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onho Song Mar 29. 2018

Robert Johnson (로버트 존슨)

Acoustic Blues - Delta 블루스의 아버지

Robert Leroy Johnson (May 8, 1911 – August 16, 1938)



델타 블루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Robert Leroy Johnson (May 8, 1911 – August 16, 1938)은 Charlie Patton, Son House와 함께 미국의 초기 델타 블루스를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분류된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게 되었다는 미스터리한 신화와 함께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는 이 블루스 뮤지션은 1936년과 1937년에 남긴 4장의 개인 앨범을 통해 수많은 뮤지션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며 오늘날 블루스의 제왕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독창적이었던 그만의 기타 스타일과 잘 배열된 보컬 사운드, 당시 진보적인 작곡 능력을 보여주었던 그의 음악은 후에 블루스 역사상 가장 중요한 블루스 뮤지션으로 평가되며 전 세계 많은 뮤지션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현재 락엔롤의 명예에 전당에 올려져 있다. 



그가 음악적으로 이룬 성과를 미쳐 만끽하지 전인 27살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이 비운의 천재 뮤지션은 전설로 추앙받기 이전의 개인 기록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자신의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한 루머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며 주로 동시대 때 활동하였던 Son House와 그의 음악적 파트너 Willie Brown에 의해 증언되었다. 살아생전 그는 미스터리한 인물로 알려졌으며 공연 도중 돌아 앉아서 노래를 부르거나 노래를 부르다 말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집에 가는 이상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쉬는 시간에 집에 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확실하지 않은 그의 기록 때문인지 그의 미스터리한 성격 때문인지 사람들은 이 천재 뮤지션에 상상력을 가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노래 가사 중 악마와의 거래를 의미하는 모호한 가사는 후에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사실인 양 믿기 시작하면서 이 미스터리한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설로 전해지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예술 작품에 상상력을 불어넣는 모티브가 되고 있다. 



떠돌이 생활을 하며 주로 길거리에서 음악을 했던 로버트 존슨은 사실 그의 음악적 업적에 비해 살아생전 큰 대중의 관심은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23년 후인 1961년 그의 음반이 LP King of the Delta Blues Singers로 다시 재발매되면서 그의 음악은 미국 전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는 텍사스 블루스의 아버지인 Blind Lemon Jefferson, 이스트코스트 스타일의 Blind Blake, 동시대 블루스 뮤지션인 Peetie Wheatstraw와 Lonnie Johnson의 스타일을 잘 조화시킨 자신만의 고유의 사운드를 들려주며 현재 델타 블루스를 대표하는 뮤지션이자 모든 블루스 뮤지션의 아버지 격이 되었다. 



"I went to the crossroad, fell down on my knees Asked the Lord above "Have mercy, now save poor Bob, if you please" 나는 교차로에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아 신께 이렇게 빌었다. "자비를 베푸소서, 지금 이 가엾은 Bob을 구하소서, 부탁드리오리다. - CrossRoad Blues 중" 

"You may bury my body, ooh, Down by the highway side Oh, my old evil spirit. Can get a Greyhound bus and ride 내 시체를 묻게 되거든, 고속도로 주변에 묻어주시오. 나의 오래된 악령이 Greyhound 버스를 탈 수 있도록 - Me And The Devil Blues 중"



위에 글은 그가 노래했던 가사말 중에 하나로써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게 되는 그의 전설에 대한 부분이다. 당시 유명 블루스 뮤지션이었던  Son House와 Willie Brown의 증언에 의하면 어렸던 로버트 존슨은 밤이 되면 부모 몰래 그들이 연주하던 극장에 자주 들리곤 했는데 그들이 쉬는 시간이면 무대에 올라 기타와 노래하는 것을 흉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훌륭하지 못했던 그의 연주력과 노래 실력 때문에 자주 야유를 받으며 극장을 쫓겨나기도 하였는데 그러던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난 그는 갑자기 Son House나 Willie Brown보다 뛰어난 연주력과 노래실력을 보이며 극장에 있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으며 이에 모든 사람들이 의아해했다는 이야기다. 



당시 사람들은 그가 노래했던 가사들을 토대로 기타를 잘 치고 싶어 했던 로버트의 욕망이 그의 영혼을 교차 길 (Cross Road)에서 악마에게 팔며 모종의 거래를 하게 했다고 생각했고 실제 단명했던 그의 삶은 많은 사람들이 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판 대가라고 믿기 시작하였으며 이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오늘날 전설이 되었다. 이것을 뒷받침 해주는 몇 가지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그는 당시 일반적이지 않은 기타 튜닝을 사용한 연주를 자주 보인것이다. 이 튜닝은 당시 워낙 상식 밖이 였지만 이는 결국 그 사운드가 더욱 독창적이게 들리게 하는 효과를 낳게 하였고 이를 통해 당시 어디에도 없던 음악들을 주옥같이 작곡하기도 하였으며 기타 연주 또한 보다 쉽게 만들어 주었다. 바로 그 튜닝법을 로버트 존슨에게 알려준 게 바로 악마의 거래를 통해서라는 이야기다. 



