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생기면 가끔 부산에 온다. 난 분명 여기서 태어나 자라고 40이 다 되어 이곳을 떠났는데 요즘은 잘 모르는 곳에 여행 온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서 뭔가 이상하다. 고향이 주는 포근함은 물리적 위치만으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이 있고 무뚝뚝하시지만 아이들이 다 떠난 집을 마을 어귀 느티나무처럼 항상 그 자리에서지키는 아버지도 계셔야 고향이 주는 온전한 푸근함이완성 되는 구나 싶었다. 내가 느낀 이상한 느낌의 실체는 알맹이가 빠져나가버린 빈 고동껍질 같은 것이었나 보다.
오늘 다시 나는 고향에서 여행자가 되어 여행 중이다. 이제 여긴 타향 같은 고향, 그러나 곳곳에 내 눈에만 보이는 추억이 있어 나 혼자 알콩 달콩 거리는 곳이다.
해운대 바닷가
20살이 넘어가고 몇 살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서로 바빴던 여동생과 해운대를 왔었다. 우리는 백사장의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으로 뛰었다. 백사장은 발이 푹푹 빠져 뛰기가 쉽지 않은데 그것이 재미있다고 깔깔거리며 뛰었고 다음 날 다리가 아파서 꼼짝하지 못했던 일이 생각난다. 단발머리 나풀거리면 20대 그녀들은 어느 듯 변해버린 회색의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천천히중년의 길을 걸어가는 중이다.
해운대 송림
1979, 중3, 그해 어떤 이유로 봄소풍이 많이 미루어졌고 5월 초 햇볕이 무척 따가운 날 우린 봄소풍을 해운대로 왔었다. 송림에 자리를 잡았고 6월에 하복을 입는데 그때는 5월이라 동복을 입고 갔었다. 그 당시는공립 중학교 여학생 교복은 상의는 세라복, 하의는 주름치마였다. 나와 몇몇의 친구들은 바닷물에서 발견한 물고기 떼를 미친 듯이 쫓아다니며 교복치마가 다 젖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집에 가자 하고 일어서니 치마에는 하얀 소금물로 해안선이 그려져 있었고 주름이 펴져버린 교복치마는 장작처럼 뻣뻣하기도 했지만 보기에 발레복 치마 같았다. 내 눈에는 소금기 먹은 치마도 이뻤다. 그 상황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치마를 보며 키득거렸다. 집에 와선 결국 오마니에게 혼이 났다 "넌... 애가..." ㅋㅋ.어머니가 이렇게 낳으셨는데 어찌 딸을 그리 구박하시는지요. 아들이면 참 좋겠다는 인상을 자라는 내내 드렸을 것 같다.
해운대 달맞이 고개 커피숍
2001년 서울로 탈출 감행전 달맞이고개를 방문했고 혼자 맛있고 멋있는 커피를 마셨다. 고향을 떠나 온전한 성인으로 거듭날 예정인 나를 축하하는 자리였다. 계산을 하려는데 사장님이 카드기계 안된다고 하시며 다음에 와서 달라고 하셨다. 마음속으로 "어... 어... 사장님 그게.. 언제가 될까요..". 아마 그 커피숍 이름을 처음에는 잘 기억했다가 나중에 어디론가 날려 보냈겠지. 이렇게 해운대 올 때마다 생각이 난다. 20년도 더 지나버린 지금 달맞이 고개는 자본의 힘으로 이전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고 나는 그 언덕 위를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아직 한 번도 생기기 않고 있다.추억은 추억으로.
오늘 쌓은 새로운 추억
해변 열차를 타고 가다가 "다릿돌전망대"에 내리면
다리 아래가 훤히 보이는 아찔아찔한 경험을 선사받을 수 있다. 투명한 바닥을 통해서 바다에 비친 하늘과 즐거워하는 나와 출렁이는 바닷물을 다 볼 수 있다. 미포항과 송정바다 사이를 오가는 해변열차는 4.5km의 거리를 25분 동안 천천히 움직인다. 우연히 가본 미포항에서 횡재한 느낌이었다.
기차로 움직인 4.5km를 다시 걸어서 돌아왔다.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를 하루에 다 할 수 있었다. 나처럼 해변 산책길에 미치는 사람이면 진짜 진짜 강추이다. 중간에 카페에 들러 다리는 쉬어주고 달달함으로 기분은 더 부추겨도 좋다.
아이스크림 시키자 말자 생각났다. 아.... 이건 아포카토각이다. 다시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일만오백 원으로 이 풍경과 아이스림과 커피를 가질 수 있었다. 비싸지 않게 획득한 행복, 그 크기는 가늠이 안될 정도이다.
걷다가 쉬다가 하는 이런 여행 참 좋다. 남아 있는 생의 대부분의 날들이 중간중간 쉼이 충분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