다. 이때를 담을 때의 내 마음과 나. 그리고, 그 시간 속에 어딘가 스민 무언가를 붙잡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바다를 산책하던, 그날 오후의 나는. 어디엔가 흔적도 없이 살아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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