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면에 나선 펠레, 그리고 세나의 죽음
지난 1969년에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통산 1,000번째 골을 넣었던 펠레는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수많은 아이들을 생각하라. 브라질의 가난한 아이들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고 호소했다. 펠레의 소감은 단순한 호소가 아니었다. 브라질 축구의 검은 손 카르톨라스 (Cartolas) 클럽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던 브라질 축구계, 나아가 브라질의 모든 부패를 향한 정면 승부였다.
국내에서 펠레의 은퇴 후 행보는 그저 '펠레의 저주'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데, 당연히 잘못된 현상이다. 선수 시절 펠레보다 은퇴 이후 펠레의 행보가 사회적으로 더 큰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펠레 정도의 위신을 지닌 축구 선수가 브라질 축구계의 비선실세였던 카르톨라스 클럽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브라질 사회에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카르돌라스 클럽 멤버 중에는 브라질축구협회 (CBF) 조직을 제멋대로 움켜쥐고 흔들었던 히카르두 테셰이라도 있었으며, 이는 펠레가 브라질축구협회와 싸운다는 의미였다.
브라질은 지금도 부패와 지독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나라다. 국영 석유 기업 페트로브라스, 브라질 최대의 건설 기업 오데브레시가 연루된 부패 스캔들 규모만으로도 브라질 GDP의 상당 부분을 좀먹고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로 방영되었던 <부패의 메커니즘 (2018)>만 보더라도 뇌물 수수를 포함한 정부 기관의 부패 행위 및 부당 거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국민의 안전과 복지를 지켜야 하는 정부가 도덕적 해이에 빠졌으니, 부패에 의한 고통은 자연히 빈민들과 아이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축구계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장기 집권 체제에서 브라질축구협회를 제멋대로 주무른 협회장 히카루두 테세이라가 있었고, 브라질축구협회는 물론 FIFA에도 광범위한 뇌물 공세를 펼쳤던 주앙 아벨랑제가 있었다. 아벨랑제는 테세이라의 장인 어른이었으니, 카르톨라스 조직의 1인자 아벨랑제와 2인자가 테세이라가 브라질 축구계를 검은 돈으로 물들이고 있었다고 보면 되겠다. 브라질의 축구 클럽들이 예전부터 지금까지 재정난에 허덕이는 것도, 이러한 부패의 후유증 때문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부패에 찌든 현실을 보았던 펠레는 카르돌라스 가입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당연히 카르돌라스 측은 펠레에게 보복을 가했는데, 실제로 펠레는 아벨랑제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1994년 미국 월드컵 조 추첨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게다가 펠레가 당시에 설립한 방송사에서 월드컵 중계를 하지 못하도록 로비를 펼치기도 했다. 이러한 펠레의 투쟁이 축구계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펠레는 1992년에 UN 환경 대사로 임명되며 본격적으로 국제적 행보를 펼쳤다.
펠레는 한발 더 나아가 1994년에 UN 굿윌 엠배서더로 임명되며 본인의 활동 폭을 넓혔다. 펠레와 브라질축구협회 간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본격적으로 전세계의 수많은 축구 선수의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해 힘쓰기로 결정한 것이다. 게다가 마침 1994년 4월에 브라질의 재무 장관이었던 페르난두 카르도수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했는데, 브라질의 민주화 및 반부패 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카르도수가 펠레에게 손을 내밀었다. 축구계의 부패 해결, 선수들의 생계 보호 등에 대해 카르도수 역시 동감했기 때문이다. 1994년 봄은 축구 영웅 펠레가 외로운 투쟁을 넘어서, 공권력의 힘을 얻게 되는 기회가 된다.
그렇게 브라질 체육계에 한 줄기 희망이 비칠 것 같았던 1994년이었지만, 기쁨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94년 5월 1일, 또 한 명의 영웅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바로 브라질 역사상 최고의 F1 드라이버, 아일톤 세나였다. 산 마리노의 이몰라 서킷에서 펼쳐진 산 마리노 GP에서 세나는 코너링 도중에 방호벽과 부딪힌 후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세나의 죽음이 알려지자, 브라질 전체가 충격에 빠졌다.
세나는 지금도 브라질에서 펠레 이상의 인기를 누리는 스포츠 영웅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나 또한 브라질에 만연한 부패로 인해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해 누구보다 힘썼던 사람이었다. 일찍이 그는 본인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설립하여 빈민층 아이들에게 생계 및 교육 지원을 제공하였고, 아이들의 사회 진출을 돕는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게다가 본인의 요트에 가득 먹을 것과 생필품을 실어서 시골의 아이들을 찾았고, 자선 기금 마련을 위해 F1 드라이버들을 초청하여 팬들 앞에서 실내 친선 카팅 경기를 열기도 했다.
세나의 행보는 펠레와 유사점이 많다. 위에서 언급했던 브라질의 답없는 상황 속에서도 세나는 브라질에 희망이 있다는 점을 알리려 했고, 자신의 행동을 통해 변화의 바람을 일으켜 왔다. 펠레가 브라질축구협회와 맞서 싸웠듯, 세나는 FIFA 못지않게 정치적 행보를 보이는 FIA와 정면으로 맞서왔다. 게다가 레이싱 도중에 사고를 당한 드라이버들을 직접 본인의 힘으로 도와준 사례도 있을 정도로, 동업자들을 위한 행동에 앞장서왔다. 세나가 지금까지도 영웅으로 우대받는 까닭이다.
그런 사람이었으니, 죽음이 더 크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세나의 장례식은 TV로 생중계되었고, 무려 300만명의 시민들이 상파울루 거리로 나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살아 있었다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고, 펠레 혼자서 하던 일을 둘이서 할 수도 있었다. 1994년 봄이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계절이 아닌, 희망의 역사을 품었던 계절이 될 수도 있었으니.
세나가 남긴 유산은 의미가 크다. 여전히 그의 재단은 브라질의 빈민가를 도와주고 있으며, 세나의 죽음 이후 F1 머신의 안전 기준이 대폭 상향되어 300톤이 넘는 충격에도 드라이버를 절대적으로 보호하는 서바이벌 쉘, 목 골절을 방지하기 위한 헤드레스트 및 HANS가 도입됐다. 엄청난 속도 속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드라이버들을 위한 보호벽이 생긴 것이다. 펠레 덕에 브라질 축구 선수들은 금전의 보호벽을 얻었고, 세나 덕에 브라질 드라이버들은 안전 보호벽을 얻었다.
1994년 봄에 두 명의 영웅 중 한 명은 떠났고, 한 명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 젖혔다. 1994년에 카르도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후, 이듬해 1995년에 체육부 장관이 된 펠레는 선수들이 부상으로 은퇴할 시 퇴직수당을 받고 법적으로 생계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법안, 일명 '펠레 법'을 정식으로 상정했다. 결국 1998년부터 펠레 법이 적용되어 브라질의 축구 선수들도 노동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물론, 브라질 축구 클럽들의 회계 장부 공개가 의무화됐다. 두 사람의 운명이 엇갈렸다는 점이 영원한 비극이 되었지만, 세나가 지금도 흐뭇하게 지켜볼 지도 모르겠다.
1994년 봄, 브라질은 그렇게 변화의 폭풍이 지나갔던 계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