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두에서 만난 노자와 두보
러산에서 버스를 타고 두 시간, 고속도로처럼 잘 닦인 길을 달려 청두에 도착했다. 티베트 고원의 황량한 바람과는 다른, 눅눅하고 푸근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아직 라싸까지는 갈 길이 멀었지만, 여정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신남문 버스터미널 근처의 교통반점 4인실에 여장을 풀었다. 배낭여행자들의 오래된 아지트. 방 안에는 긴 머리의 일본 청년 둘이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빈둥거리고 있었다. 그들 역시 티베트로 들어가기 위해 청두에 와 있다고 했다.
“육로로 들어갈 수 있나요?”
내가 묻자, 일본 청년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직 막혀 있어요. 우린 비행기로 갈 생각이에요.”
데스크에 내려가 다시 확인해 봤지만 대답은 같았다. 육로는 여전히 봉쇄, 여행허가서를 받아 비행기로 들어가는 길뿐이라고 했다. ‘패키지’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라사에 도착하면 각자 흩어지는, 이름뿐인 단체여행. 국경보다 더 높은 장벽은 언제나 제도와 허가서라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이태원감리교회 강현숙 목사님이 소개해 준 청두의 기 목사님께 전화를 걸었다. 혹시 모를 ‘다른 길’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그분의 대답도 같았다.
“육로는 어렵습니다. 대신 라사에 있는 선교사 두 분을 소개해 드릴게요. 도착하시면 꼭 한번 찾아가 보세요.”
중국과 티베트까지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한국인 선교사들. 어쩌면 무모하다 할 만큼 위험한 선택이지만, 동시에 목숨까지 걸고 서쪽을 향하는 또 다른 순례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비행기가 아닌, 칭하이성 거얼무를 거쳐 라사로 들어가는 길을 택하기로. 청두에서 거얼무까지 기차로 41시간. 이틀에 걸친 흔들림의 시간이다. 직행 대신, 중간에 구채구를 들렀다가 간쑤성을 지나 거얼무로 가는 육로를 선택했다.
구채구행 버스표를 끊고서야, 비로소 청두의 거리를 천천히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도시 한가운데서, 나는 오래도록 마음속에 품었던 두 스승—노자와 두보를 만나게 되었다.
청두는 ‘천부지국(天府之國)’.
하늘이 내린 땅이라는 그 이름 그대로, 도시 전체가 거대한 그릇처럼 평온하게 놓여 있었다.
일환루, 이환루, 삼화루로 도시를 둥글게 감싸는 순환도로들, 그 중심을 관통하는 런민로. 중심가에는 양식당과 커피숍, 술집과 간판이 화려하게 얽혀 있었다. 그 속에는 심지어 ‘삼성전자’의 간판까지 번쩍였다.
그러나 내 마음이 향한 곳은 번쩍이는 상점이 아니라, 오래된 도교의 성지 청양궁(靑羊宮)이었다. 사마천은 이렇게 기록했다.
노자는 주나라의 쇠망을 보고 푸른 소를 타고 함곡관을 넘어 진나라로 들어갔다. 그때 관문지기 윤희가 노자에게 간청했다.
“부디 책 한 권을 남겨 주십시오.”
노자는 그 자리에서 도와 덕을 논한 5,000자의 글을 남겼다. 그것이 바로 <도덕경>이다. 그는 윤희에게 책을 강의해 준 뒤, 떠나기 전 이렇게 말하고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천일 동안 도를 행한 뒤, 성도 청양사에서 나를 찾으라.”
천일 후 윤희가 청양사에 이르렀을 때, 두 마리 양을 거느린 한 아이가 나타났다. 윤희는 한눈에 그 아이가 노자의 화신임을 깨닫고 그곳에 머물며 도를 닦았다. 이 전설을 기념하기 위해 당대에 청양궁이 세워졌고, 이곳은 도가 수행의 큰 도량이 되었다.
