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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전 Sep 11. 2022

열정에 물 붓기

[生일]

 나는 열정에 못 이겨 다 타버린 예술가들을 생각한다. 어떤 예술가들은 스스로의 생을 깎아내가며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내일의 에너지를 모두 끌어다가 오늘 다 소진해버린다.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현대인들은 생의 에너지를 담보로, 일이라는 작품을 만들고, 그 값으로 돈을 받는다.


 정신적인, 그리고 육체적인 생명력의 마모를 촉진시키고, 그 결과물을 돈으로 돌려받는 삶. 이 숭고한 행위는 스스로 선택한 것일까? 나는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구조적인 폭력에 대해 생각한다. 돈을 더 벌기 위해, 일을 더 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지 되돌아 봐야 한다. 다소 무겁게 '생명력을 다한다' 고 표현했지만, 지금 이 순간이 주는 유희, 다정한 사람들과의 만남, 이런 것을 제하고 한 인간에게 오직 작품을 생산하는 일만 남은 삶이라면 죽어있는 상태와 크게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우리는 그 구조가 신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사회의 매커니즘일 수는 있어도, 한 개인이라는 우주의 매커니즘은 아닐 수 있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분명, 열정으로 스스로를 태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세상이 돌아간다고 믿고 사람들은 움직인다. 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에게 작용하는 매커니즘을 선택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 스스로를 매일 소진시켜 나갈지, 혹은 살아있음을 택할지. 때로는 세상이 가르친 열정이 스스로를 다 태워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반대로 본인이 그것을 멈출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관객은 자신의 나이 만큼 케이크에 초를 꽂는다. 그리고 초에 직접 불을 붙인다, 삶에서 본인이 태우고 싶은 열정만큼. 생산성 있는 삶에 대한 의지를 불로써 표현한다. 그리고 타오르는 초를 지켜본다. 그대로 계속 놔두면 초는 다 타버릴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도 있다. 입김을 불어 불을 꺼버리는 것. 그럼 열정도 소멸되겠지만, 초 자체가 소멸되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열정의 스위치를 끄는 순간 우리는 박수를 치며 축하 행위를 비로소 마무리 할 수 있게 된다. '열정'이라는 이름 대신 살아있음을 택한 삶. 그리고 그것에 대한 모두의 축하 박수. 우리는 매일 이런 선택지 앞에 선다. 나를 태우고 삶을 깎아 먹을 것인지, 불을 꺼버리고 달콤함을 맛 볼 것인지. 틀린 답은 없다. 판단은 본인이 내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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