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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BAJUNG May 14. 2018

모얄레 국경을 넘어,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2

 버스는 줄곧 달리며 같은 방식으로 두 번의 검문을 더 받았다. 약 두 시간 거리마다 검문소가 있었고 군인들이 상주하여 같은 검문을 계속해서 해대었다. 세 번째 검문을 마치고 버스는 조금 더 가서 작은 마을에 멈추었다. 그리고 옆에 앉은 친구가 나를 툭툭 치더니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 끝을 가지런히 모아 입에 넣는 시늉을 하며 이곳에서 식사하는 것임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에게 알겠다고 대답하고 잠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정말 이곳을 내려야 하는 것인가, 보나 마나 수많은 집중을 받고 조롱을 당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무언가 먹어두지 않으면 언제 저녁을 먹게 될지 몰랐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버스에서 내렸다. 역시나 내리자마자 마을의 아이들이 주변으로 몰려들어 “차이나, 차이나”하며 성질을 마구 건드렸다. 나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걸어 작은 슈퍼마켓으로 들어갔다. 슈퍼마켓에 먹을만한 것이라고는 과일과 빵이 있었는데, 그 빵이라는 것이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고 간도 되어있지 않은 그냥 정말 ‘빵’이었다. 나는 과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므로 ‘빵’ 몇 조각과 콜라를 하나 샀다. 다행스럽게도 전기는 들어오는지 콜라는 시원했다. 나는 근처에 앉아 빵을 먹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에 와서 이럴 때를 대비하여 가방에 빵에 발라먹는 ‘피넛버터’를 들고 다녔기에, 그저 아무 맛없는 빵만 먹진 않아도 됐다. 나는 가방에서 숟가락을 하나 꺼내어 피넛버터를 퍼서 빵에 발라먹으며 콜라를 마셨다. 동시에 나를 지나는 수많은 눈길과 조롱을 무시하면서 말이다.  


 조촐하지만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앉아 천천히 콜라를 마시며, 문득 이들의 관심에 반응을 보여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소통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콜라를 마저 다 마시고 나서, 아프리카에 오고 사파리 투어를 제외하면 단 한 번도 가방에서 꺼낸 적 없던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그때 사람들의 눈빛이 카메라로 향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오직 카메라에만 내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메라 끈을 오른팔에 세 번 빙빙 둘러 감아 아무도 채갈 수 없게 단단히 고정한 뒤 카메라를 쥐어 잡았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척 동네를 찍어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그저 보이는 대로 아무 사진이나 찍어대었다. 멋진 사진을 건져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이들의 반응을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몇 번을 찍고 훑어보니 어느새 내 주변으로 아이들이 한껏 몰려들어있었다. 아이들의 손에는 커다란 바가지 통이 하나씩 들려있었는데 그 안에는 땅콩이 한가득 들어있었으며, 땅콩은 다시 아이들의 주먹만 한 크기로 몇 개가 포장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내게 또다시 “차이나, 차이나”라고 외쳐댔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아이들에게, 그리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부 들리는 목소리로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 중국사람이 아니라, 한국사람입니다” 그러자 “차이나, 차이나”라고 하던 아이들이 “꼬리아, 꼬리아”라고 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웃기던지, 그렇게 바꿔놓으니 무조건 듣기 싫지는 않았다. 아이들과 대화의 물꼬가 트이자 근처에 있던 청년들이고 어른들이고 여자고 노인이고 전부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어른들이 다가와 내게 “차이나?”라고 물으면 아이들이 대신 “꼬리아”라고 대답해주었다. 아이들은 내가 어딜 가나 우르르 몰려 따라왔다. 그리고는 카메라가 신기했는지 돌아가며 한 명씩 자기를 찍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내가 아이들의 취하는 재미난 포즈를 찍고 나서 사진을 보여주면 왁자지껄 웃으며 떠들고 난리도 아니었다. 몇 아이들은 어른들의 팔을 잡고 데려와 사진을 찍으라고 했는데, 내가 눈빛으로 그래도 되겠는지 물으면 질색했다. 그렇게 나는 이들과 벽을 서서히 허물어갔다. 시간이 지나 내가 다시 버스에 오르자, 내 좌석 창가 주변으로 온 아이들이 다 모여든 듯했고 어른들도 근처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내가 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자 아이들은 다시 “차이나, 차이나”라며 버스를 따라왔다. 못 말리는 아이들이었다. 



