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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하이퍼 제너럴리스트  

우울함을 빼고 평정심으로 채운다

나처럼 여기저기 관심이 많아서 무엇이든 일단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직장 퇴근 이후가 또다른 일의 시작이다. 운동, 글쓰기, 책읽기, 짧은 외국어 공부로 퇴근 이후를 꽉 채운다. 사람들 만나면서 놀고 집에서 쉬고 싶지 않냐는 질문도 여러 번 받았지만, 이미 그런 부분에서는 해탈한 지 오래다. 일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을 엄격히 분리하는 건 나에게 딱히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프리랜서는 아니지만, 굳이 그런 식의 분리가 필요하지는 않다.


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일하는 시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나만의 전문성 때문이다. 나는 나의 브런치 소개글에 스스로를 하이퍼 제너럴리스트라고 적어놓았다. 그냥 여기저기 관심이 많고 얕은 지식을 쌓는 제너럴리스트를 넘어, 이 세상 모든 분야를 전공 분야로 삼고 싶은 나의 야망 때문이다. 흔한 제너럴리스트와 나 자신을 차별화되려면, 슈퍼 제너럴리스트도 모자라다. 하이퍼 제너럴리스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취미조차도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직장에서 일할 때보다 더 진지하게, 대학 전공보다 더 치열하게 공부한 적도 있다. 10년 만에 다시 배우는 검도, 주기적으로 하는 농구나 수영 등의 운동도 마찬가지다. 즐거움보다는 나 자신과의 승부가 우선이라, 운동 중에 생기는 통증도 모를 때가 있다. 가벼움을 기피하려는 모습이 조금 무섭다고 들은 적도 있지만, 딱히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고통을 지나가야만,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잘하고 싶다면서 대상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 나는 싫다. 수학을 잘하고 싶다면, 최소한 수학에 파묻혀 사는 시간이 필요하다. 미적분 공식이나 해석학의 논리 때문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거쳐야만, 수학을 잘하는 경지에 발을 디딜 수 있다. 역사를 잘 알고 싶다면, 최소한 역사책의 원문을 찾아서 내 눈으로 직접 읽고 탐구하는 시간을 거쳐야 한다. 달인이 되기 위한 무거운 고통은 필연이다.


결코 소소하게 보낼 수 없는 시간이다. 스트레스가 더 쌓일 수도 있고, 때로는 이거를 왜 하냐 싶은 허탈함도 있다. 글이 매끄럽게 전개되지 않을 때, 농구하다가 드리블 실수가 일어날 때, 나 혼자서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이런 스트레스로 감정에 상처가 나기도 했지만, 어느 새 이런 스트레스에도 무감각해진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스트레스 때문에 평정심이 생기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나에게 벌어졌을까. 포기하면 편하다는 심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과정을 거쳐나가면 잘할 수 있다는 내 머릿 속의 열매 때문에 생긴 것도 아니었다. 성취감의 기쁨, 고통의 스트레스가 계속 오다 보니까 이제는 그것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기쁘더라도 내일 스트레스가 올 테니, 지금 스트레스 받아도 내일을 기쁠테니, 그 과정들을 둔하다 싶을 정도로 자연스레 수용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평정심 속에서 부딪히다 보면 어떤 행복이 찾아온다. 종교인들이 얻는 깨달음의 행복과도 연관이 있을 지 모르겠지만, 치열하게 싸우는 것조차 나의 필연으로 받아들이면서 평안해진다. 어떤 심리 치료 과정을 거친 것도 아닌데, 나만의 싸움이 불편하지 않다. 하이퍼 제너럴리스트를 목표로 두뇌와 몸을 내버려두지 않는 내가 뜻밖에 건진 아이템 같다. 


생각해보면 사람이 결과적으로 추구하는 행복이란 이런 무심결에 찾아오는 게 아닐까. 사실 나는 소확행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의식적으로 찾는 소소한 행복은 결과적으로 일시적 즐거움을 주는 약이다. 약 기운이 마음에서 빠져 나가면, 또다른 즐거움을 찾아나선다. 그렇게 여기저기서 소소한 즐거움을 찾다 보면 스스로 내성이 생겨서, 이제는 어지간한 행복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오히려 갈증이 채워지지 않아 더 우울해질 수도 있다.



우울감의 원인은 여러 가지지만, 성취의 갈증을 해소하지 못해서 생기기도 한다. 사랑을 쟁취하지 못했을 때, 시험에 연이어 떨어졌을 때, 사고 싶은 옷을 사지 못했을 때 생기는 좌절이 쌓이면서 스스로를 우울하게 만든다. 석기 시대 사람들이 수렵의 성공이라는 성취감을 삶의 낙으로 삼았던 것처럼, 인류는 무엇인가를 성취하면서 생기는 감정적 전율을 정신적 자원으로 삼아왔다.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사람의 정신적 자원은 고갈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감정에서 조금은 떨어져서, 어떤 성취를 위한 투쟁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은 어떨까. 끊임없이 공부하고 배우면서 생기는 정신적 마찰이 생기다 보면, 내 안에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그 공간을 평정심으로 채우면, 나를 좀더 명확히 볼 수 있는 것 같다. 뭔가를 잘하기 위한 의도적 스트레스와 긴장 때문에 짜증이 난다 싶다가도,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스스로 감을 잡게 된다. 평정심 속에서 자기 객관화가 생기고, 세상을 바라 보는 균형이 생긴다.


물론 부작용은 있다. 21세기 이후로 연애 감정, 설렘이라는 감정적 자극을 거의 못 느끼고 살았으니까. 사실상 모태 솔로로 살았다고 해도 된다. 균형에 대한 강박 때문에, 어떤 감정적 치우침을 의도적으로 경계해왔다. 하지만 그만큼 남들보다 세상의 이치에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갔다. 남들보다 더 무심하게 살아온 덕에 나만의 위치를 다져 나갈 수 있었다.  


지금도, 앞으로도 목표는 하이퍼 제너럴리스트다. 배워야 할 게 많으니, 앞으로도 뇌와 몸이 쉴 날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고통 속에 찾아오는 무언의 평온함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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