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배우는 리스트에 없었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를 보면서 옷 잘 입는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넷플릭스 시리즈 '어둠 속의 감시자(The watcher, 2022)'에서 나오미 왓츠는 작정이라도 한 듯 내내 눈을 사로잡는 스타일을 선보인다. 연말 시상식에서 스타일상 하나쯤 타 주겠다는 듯, 동시대 인텔리 뉴요커의 세련됨을 톡톡히 가르쳐 주겠다는 듯, 틈을 주지 않고 의상, 신발, 목걸이, 안경, 반지 등 뭐 하나 그냥 넘어가는 게 없다.
나는 이 시리즈를 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가 나오미 와츠 패션이 화제라는 기사를 우연히 보고 시작해 이틀만에 시즌1 정주행을 끝냈다.
그녀가 맡은 노라 브래넉 역은 꽤 잘 사는 단란한 4인 가족을 일군 도예가, 부인, 엄마다. 흔한 재혼도 아니고 고등학생 딸, 초등학생 아들 모두 자기 자식이다. 파산한 경험이 있어 돈 문제로 가끔 남편과 충돌이 있지만 아직도 서로에게 성적으로 끌린다.
조금 무리해서 집 바로 앞에 노숙자들이 기다리는 맨하탄 대신 뉴저지에 크고 멋진 집을 살 수 있었고, 최고급 대리석 아일랜드 식탁도 설치했다. 프리우스를 탄다고 테니스 클럽에서 눈총은 받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대기 걸어둔 쟌느레 체어는 이번엔 참아야 하고 남편은 파트너 승진에서 밀렸어도 그녀의 작품이 갤러리에서 반응이 좋아 잘 팔리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감각도 있는 아티스트, 그러나 완벽함 속에 내적, 외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불안한 여자의 패션은 시종 아이보리 톤온톤으로 표현된다. 아이보리 베이스에 브라운, 베이지, 그레이를 살짝살짝 넣었다 뺐다 할 뿐이다.
아이보리 톤온톤은 블랙에 비해 확실히 부해 보이고 아무리 피부가 하얘도 노란 빛이 도는 동양인 얼굴에는 난이도 최상이라고 생각해 유행인 걸 알면서도 좀처럼 시도하지 못하고 있는데, 보면서 대리만족 제대로 했다.
대리만족만 하기에는 조금 서운하던 차에 그녀의 룩을 보면서, 아이보리+브라운톤이 너무 노리끼리해서 꺼려진다면 아이보리+그레이로 시작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레이는 확실히 쿨톤이니까.
브랜드가 드러나지 않는 기본 아이템을 좋은 소재의 아이보리, 베이지, 그레이로 입었을 때 가장 고급스럽다는 걸 그녀는 온 몸으로 보여준다. 공개된 몇몇 아이템의 브랜드를 보니 꽤 비싸긴 해도(40~50만원대 니트) 완전 하이엔드는 아니다(케이트, 알리기에리, 헬렌 카민스키, 더 로우 등).
아이엠러브에서 틸다 스윈턴과 그 시어머니 역이 하나같이 버킨백을 들었던 것이나, 블루재스민에서 케이트 블란쳇이 망한 와중에도 샤넬 트위드와 루이비통 수트케이스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 하나하나가 모두 설정이듯이, 요즘은 극중 인물의 상황과 브랜드를 정확하게 매치할 만큼 스타일링도 정교하게 하는데 이 드라마도 노라 브래넉의 재정 상황에 맞는 중고가 브랜드를 적용했다.
뚱뚱해 보이고, 얼굴은 더 노리끼리해 보인다고 맨날 블랙, 네이비, 그레이도 다크그레이만 줄창 입었는데, 이제 봄도 오니 아마도 옷장 저 깊숙한 곳에 있을 아이보리 니트를 꺼내 놓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