 버스는 포장도로를 달리다 어느새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었고 온 몸이 부서질 것 같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힘차게 달렸다. 창 밖은 바퀴가 뿜어내는 황색 모래먼지로 가득했다. 모래먼지가 버스로 들어오자 사람들은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버스는 여전히 모래먼지를 휘날리며 달리는데 네다섯 되는 아이들이 뙤약볕 아래에서 모래먼지를 온몸으로 받으며 과일을 한 봉지씩 들고 따라왔다. 버스가 달리는 속도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다들 필사적으로 버스를 따라오며 살기 위해 소리를 질렀다. 과일 좀 사달라고. 그러다가 나는 한 남자아이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굳게 다문 입을 양 옆으로 길게 찢으며 옅은 미소를 띠워 보냈다. 그러자 과일이 든 투명한 봉투를 들고 따라오던 그 아이는, 나를 보고 턱을 위로 한번 탁 치고 미소를 보이며 내 인사에 답했다. 그 인사를 뒤로 아이는 버스 따라오기를 멈추었고, 버스는 여전히 모래먼지를 아이의 온몸에 뿜으며 지나쳤다. 여전히 내 얼굴에는 아이에게 보냈던 미소가, 아니 그보다 더 짙고 진한 미소가 띠워져 있었으며 그러고 나서 문득 울컥하며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뭐라고, 아이를 동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맹세코 아니었다. 내게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울컥한 것은 저 어린것이 살아보겠다고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달리는 버스에 바짝 달라붙어 따라와서 나를 보며 지어버린, 어느 어린아이에게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순수한 미소가 내 마음을 할퀴었다. 잘 사는 아이던, 못 사는 아이던 아이들의 미소는 아이들의 미소대로 투명했다. 그동안 나는 아이들의 투명한 관심과 호기심을, 오염되어 흐릿한 마음에 투영하여 그것을 조롱으로 느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달린 버스는 완전히 어두워지고 나서야 이와사()에 도착했다. 시간을 보니 오후 7시를 지나고 있었다. 우리는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내일 다시 최종 목적지인 아디스아바바로 가는 것이었다. 한 명의 버스기사가 24시간의 여정을 다 하기란 불가능했으며, 하루 묵어가는 편이 내게도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내일 몇 시에 버스가 출발하는 것인지, 이 어두컴컴한 밤에 어디서 잘 곳을 찾아야 할지가 걱정이었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잘 곳을 찾아갔고 나는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하여 아무나 붙잡고 내일 버스는 몇 시에 출발하는지 물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영어를 잘 하지도 못할뿐더러, 대답을 들었어도 영 찝찝한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들이 대답하길, “내일 11:00PM에 떠나요”라고 했는데 나는 이것이 분명 에티오피아 시간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에티오피아는 국제 시간을 사용하지 않고 그들만의 시간이 따로 있다. 이를테면 이들이 말한 11:00PM은, 6시간을 더한 국제 시간으로 다음날 05:00AM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한 계산을 믿고 싶지 않았으며 누군가로부터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리고 그때, 한 남자가 내게 “국제 시간으로 05:00AM 맞아요, 그리고 버스는 05:30AM 즈음에 출발할 겁니다”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너무도 반가운 영어에, 남자에게 궁금한 것들을 모조리 물어보기로 했다. “숙소는 어디서 잡으면 돼요?”라고 묻자 그는 “저쪽에 가면 몇 개 있을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의 온화한 표정과 예의 바른 말씨에서 무조건적인 믿음을 가졌다. 그리하여 나는 그에게 이어 말했다. “혹시 괜찮으시면 숙소 잡으시는데 따라가도 될까요? 같은 숙소에서 하루 보내고, 내일 아침에 만나서 같이 버스 타러 오면 좋겠는데” 그러자 그는 흔쾌히 “좋아요”라고 대답했다. 

