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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 Mar 12. 2020

할 말은 하고 살기로 한 츤데레

츤데레의 항변



츤데레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상대에게 겉으론 툴툴거리지만 뒤에선 다 챙겨주는 은밀한 사랑의 방식.
프랑스인인 남편이 '츤데레'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지만, 가끔 그가 묘사하는 나는 츤데레 그 자체다. 오죽하면 그는 가끔 내게 '뒤에서 열 번, 스무 번 챙겨주느니 그냥 앞에서 한 번이라도 다정할 순 없냐고 부탁하기도 했다.

거칠고 터프해 보이는 츤데레의 사랑은 사실 날것의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외면하는 겁쟁이들의 표현 방식에 가깝다.

나는 아주 뻔하게도 뜨듯 미지근한 가정에서 자랐다. 예능에서 연예인 부부들에게 서로 애정 표현은 자주 하냐는 질문에 깔깔 웃으며 "가족끼리는 그러는 거 아냐"할 때의, 그런 가족이다. 우린 사랑의, 서운함의, 미안함의, 그리움의 감정 위에 계속 덧칠을 하고, 마침내 그 감정이 본연의 모양을 잃고 나서야 드러냈다.
본격적으로 감정을 표현해야 할 것 같은 순간-이별이나 화해 등-에 늘 "에이, 가족끼리 무슨."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가족끼리 무슨'은 미안함도, 고마움도, 서운함도 사랑도 모두 뭉뚱그려 표현해주는, 화장품으로 치자면 올인원 같은 존재랄까.

나는 자연스레 감정표현에 지독하게 서툰 어른으로 성장했다. 미안하다고 말 못 하고 잠수 타버리거나, 억울함을 조목조목 설명하지 못하고 소리만 지르는, 화를 참다가 샤워 중 울어버리는, 사랑한단 말 대신 먼산만 바라보는 어른이 되었다.

한편 나는 '적나라하게 표현하기'를 꺼리지 않는 가족들을 목격했다. 그들은 뽀뽀를 하며 사진을 찍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했고, 비밀이 없는 다정한 모녀임을 과시하거나 오붓한 여행길에 올랐다. 그들은 싸울 때 마저 거침이 없었다. 구김살 없는 모습이 낯설고도 부러웠지만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으로 치부했다. 사람마다, 가족마다 고유의 결이 있으니 내가 그걸 거스를 수 없다고 단념했다.

물론 꽤 자주 후회와 아쉬움을 느꼈다. 그때 소중한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줄걸, 그때 그 친구에게 좀 낯간지럽더라도 위로를 해줄걸, 그때 엄마를 안아줄걸.
어떤 사건들은 일정한 역치를 동반했고, 덕분에 딱 한두 번 정도의 대담한 행동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한두 번 정도 과감히 표현해본 적이 있는 츤데레일 뿐.


감당할 수 없는 양의 절망이 나를 덮쳐온 밤, 무너진 나를 안고 남편은 울었다. 그를 알아온 9년 간 그가 운건 정말 손에 꼽을 지경이니, 그의 눈물의 농도는 농밀하다. 내 눈물이 그냥 커피라면 그의 눈물은 t.o.p정도랄까. 그는 눈물을 담뿍 품은 눈으로 나를 똑바로 보며, 우린 이걸 함께 이겨낼 거야, 내가 널 도와줄 거야, 너한테 무슨 일이 닥치든 널 사랑할 거야, 하고 말했다.
시의적절한 그의 울음과 감정 표현은 겁먹고 움츠린 못난 내 마음을 쓰다듬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위로란 걸 제대로 받은 기분이었다. 그가 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그의 진심이 담겨 있음을, 우리는 같이 이 존재적 위기를 꼭꼭 씹어 삼킬 것이란 걸 믿을 수 있었다. 적절한 감정 표현은 이렇게나 사람을 치유해준다.

나도 그런 용기를 갖출 날이 올까.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고, 안아주고, 같이 우는 용기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걸까. 아니다. 나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practice makes perfect. 이건 비단 기술에만 국한된 표현이 아니다. 아니, 감정 표현 또한 일종의 기술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겠다.
나는 불편함과 어색함뿐일지라도 계속해서 감정을 드러내는 연습을 해보고자 한다. 어느 날 사랑하는 이가 무너져 내릴 때 진짜 위로를 건네기 위해서 말이다. 나의 귀한 이들에게 늦기 전에 진심을 전해 보기 위해서 말이다.
미안한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미운 사람에게 불편하다고, 고마운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연습을 해본다. 그것이 설령 아직은 덧칠이 다 벗겨지지 않은 감정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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