청양궁의 중심 건물은 태극과 팔괘를 형상화한 팔괘정(八卦亭)이다. 정자의 기단은 아래는 네모, 중간은 팔각, 위는 원형으로 쌓아 올렸다. 하늘과 땅과 인간이 서로를 포개 안은 듯한 모양새였다. 팔괘정 안에는 여덟 신선 가운데 한 사람인 여동빈의 신상이 모셔져 있다.
그러나 우리를 가장 오래 붙잡아둔 것은 전설 속 노자의 양이었다. 온갖 병을 치료한다는 그 양의 조각상은 수많은 손길에 닳고 닳아 몸 전체가 매끈하게 윤이 났다.
“여보, 이 양을 만지면 온갖 병이 다 낫는다네요.”
“정말… 그렇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루푸스로, 수술로, 수많은 밤을 견뎌온 아내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양의 뿔과 옆구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노자가 “부디 오래 함께 걸어라” 하고, 묵묵히 축복을 내려주는 것만 같았다.
이 양은 쥐의 귀, 소의 코, 호랑이의 발, 토끼의 입, 용의 뿔, 뱀의 꼬리, 말의 얼굴, 양의 수염, 원숭이의 목, 닭의 눈, 개의 배, 돼지의 엉덩이를 한 몸에 지닌 모습이었다. 열두 지지를 한 몸에 안은, 이 세상의 온갖 생명을 자기 살로 품어 안은 형상이었다.
인간이 아픈 곳과 닮은 부위를 쓰다듬으면 질병이 사라진다고 믿어, 양의 온몸은 사람들의 기도가 묻은 손길로 매끈매끈해져 있었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도(道는) 보이지 않지만, 이렇게 손에 닿는 형상을 빌려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이 아닐까. 나라가 둘로 갈라져 싸우고, 무분별한 개발로 강이 뒤집혀 흐르고, ‘간섭’이라는 이름으로 삶이 점점 더 답답해지는 시대. 노자의 도는 무위(無爲), 억지로 하지 않음, 본성대로 흐르게 내버려 두는 길이라 했다.
만약 통치자가 욕망과 두려움 대신 이 ‘도(道’)의 단순한 원리를 붙들고 나라를 다스린다면, 얼마나 많은 전쟁이, 얼마나 많은 분열이, 애초에 피할 수 있었을까. 청양궁의 마당을 나서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오래된 한 구절을 되뇌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가장 좋은 선은 물과 같다고
억지로 흐르지 않는 물처럼,
지금 나의 여행도,
라싸로 향하는 발걸음도,
도리어 한 걸음 비켜서서 흘러가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자와 작별을 고하고, 우리는 시인의 집을 찾아 나섰다. 35번 버스는ㄱ 우리를 곧장 두보초당(杜甫草堂) 앞으로 내려주었다. 5월의 신록이 우거진 초당은 대나무 숲이 출렁이는 초록의 파도였다. 바람이 지나가면 대숲은 낮게 웅웅 거리는 시(詩)의 울림을 들려주었다.
이태백과 더불어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 불리는 두보. 전쟁과 기근, 권력의 부패 속에서 백성의 고통을 끝없이 노래했던 시인. 안사의 난. 당나라의 운명을 뒤흔든 그 반란은 8년간 이어졌고, 수천만 명이 죽었으며, 집들은 3분의 1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나라의 몸이 산산이 찢어지던 그때, 두보는 이렇게 노래했다.
國破山河在(국파산하재) 조정은 무너졌어도 산하만은 그대로요
城春草木深(성춘초목심) 성 안에는 봄이 와 풀과 나무가 무성하네
전쟁은 인간의 삶을 박살 냈지만, 꽃은 피고, 풀은 자라고, 새는 날아오른다. 그 무심한 자연의 질서 속에서 두보는, 인간의 전쟁이 얼마나 덧없는지,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끝없이 응시했다.
