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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 Apr 04. 2020

침묵의 시간

코로나와 사람들


코로나로 인한 강제 자가격리 2주째, 같이 사는 남자의 존재감이 자꾸 커지는 것은 작은 집 탓일까, 한시도 고요를 못 견디는 그의 습관 탓일까. 물론 그가 늘 요란스럽다는 뜻은 아니다. 아침잠이 없는 그는 늘 먼저 일어난다. 아주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가 거실에서 아주 조용히 시간을 보낸다. 한 사람이 자는 동안 최대한 조용히 할 것,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우리는 동거 초반에 이걸로 여러 번 다퉜다. 그는 내가 먼저 일어나는 날에 아직 자고 있는 그를 배려하지 않는다며 불평했다. 침실 문을 소리 내서 닫는다고, 발을 질질 끈다고, 거실에서 유튜브를 크게 틀어놓고 본다고. 나는 그의 불평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지나고 보니 나는 한국의 여느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이었다. 달콤한 아침잠에 허우적거리다가도 엄마가 도마에 애호박 써는 소리, 압력 밥솥에서 치이익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 거실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혹은 '아침마당'의 음악 소리, 노크 없이 문이 벌컥 열리고 '일어나야지'라며 나를 깨우는 침범들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그런 종류의 침범에 대해 관대했다. 때론 그 침범들을 사랑했다. 그래서 그가 외쳐대는 '배려와 매너'가 그저 호들갑스럽게 느껴졌다. 물론 첫 싸움 후, 그의 말을 존중하고 싶어 조심조심 일어나 살금살금 나갔다. 아뿔싸, 문고리를 돌린 채 문을 닫아야 소리가 나지 않을 거란 걸 미리 생각하지 못한 탓에 방문이 찰칵 소리를 내며 닫혔고 그는 곧바로 끄으응 거리며 불만을 나타냈다. 야생동물도 이거보단 덜 예민하지 싶었다. 그게 벌써 8년 전이다.
그와 나는 둘 다 잠껍질이 얇다. 요즘 그는 먼저 일어나 미션 임파서블의 톰 크루즈처럼 침대를 살금살금 빠져나간다. 나는 이 고요한 몸부림에도 이미 잠에서 깨지만 불평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밤 중에도 두세 차례는 깨기 때문에 더 이상 잠 깨는 것이 불쾌하거나 짜증스럽지 않다. 그는 거실로 나가 헤드폰을 끼고 조용히 게임을 한다. 나는 그가 나감과 동시에 깨었지만, 오랫동안 깬 티를 내지 않는다. 내가 침묵의 시간을 버는 방법이다. 나는 침대에서 휴대폰으로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인스타그램을 뒤적인다.
한두 시간 버티다 배가 너무 고파지면 별 수 없이 거실로 나간다. 내가 깬 이상 침묵의 시간은 저물어버린다. 동거인은 내가 어기적어기적 나오면, 헤드폰을 내려두고 스피커로 소리를 틀어 게임을 하고 동시에 유튜브도 튼다. 그가 주로 보는 유투버들은 내가 농담 삼아 미친 사람들이라고 부르는데, 너무 방정맞기 때문이다. 인사를 저렇게 난리법석 떨며 해야 하는지, 말소리는 저렇게 크고 빨리 해야 하는지 듣다 보면 얼이 빠지고 기가 빨린다.
집이라도 좀 넓으면 그 소음들로부터 피신할 수 있을 텐데, 우리 집은 거실과 침실 그리고 테라스가 전부다. 나는 그를 멍하게 보며, 일 안 나가니까 좋아? 묻는다. 그는 아주 해맑게, 응!!!이라고 대답한다. 그의 머리 위에 느낌표들이 뾰로롱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가 집에 머문 지 2주째, 서로 24 시간 붙어 지낸 지 2주째 우린 아주 슬기롭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이 시간을 즐거이 받아들이고 있다. 좀 더 적나라하게 고백하자면, 나의 기존의 생활리듬은 와장창 깨졌고 나는 글을 쓰지 않고 거의 매일 맥주를 마시고 너무 오래 뒹굴거리느라 허리가 아프다. 젊고, 건강하고, 책임질 존재가 없고, 작지만 집이라 부르는 거처가 있기에 이 패턴이 가능하다. 이 혼돈과 혼란의 시기를 다들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나의 나른하고 지루한 일상은 누군가에게는 사치다. 24 시간 아이 둘을 놀아주고 먹이고 씻기느라 퀭해졌다는 젊은 여자들, 거동이 불편해 장을 보러 가기는커녕 식사조차 거른다는 독거어르신들, 어쩔 수 없이 공용 부엌과 공용 화장실을 써야 하는 고시텔 사람들, 일을 쉬면 당장에 생계가 막막해지는 사람들, 집이 없으니 당연지사 위생에 취약해지는 노숙자들. 이런 위기 속에 사회의 응지는 더 어둡고 춥다. 며칠 전 할리우드의 유명 가수가 최고급 리조트의 아름다운 욕조에 꽃잎과 거품을 둥실둥실
띄운 사진을 올렸다, '코로나가 우리 모두를 평등하게 만들었다'라는 글과 함께. 평등의 기준을 얼마나 넓게 잡아야만 최고급 호텔에서의 배쓰 타임과 비누조차 구할 수 없는 삶이 평등하게 보이는 걸까.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읽고 있다. 1947년에 쓰인 게 맞나, 예언서인가, 정말 역사는 반복되나 싶을 정도로 현 시국과 너무 닮았다. 책 속에도 혼란스러운 시국을 이용해 득을 보려는 자, 제한된 삶에 예민해져 서로 잡아먹을 듯 싸우는 자, 자신의 안위보다 타인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자가 있다. 어려울 때일수록 인간성은 시험받고, 인정은 귀해진다.
내 곁에 하루 종일 붙어 있는 동거인에게 진물이 나고 짜증이 솟다가도, 이럴 때일수록 사랑하자고 다짐하는 이유다. 그를 사랑하고 싶고,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느라 지친 엄마들을 사랑하고 싶고, 다정한 봄바람이 무색하게 홀로 있는 노인들을 사랑하고 싶고, 그 노인들에게 마스크와 반찬을 가져다주는 자원 봉사자들을 사랑하고 싶다. 침묵의 시간 동안 그들은 생각하고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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