 숙소를 찾으러 가기 전에 또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버스 위에 실려있는 배낭이었다. 내가 기사에게 배낭을 꺼내 달라고 하기엔 너무도 꽁꽁 잘 싸매어져 있어 말을 꺼내기가 미안했다. 나는 기사에게 “짐은 어떻게요?”라고 물었는데 기사는 “안전해요, 두고 가고 내일 다시 와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배낭에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나 하고 생각해 보았는데, 외장하드와 스피커, 그리고 선글라스 정도가 있었다. 나는 별 수 없이 버스기사를 믿어보기로 하고, 짐은 둔 채로 숙소를 찾으러 갔다. 


 숙소를 찾으러 가는 길에 나를 도와준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알고 보니 그는 에티오피안이 아니라 우간다에서 온 친구 마이크(Mike)였다. 우리는 숙소를 찾아 헤매었다. 이와사는 어딘가로 향하는 많은 버스들이 모여 하루 쉬고 가는 중간 기착지로, 우리보다 먼저 온 많은 승객들이 숙소를 하나씩 차지하고 있던 탓에 빈 방이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점점 구석으로, 더욱 깊고 어두운 골목으로 숙소를 찾아 들어가게 됐다. 나는 슬슬 두려워졌지만 마이크를 믿기로 했다. 영어를 못하는 에티오피안들과의 의사소통에 마이크도 꽤나 곤혹스러운 듯했다. 그러다가 우리는 가로등 하나 없는 꽤나 깊숙한 곳에서 숙소를 발견했다. 주인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으며 마이크가 손짓 발짓으로 대화하려 노력했다. 하루 종일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범벅이 된 땀을 창문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으로 말리며 오느라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마이크는 샤워가 가능한지 물었는데, 주인은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몸짓을 하며 수도를 돌렸는데 정말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주인은 근처에 있는 커다란 파란 통의 뚜껑을 열었는데 그 안에 물이 반쯤 차있었고 바가지 하나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샤워는 할 수 없을 것 같았고 대충 양치와 세수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샤워시설을 보니 이 숙소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이 대충 짐작이 갔다. 그리고 나는 방에 들어가 불을 켜보았는데 어둑한 주황 불이 흐릿하고도 몽롱하게 들어왔다. 그러고 나서 나는 콘센트를 찾아보았는데, 침대 옆에 눈알이 빠져나와 달랑거리는 피에로 인형처럼 콘센트가 벽으로부터 이탈하여 소름 끼치게 달랑거리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휴대폰 충전기와 연결을 해보았는데, 섬뜩한 모양새와는 다르게 제 역할을 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중에 떠다니는 인터넷이 있나 하고 잡아보려 했으나, 그것은 역시 욕심이었다.  



 우리는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이렇다 할 음식을 먹지 못해 몹시 배가 고팠다. 마이크가 내게 음식을 포장해오자고 해서 우리는 숙소를 나와 가까운 음식점을 찾아갔다. 직원들이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해 주문하는데 꽤나 애를 먹었지만 가까스로 ‘토마토 스파게티’를 각각 하나씩 주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식사가 나오는 동안에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맥주를 마시며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자, 불편했던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이크와 이야기하며 맥주 두 병을 모두 비워갈 때 즈음 직원이 은색 호일로 포장된 음식을 갖다 주었다. 우리는 그것을 들고 숙소로 들어와 각자 방으로 헤어졌다. 