두보는 전란을 피해 청두로 내려와, 완화계(浣花溪)라 부르는 개울가 초막에 터를 잡았다. 도토리와 풀뿌리로 연명하며 살던 그 초당에서, 그는 무려 240편의 시를 남겼다.
지금 두보초당은 20만㎡에 달하는 넓은 정원으로 변해 있다. 송·원·명·청을 거치며 성역화된 이곳에는 두보의 위패와 초상이 모셔진 공부사, 청나라 건륭제의 편액, 마오쩌둥의 ‘草堂’ 두 글자까지, 수많은 권력자들의 흔적이 겹겹이 얹혀 있다.
나는 그 앞에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전쟁과 권력을 비판했던 시인의 초당에, 역사 속 권력자들의 글씨가 걸려 있는 풍경. 겉으로는 시를 사랑하는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해 왔을지도 모를 사람들.
초당 출입구 벤치에는 노부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마치 그림 속 인물처럼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세상사의 근심이 모두 씻겨 내려간 듯한 얼굴.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사라질 얼굴, 가장 먼저 찢겨나갈 미소가 저런 것이 아닐까.
시인은 떠났지만, 시인의 시는 여전히 살아남아 우리 가슴을 두드린다. 전쟁은 인간이 반복하고, 시는 그때마다 다시 태어난다.
노자와 두보의 자취를 쫓아 하루 종일 걸었더니, 어느새 청두의 밤이 도시 위로 내려앉았다. 버스를 타고 춘희로로 돌아오니, 거리는 이미 휘황한 불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식당마다 저녁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여보, 청두까지 왔는데… 훠궈 한 번 먹어봐야죠?”
우리는 사천요리의 본고장, 훠궈집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테이블 위에는 각종 재료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야채, 버섯, 두부, 고기, 이름 모를 것들까지… 마음껏 골라 끓여 먹는 훠궈 뷔페였다.
화덕 위, 태극 문양처럼 나뉜 냄비 속에서 하얀 백탕과 붉은 홍탕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첫 젓가락을 입에 넣는 순간—
“으악, 매워요!”
“속이 다 뻥 뚫리는 것 같네!”
맵다는 표현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혀끝은 얼얼하고, 입천장은 데인 것처럼 화끈거렸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등이 축축해질 만큼 땀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몸 어딘가에 쌓여 있던 어두운 응어리들이 매운 국물 속으로 조금씩 녹아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사천 사람들은 이 매운 훠궈에 독한 술까지 더해 마신다. 왁자지껄한 웃음, 엉뚱한 농담들, 뜨겁게 끓어오르는 국물과 술기운 속에서 그들의 삶의 고단함이 잠시 증발하는 듯했다.
누군가 그랬다.
“우울하면 훠궈를 먹어라. 속이 훤히 뚫릴 만큼 매운 걸로.”
실제로 그 말은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이마와 등에 땀이 줄줄 흐를 때쯤, 라싸로 들어가는 길에 대한 걱정도, 아내의 병세에 대한 불안도, 잠시나마 사천의 화끈한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졌다.
2인분 36위안.
이만한 값에 이만한 ‘매운 위로’를 받는다면,
청두의 밤은 충분히 축복받은 밤이었다.
훠궈의 매운 냄새가 옷깃에 배어 있었지만, 이제 다시 서쪽을 향해 나아가야 했다. 구채구, 쑹판, 간쑤성, 거얼무… 그리고 언젠가 도달하게 될 라싸.
청두에서 만난 노자와 두보는, 우리의 여정 위에 두 개의 등불을 켜주었다. 노자는 말없이 길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고, 두보는 전쟁의 시대에도 시를 놓지 않았다.
그날밤 나는 두 스승의 숨결을 가슴에 품고, 깊은 사유에 빠졌다.
노자의 흐름과 비움,
두보의 슬픔과 자비,
그 모든 사유가 내 안에서 길게 울려
마침내 깊은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라싸로 가는 길은 여전히 멀었지만,
나는 이미 마음속에서
먼 길의 절반을 걸어온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