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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에 갇히면 비극이다

갇히면, 운명의 수레바퀴 밑에 깔리니까

고등학생 시절, 어떤 영어 강사가 Tragic이라는 영단어를 외우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트래직'이라는 발음을 살려서, 쥐가 틀에 갇혀서 '찍!' 소리를 내니까 비극적이라는 식의 연상법 형태로 가르쳤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에는 발음과 단어 뜻 연상의 연관성에만 집중했는데, 이 단어를 요즘에 다시 보니까 이 설명이 다른 의미로 와닿는다. 사람이 실제로 틀에 갇히면 비극인 것 같다. 물리적, 정신적인 틀에 갇힌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를 보면, 사람은 운명의 수레바퀴 밑에 깔리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쳐야 한다고도 한다. 그것은 우리가 틀에 갇혀 멈추는 순간, 가혹한 운명을 맞이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본능적으로, 혹은 계산적으로 틀을 깨려는 행동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해주는 시그널 아닐 지.


마크 로스코의 무제가 낳은 슬럼프


언젠가 마크 로스코에 대한 글을 쓰면서 로스코가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었던 1961년 이후로 예술적 슬럼프에 빠졌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로스코는 자신이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거론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세간의 평에도 민감했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일일이 가이드를 줬고, 본인만의 심사를 통과한 이에게만 그림을 팔았다


게다가 자신이 언제 예술적 한계에 부딪힐까 불안해 했고, 자본에게 지배당한 듯한 느낌의 팝 아트까지 성행하면서 세상에 대한 증오도 커졌다. 그런 와중에 대동맥류로 건강이 악화됐고, 자기 키보다 큰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면 안 된다는 의사의 충고 때문에 작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려야 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무대의 크기마저 작아진 데다가 아내와도 이혼하면서, 로스코의 정신적 건강은 완전히 무너졌다.  


무엇이 로스코를 수렁으로 빠뜨렸을까. 어떤 고뇌 때문에 슬럼프가 그토록 길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의 대표적인 그림 스타일이 발목을 잡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커다란 캔버스 위에 사각의 틀을 잡고, 그 안에 강렬한 색의 물감을 채워넣는 그의 그림이 족쇄는 아니었을까. 큰 사각형 안에 자신의 감정을 집어 넣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가졌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초현실주의와 사실주의 등의 화풍을 두루 거쳐오면서 정립된 로스코의 표현 방식이 갑자기 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각형과 색은 그가 선택한 최선의 작품 설계였을 테니까. 하지만 본인에게 성공과 명성을 가져다 준 화풍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기에, 이제는 성공의 열쇠가 아닌 독이 되지 않았을까. 예술적 영감이 늘상 떠오르는 것도 아니니, 앞으로 무슨 그림을 그려야 할 지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제목에 얽메이지 않고 내 앞의 사람을 생각하게 만드는 그림을 추구했던 로스코에게, 쉽게 그리는 그림은 없었다. 관람자를 강렬한 감정선에 빠뜨리고, 생각의 나선형 위에서 걷게 하는 작품이 아니면 모두 쓰레기라고 간주했다. 그런 화가에게 자신의 틀에 갇혀 헤메는 순간은 그 누구보다 괴롭다. 로스코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도, 틀에서 나오기 위한 몸부림을 칠 힘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일 터. 어쩌면 슬럼프로 인한 고통은 로스코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을 것이다.


생각의 여지를 주기 위해 로스코의 작품의 이름도 매번 <무제>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무제>이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생각과 예술의 자유를 주기 위한 장치가 역설적으로 예술적 영감의 자유를 제한한 것은 아니었을까. 본인이 예술가로서 추구했던 감정의 충실한 표현을 위해서,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린킨 파크의 Hybrid Theory


근 30년 동안 수많은 락 밴드 중에서 린킨 파크처럼 끊임없이 실험을 추구했던 밴드는 없었다. 기존의 메탈 밴드 팬들에게도 욕 먹고, 심지어 린킨 파크의 팬들 사이에서도 음악 색깔이 마음에 안 든다고 비난을 받았지만, 그 와중에도 린킨 파크는 끊임없이 음악적 변화를 시도했다. 린킨 파크의 1집 앨범 이름이 Hybrid Theory, 즉 혼합된 이론인데, 린킨 파크의 음악 장르를 대변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던 1집과 2집에 수록된 하드코어 곡들의 영향으로 인해 뉴 메탈 밴드라고 부르는 것이 기본적이다. 하지만 그 밖에도 얼터너티브, 프로그레시브 락 등의 다양한 장르가 혼합된 음악을 선보여 왔다. 아직도 일반인들은 린킨 파크를 메탈 밴드라고 인지하는데, 이는 오해에 가깝다.

