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골에서 스무 해를 살다가 대학 때문에 상경한 케이스이다. 도시 악어가 도시의 삶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며 10년 전, 낯선 도시 서울에서 적응하기 위해 애를 쓰던 시절이 떠올랐다.
서울에 와서 내가 제일 처음 적응해야 했던 것은 버스와 지하철을 타는 것이었다. 고향에 살 때 내가 다니던 초, 중, 고는 모두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고, 피아노 학원은 15분 거리.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은 지역의 문화센터 같은 곳으로 걸어서 25분 정도의 거리였다. 고향에서의 생활권은 모두 걸어서 갈 수 있었고, 버스를 타고 30분 이상 이동하는 것은 다른 지역을 갈 때나 해당되는 일이었다. 앞으로 매일 학교를 가기 위해 30분을 버스를 타고 다녀야 하다니. 역시 서울은 클라스가 다르구나.
나는 학교를 갈 때 버스를 주로 이용했고, 때로는 지하철을 타기도 했다. 버스는 빙빙 돌아가서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그나마 익숙하고, 한 번에 갈 수 있어서 심적으로 편했다. 버스를 놓쳐서 지하철을 타는 날은 수업을 듣기도 전에 진이 다 빠졌다. 지하철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매번 노선도를 공부하듯 외우고, 안내 방송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럼에도 가끔 반대방향 지하철에 몸을 싣는 어이없는 실수를 하곤 했다. 환승 구간 에스컬레이터는 왜 이렇게 긴 건지... 아침 일찍 수업이 있는 날은 사람들 사이에 끼여서 4호선과 9호선의 매운맛을 봐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 일 아니지만 당시의 나는 통학하는 30분의 시간을 힘겨워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만난 한 친구가 학교에서 집까지의 거리를 물었을 때 나는 너~무 멀다고 말했다. "얼마나 걸리는데?" 30분이 넘게 걸린다고 하니까 친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엄청 가까운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가깝다고?!" 깜짝 놀라 반문했다.
그 뒤로 나는 만나는 친구들마다 학교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학교 앞에서 자취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1시간 정도는 걸리는 거리에 살고 있었다. 더러는 경기도에서 통학을 하고 있는 친구도 있었고, 놀랍게도 매일 아산에서 ktx를 타고 학교에 오는 친구도 있었다. 30분 정도 거리는 정말로 가까운 편에 속했다. 서울에 살려면 지옥철과 만원 버스뿐만 아니라 이 거리감각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탔을 때 30분 거리는 가깝고, 한 시간까지는 충분히 갈만한 거리'라는 것을 수학공식처럼 입력했다.
서울에 살면서 또 한 가지 적응해야 했던 건 이 도시는 빠르게 바뀐다는 것이다. 내가 자주 가던 감자튀김을 팔던 카페가 있다. 분위기도 좋고, 음식도 맛있어서 일주일에 2~3번 정도는 갔던 것 같다. 그날도 어김없이 감자튀김을 시켜놓고 앉아 있었는데 사장님이 서비스로 사이다를 주셨다. 특별히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올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시곤 했다. "감사합니다!" 기분 좋게 사이다를 받으며 앞으로 더 자주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이틀이 지난 뒤, 카페에 갔는데 간판이 내려가고 없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위이이잉 무언가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가게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처음엔 충격이, 나중엔 소중한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슬픔이 밀려왔다. 사장님이 건넨 사이다는 무슨 의미였을까? 왜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을까? 이런저런 상념이 밀려왔지만 그 자리에 족발집이 생기고, 또 얼마 안 가 안경점이 새로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내가 좋아하는 가게와 장소들이 조용히 사라지는 몇 번의 경험을 거치며 이 도시는 빠르게 변한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다. 그 뒤로 내가 좋아하는 공간들이 오래도록 유지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주기적으로 자주 방문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언제나 이 장소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한다.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 또한 새롭게 배운 점이다. 고향에 살 때는 모두가 아는 사람이었다. 나의 고향은 부모님의 고향이기도 한데 특히 지금까지 한 번도 고향을 벗어나 산 적이 없는 아빠는 동네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핵인싸였다.
길을 걷다 보면 아빠 친구, 엄마 친구, 동네 아저씨, 친구의 할머니를 만나 하루에도 몇 번씩 인사를 하며 걸음을 멈추고 이야기를 하곤 했다. 길을 걷다가 "xxx 씨 딸 아니여?" 묻는 말에 "맞아요."라고 대답하면 용돈을 주시던 아저씨들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서울에 올라와 길거리를 걷는데 모두 모르는 사람들인 데다가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길을 걸으며 해방감을 느꼈다. 익명성에 기대 숨을 수 있는 이 도시가 처음으로 좋아졌다.
그런데 십 년을 살다 보니 자유롭게만 느껴졌던 도시의 무관심이 이제는 쓸쓸하게 느껴진다. 어딘가로 바쁘게 향해가는 사람들. 타인에게 무관심한 사람들. 경쟁과 생존. 살아내기에 급급한 도시에서의 삶의 방식에 지쳐갈 때면 나는 이 도시에서 몇 명 되지 않지만 나를 알아주는 사람들을 만난다. 서로가 서로의 기억이 되어 외로운 도시의 밤을 함께 밝힌다. 그게 썩 위로가 된다.
시골에 살 때는 일상이었던 것들. 봄이 되면 엄마와 함께 고사리를 끊고, 쑥을 캐던 일. 친구 부모님 농사일을 도와서 오이 한 박스를 일당으로 받는 일. 아빠가 키운 사과나무에 애기주먹만 한 사과가 열려 웃던 일. 밤이 오면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던 일. 구수하게 볏짚이 타는 냄새. 나무 냄새. 나는 그런 것들을 좋아했다. 이제는 그 풍경들을 보지 못하지만, 빌딩숲에 있어도 늘 자연을 가까이하려고 한다. 반려 식물을 키우고 도림천에 산책을 나간다. 시간이 날 때면 서울 곳곳의 산을 오른다.
새삼스럽다. 처음 상경했을 때부터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이 도시에서 10년을 살고 있다. 느리고, 변하지 않는 것들을 좋아하며, 늘 자연과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나. 그럼에도 나는 이 도시에서 나름의 방식대로 적응하며 살았구나 싶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그 말이 진짜인 걸까? 낯설기만 했던 서울이 이제는 제2의 고향처럼 느껴진다. 도시에서의 삶에 길들여진 도시 악어. 더 이상 밀림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도시 악어가 "나는 지금 여기에 있고, 살아가야 하지."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본다. 고향이 그립기는 하지만 돌아가지 못한다 한들 슬프지 않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고, 살아가야 한다. 나는 이 도시에서 꿈을 꾸며 꿋꿋하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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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그림책 스터디를 함께하는 <노들리에>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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