 드디어 혼자만의 시간이 왔다. 인터넷도 되지 않고 몽롱한 주황 불빛 아래 있으니 쓸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마음 편하게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았다. 나는 한국은 몇 시일지 계산해보았다. 새벽 2시를 막 지나고 있을 시간이었다. 평일이니 가족들이고 친구들이고 모두 잠들어있을 고요한 시간이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지금 얼마나 세상 깊숙한 곳에서 외롭게 지내고 있는지 이런 것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지만, 이내 전부 쓸모없는 욕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내게 관심이 전혀 없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한국이 그리운 마음에, 한국 영화 한 편을 보고 자려고 했으나 생각해보니 영화가 저장된 외장하드가 버스 위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나는 포장해온 스파게티나 먹고 자야겠다고 생각하여 은빛 호일을 뜯어내었다. 호일 안에는 인젤라 빵이 접혀있었으며 접힌 빵을 드러내자 면이 보였다. 이놈의 지긋지긋한 시큼한 빵은 어딜 가나 빼놓지 않고 나왔다. 하지만 나는 너무도 배가 고팠기에 빵과 면을 한 젓갈씩 퍼서 입에 쑤셔 넣었다. 지독하게 맛이 없었다. 나는 면을 거의 다 먹고 나서 배가 거의 차자, 시큼한 이 빵을 쳐다보기도 싫어져 다시 호일을 구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고 나서 밖으로 나가 물을 몇 바가지 퍼서 간단하게 세수하고 양치를 했다. 히말라야에서 물티슈로 샤워하며 버티던 것을 떠올려보면 이 정도면 훌륭한 샤워라고 할 수도 있었다.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온 몸에 모기기피제를 바르고 불을 끄고 누워서 책을 읽었다. 그리고는 금세 꾸벅꾸벅 졸다가 조금 이른 시간에 잠에 들었다.  


 밤새 굉장한 비가 내렸다.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에 놀라서 잠에서 깨었는데, 한참을 멍하니 이게 무슨 일인가 하다가 이내 빗소리구나 하고 다시 잠에 들 정도였다. 알림 소리에 맞춰 새벽 4시에 일어났다. 나는 허리를 일으켜 스위치를 올렸지만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휴대폰이 충전되고 있는지 확인해보았는데, 밤새 내리는 비에 또 정전이 된 모양이었다. 나는 휴대용 랜턴을 켜고 나갈 준비를 순식간에 마쳤다. 그러고 나서 문을 열었는데 비릿한 비 냄새와 섞인 싱그러운 풀 냄새가 기분 좋게 풍겼다. 그리고 이내 마이크도 방에서 나왔고 우리는 작은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새벽길을 휴대용 랜턴으로 밝혀가며 터미널로 찾아갔다. 

 우리는 가장 먼저 버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버스는 아디스아바바로 갈 사람들을 한 시간 가량 모으더니 이내 버스를 다시 꽉 채우고 출발했다. 나는 버스에 타자마자 책을 읽다가 잠에 들었다. 그리고 조금 가다가 검문을 받았으며 조금 더 가다가 어느 마을에 멈추어 아침식사를 했다. 역시나 나는 사람들의 눈길과 조롱―몇몇은 분명히 조롱이 맞았다, 나를 보고 “칭쳉총”이라고 하며 몸을 비비 꼬는 듯한 춤을 추는 것을 보면―을 받으며 벤치에 앉아 버스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버스가 출발하기 전, 기사가 버스 위에 올라가 있는 짐을 정리한다며 내 배낭을 내려주었는데 배낭이 온통 젖어있었다. 나는 배낭을 자리로 가져와 열어보았는데 안에도 꽤나 젖어있었고 침낭도 온통 축축했다. 밤새 내린 비가 결국 배낭 안까지 침투한 모양이었다. 나는 무엇보다 외장하드가 걱정이었다. 그러나 좁아터진 버스 안에서 확인할 수는 없었으며 그저 무사하길 바랄 뿐이었다.  