 


3집이나 4집 앨범에서는 락 밴드가 맞나 싶을 정도의 실험적인 음악들을 다수 선보였다. 3집에서는 기존에 선보였던 뉴 메탈 사운드를 최소화시키고, 대신에 신즈 사운드나 부드러운 멜로디로 채워넣는 실험을 밀어붙였다. 4집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수록곡의 모든 앨범이 연결된 컨셉 앨범이었으며,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더 진하게 가미시켜서 기존의 락 음악 색깔을 아예 배제시키는 느낌까지 줬다. 이후에 발매된 앨범들도 직전 발매 앨범과 매번 차별성을 뒀은데, 직접 들으면 명확한 차이가 느껴질 것이다.


2집 앨범 수록곡 <Somewhere I Belong>


3집 앨범 수록곡 <Shadow of the Day>


4집 앨범 수록곡 <Iridescent>


5집 리믹스 앨범 수록곡 <A Light That Never Comes>


주변을 개의치 않고 밀어붙인 음악적 실험 때문에 평론가 사이에서 혹평을 받을 때도 있었고, 골수 팬들의 반감을 산 적도 있었다. 그러고도 3집은 미국에서만 5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이후에 앨범들도 음악 팬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으며 음악성을 인정받았다. 이는 성공의 맛에 취해서 음악적 틀에 갇히지 않는다는 멤버들의 신념이 만든 결과이기도 하다.


린킨 파크는 그 동안 발매한 앨범 합산 총 1억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였으며, 두 번의 그래미 어워드와 12곡의 빌보드 모던 락 차트 1위 등을 기록하는 등 대중적인 성공 가도를 달려왔다. 이는 대중의 취향을 저격한 결과도 아니고, 자신들의 음악적 틀 안에서 만들어낸 결과도 아니다. 끊임없이 틀을 깨고 나와서 새로운 실험을 위해 부딪히면서 만들어낸 결실이다. 지난 20여년 간 락 음악이 대중들에게 외면되고 사장되는 동안 린킨 파크가 인기를 누렸던 비결은 실험으로 점철된 Hybrid Theory가 아닐까 한다.


알을 깨야, 죽지 않는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도 스스로 반성해 본다. 나 스스로의 틀에 갇혀 있는 건 아닌 지, 글이 나만의 틀 안에 박혀서 진일보의 순간을 놓친 것은 아닌 지. 틀에 박혀서 인상을 주지 못하고 설득력을 잃어버린 글은 죽은 글이나 다름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글이 알을 깨고 나오는 방법이 무엇인 지를 지금도 고민 중이다. 피그말리온처럼 생명력을 불어넣는 방법 말이다.


틀을 박차고 나오는, 알을 깨고 나오는 순간에 인간은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내가 살아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새로운 것을 늘상 탐구하고, 나의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틀을 깨고 나올 수 있는 순간을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 사람이 생명력을 얻는 방법일 테다. 그 순간에 얻는 것은 새로운 사업 아이템일 수도 있고, 지금껏 맛보지 못한 예술적 영감일 수도 있다. 



죽지 않고 살려면, 내가 살아있다는 감각을 지키려면, 우리는 틀 안에서 끊임없이 몸부림쳐야 한다. 나의 정신과 마음을 지키면서 변화의 바람에 휩쓸리지 않는 길이다. 기업인이건, 예술인이건, 아니면 일상을 살아가는 어떤 사람이 건 상관없다. 어떤 매서운 바람에 휩쓸려가거나 수레바퀴 밑에 깔리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도 틀을 깨는 시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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