 새벽 5시에 출발한 버스는 다음날 오후 12시가 되어 이윽고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했다. 꼬박 1박 2일을, 자는 몇 시간을 제외하고 24시간을 달려왔다. 나는 2018년 2월 27일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출발하여 목적지인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 2018년 3월 2일에 도착했으니, 무려 3박 4일간의 장거리 이동 여정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기만 하던 장거리 버스 여정이, 점심을 먹으며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 이후로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이토록 저렴한 가격에 현지인들과 한 버스를 타고 온전히 하루를 같이 보내며, 현지인들의 생활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여행이 아닐까 생각했다. 만약 내가 버스가 아닌 비행기를 타고 2시간 만에 나이로비에서 아디스아바바로 ‘툭’ 하니 떨어졌다면 무엇을 느낄 수 있었을까. 이들과 무엇을 교감할 수 있었을까. 여전히 무섭고 두렵다는 핑계로 입과 귀를 막고 다니지는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버스에서 내려 배낭을 메었는데 어깨부터 등까지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마이크와 인사하고 각자 갈 길로 헤어졌다. 마이크는 아디스아바바에서 이틀간 일을 본 후 다시 5일간 버스를 타고 본국인 우간다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는데, 나보다 덩치도 훨씬 큰 친구가 대단한 참을성과 인내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나는 숙소까지 갈 방법을 모색했다. 터미널에서 숙소까지는 약 4km, 내게 흥정하는 택시기사들은 한국보다도 곱절은 비싼 가격을 요구했다. 나는 아직도 해가 중천에 떠있었기에 걷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숙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이, 지금껏 가본 세계의 그 어느 나라보다도 아시안에 대한 조롱과 차별이 가장 심한 곳이라고 몸소 체험했다. 


 한 걸음 떼기가 무섭게 한 남자가 따라붙었다. 그는 키가 190은 되어 보이는 장신에 삐쩍 말랐으며 옷은 군데군데 찢어져있었다. 그의 말투는 마약이라도 한 사람처럼 어눌했는데 내게 한 마디를 건넬 때마다 얼굴에 침을 마구 튀겨댔다. 그는 내게 저쪽에 미니버스가 있는데 그것을 타고 숙소까지 갈 수 있다며 택시비의 1/10 가격을 불렀다. 나는 터무니없이 저렴한 가격과 그의 허름한 행색에 의심이 들어 무시하고 가던 길을 계속해서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줄곧 따라오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윽고 그는 내 팔과 가방을 잡아당기며 자기를 믿으라고 소리쳤는데, 나는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고 크게 소리쳤다. 그는 끈질겼다. 끈질기게 나를 따라오기에 나는 두렵다기보다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주변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그때 나와 눈이 마주친 한 남자의 반응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싸우는 자세를 취하며 내게 그와 싸우라는 몸짓을 보냈다. 얼굴에는 사악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것을 본 주변 사람들은 낄낄대며 비웃었다. 나는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참고 무시하는 것뿐이었다. 짐승과 싸울 용기―그것을 용기라고 하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는 조금도 없었다. 나는 더욱 견고하게 눈과 귀를 틀어막고 걸었다. 그러자 그는 결국 내게 욕하며 소리쳤다. 나는 그가 욕하는 순간 내게 손찌검을 하는 줄 알고 고개를 숙였는데 그는 뒤로 돌아가고 있었다. 역겨웠다. 버스를 타고 오며 그들을 보고 느꼈던 연민이 부끄럽고 죄스럽게 여겨졌으며 비참하고 미웠다. 


 40분 정도 되는 거리가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다섯 걸음이 멀다 하고 나를 지나치는 사람들이 “차이나, 차이나”라며 조롱하고 깔깔댔다. 어떻게 나라가 돌아가면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은 마음으로 이토록 동양인을 조롱하고 차별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교육을 받을 나이가 되면서부터 그러라고 학교에서 배우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종교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들의 종교에서 가리키는 정의란 이런 것인가, 사람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고 생각하며 분노했다.  

 숙소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숙소 간판을 찾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정면에서 젊은 여자 셋이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과 흘깃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깔깔거리며 약 올리는 듯한 표정을 하길래 나는 바로 눈을 피했다. 그리고 그들과 점차 가까워져 이윽고 내 옆을 지나치던 바로 그때, 한 여자가 들고 있던 핸드백을 내 오른쪽 허벅지로 휘둘렀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허벅지에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뒤로 돌아 그들을 노려봤다. 그들은 미친 여자들처럼 깔깔댔으며 걷는 몸을 제대로 주체하지도 못하고 비틀거렸다. 처음에는 동양인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이 에티오피아 땅에서, 흑인들 사이에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단순히 정신적인 조롱을 넘어 육체적으로도 희롱했다. 감정이 요동쳤으며 또다시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나는 맹수 무리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한 마리의 개처럼 그들의 장난감이 되어 놀림당하고 뜯어 먹혔다. 



 나는 숙소를 찾아 들어와 주인에게 한풀이를 했다. “제가 지금껏 다닌 나라 중에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나라네요. 최악입니다. 사람들은 저만 보면 “칭총, 차이나”거리며 조롱하고 심지어 어떤 여자들은 핸드백으로 저를 치기까지 했어요. 이 나라에 오자마자 심신이 너무도 지치네요. 도대체 어째서 이 모양 이 꼴입니까?”라고 내가 이야기하자 그는 “미안해요, 사람들은 아마 당신이 중국 사람인 줄 알아서 그랬을 거예요.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중국인을 싫어하거든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당신이 미안할 건 아니지요, 아무튼 방은 있나요?”라며 하소연을 멈추었다. 더 이상 따지고 들다간 내게 방을 주지 않을 것 같아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선 것이었다. 숙소 주인도 나를 보자마자 “차이나?”라고 묻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중국인인 줄 알아서 그랬을 것이라니, 그것이 핑계가 된다고 생각해서 말한 것인지, 이들의 수준을 도대체 어디까지 낮게 잡아야 마침내 이들을 이해하게 될 수 있을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나는 투어 회사를 찾아가 에티오피아에서의 여정을 계획하고 계약했다. 그리고는 아디스아바바를 다음날 바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도시에 단 하루도 더 머물기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계약을 마치고 돌아와 저녁을 먹으러 숙소 바로 옆에 있는 햄버거 가게로 갔다. 가보고 싶은 식당이 있었으나, 그곳까지 찾아가기에 역겨운 조롱을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식당에 앉아 햄버거를 하나 주문했다. 식당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낄낄거리는 것이 느껴졌고, 주문을 받던 직원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푸흡-하며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지만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다. 곧 식당은 저녁 먹으러 온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테라스에 있는 테이블에만 자리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곧 무거운 비가 무섭게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나이가 마흔 정도는 되어 보이는 한 남자와 비대한 여자 셋이 테라스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이들은 이따금 튀기는 빗물이 싫었던지 식당 안으로 들어와 큰 테이블을 혼자 차지하고 있는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들이 앉을 수 있게 자리를 한쪽으로 비켜주었다. 그러자 그 남자는 건너편에 앉으며 내게 “칭챙총, 차이나?”라고 물었다. 나는 순간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터지고 말았다. 그에게 약간 미소를 띠며 “당신 그거 인종차별인 건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나는 중국사람이 아니라 한국사람이고요,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당신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야”라고 나지막이 쏘았다. 그러자 그는 “아, 한국인이에요? 미안해요”라고 대답했다. 그 후로 가게의 분위기는 싸해졌다. 나는 또다시 기분이 바닥까지 내팽개쳐져 그렇지 않아도 뻑뻑하고 맛없는 햄버거를 삼키기가 몹시 곤혹스러웠다. 나는 이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기가, 마치 푸세식 화장실에서 쪼그려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듯 역겨웠다. 그리하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먹고 있던 접시와 콜라를 들고 빗물이 튀기는 테라스로 나가버렸다. 잠시 후 직원이 눈치를 보며 테이블에 쓰러져있던 휴지를 바로 세워주었다. 나는 직원을 보고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배낭에 있는 옷이며 속옷이며, 모든 옷가지가 젖어버렸다. 나는 일단 젖은 옷들을 사방에 펼쳐두었으나, 줄곧 비가 내리는 탓에 너무도 습했다. 그리고 외장하드를 꺼내 확인해보았는데 빗물이 외장하드까지 적셔 놀랐지만, 확인해보니 문제없이 작동했다. 너무도 지친 나는 곧 잠에 들었다. 다음날 새벽 4시 30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메켈레로 15시간을 이동해야 했다. 끊임없이 장시간의 이동에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지만, 아디스아바바에 더 있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아 하루빨리 벗어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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