또 하나는 당시 뉴올리언스 지방에서 유행하던 부두교를 그가 믿었다는 이야기인데 부두교는 흑인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주술행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주술행위 중 하나가 교차로에서 행해지고 그곳에서 그들만의 의식을 통해 악마를 만날수 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어느 날 자정 교차로를 지나던 로버트 존슨은 연주를 잘하고자 하는 욕망에 힘입어 바로 이 의식을 통해 악마와 만나고 삶을 대가로 거래를 한 결과 천재 뮤지션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많은 학자들과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당시 그가 살았던 Dockery Plantation, Mississippi의 지형을 토대로 그 교차로가 어디인지 알아보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정확하게 그곳의 위치가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현재 뉴올리언스 스토리빌(Storyville , New Orleans)에 있는  미국 미시시피주 클락스데일(Clarksdale) 지역의 61번과 49번 도로 교차점을 데블스 크로스라 부르며 로버트존슨을 추억하고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아무도 모른다.) 



 

그가 악마와 거래를 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존슨은 미시시피주에 있는 헤이즐 허스트(Hazlehurst)에서 줄리아 메이저 도즈(born October 1874)와 노아 존슨 사이(born December 1884)에서 Robert Leroy Johnson이란 이름으로 1911년 5월 8일 날 태어났다. 이때 이미 줄리아는 10명이 아이들이 있었고 로버트가 태어날 당시 나이는 40대로 추정된다. 그리고 몇 년 후 줄리아는 상대적으로 번영한 토지의 소유자 이자 가구를 만드는 사람인 찰스 도즈(born February 1865)와 재혼하게 되지만 이내 곧 찰스 도즈는 백인 토지자들과 분쟁이 일어나게 되고 폭도들에 의해 헤이즐 허스트에서 쫓겨나 멤피스로 이사하게 된다. 이때 어린 로버트는 아버지가 있는 멤피스로 가게 되면서 어머니 줄리아는 헤어지게 된다. 이때 찰스 도즈는 이름을 찰스 스펜서(Charles Spencer)로 바꾸게 된다. (1900년대 초반 제대로 인구조사가 되지 않았던 시절 누군가의 흔적을 알아보려면 아버지의 성을 따르던 미국 문화를 참고로, 성을 토대로 누군가의 가족이나 친척임을 추정해볼 수 있기에 이름은 중요한 자료가 된다)  



어린 시절을 멤피스에서 보낸 로버트는 그의 형들에게서 기타와 하모니카를 연주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서 음악의 기초를 닦았고 1919년 그의 나이 8~9세에는 어머니가 있는 미시시피 델타 지역으로 돌아가 새아버지인 더스티 윌슨 (Dusty Willis)와 함께 살았으며- 1920 년 인구 조사에서 그는 윌슨과 줄리아 윌리스와 함께 알칸사스 주 루카스에 살고 있는 로버트 스펜서 (Robert Spencer)로 기록되어있다. 1924년과 1927년에 로버트는 Tunica지역의 Indian Creek School 학교를 다녔으며(이는 로버트가 그 당시 드물게 교육적인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 후에 는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에 출연했던 같은 학교 동문인 윌리 커피(Willie Coffee)의 회상에서 어린 로버트가 하모니카를 잘 연주했으며 오랫동안 결석했었다는 증언을 토대로 그가 다시 멤피스로 돌아가지 않았나 추정된다. 



19세가 되어 로버트 존슨은 버지니아 트래비스(Virginia Travis)와 미시시피주 펜튼 (Penton)에서 1929년 2월 17일 결혼을 하게 되고 이때 발급받은 결혼 증명서에 원래 아버지의 성을 따라 이름을 로버트 존슨라고 서명함으로 써 이때부터 그는 어릴 적 이름인 로버트 존슨이라는 이름을 다시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의 기쁨도 잠시 당시 16살이었던 로버트의 아내 버지니아 트래비스는 다음 해 1930년 4월경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게 되고 혼자 남겨진 것에 상심한 나머지 그는 세속적을 것을 추구하다가 곧 부두교에 에 빠지기 시작했으며 당시 로버트의 주변에서 이를 지켜보던 Robert "Mack" McCormick의 인터뷰에서는 이일을 통해 그는 그의 인생을 풀타임 블루스 뮤지션이 되고자 다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믿는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당시 최고의 블루스 뮤지션으로 불리던 Son House는 그의 음악적 파트너인 Willie Brown가 살고 있는 로빈슨 빌리지(Robinsonville)로 이사 오게 되는데 바로 이곳에서 로버트는 그들을 연주를 들으며 블루스 뮤지션으로써의 꿈을 더욱 키우게 된다. 이때 Son House의 회고에 의하면 존슨은 하모니카는 썩 불었지만 기타 연주는 많은 사람을 당황하게 했다고 한다. 그 뒤 로버트는 로빈슨 빌리지를 떠나 마틴 빌리지(Martinsville)로 이사하였고 이곳에서 그는 Son House의 기타 스타일을 연습하는 한편 다른 스타일의 블루스 기타리스트인 Isaiah "Ike" Zimmerman에게 기타를 배우기도 한다. 



그리고 얼마 뒤 존슨이 다시 로빈슨 빌리지에 나타났을 때 그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전에 없던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에 사람들은 그가 노래했던 노랫말을 토대로 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믿기 시작했으며 이사실이 많은 블루스 연구가에게 알려지면서 Son House는 많은 인터뷰를 받으며 존슨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존슨에 대한 그의 답변들은 모호했고 확인할 수 없는 많은 사실들이 어느 순간 우리에게 확신으로 남게 되었다. 




Robert Johnson과 그의 기타




1932년부터 그가 죽은 1938년까지 존슨은 주로 뮤지션으로 써 연주여행을 하며 먹고살았으며 주로  Memphis와 Helena 도시를 왕래하며 연주 활동을 하였고 미시시피 델타 지역의 작은 도시나 델타 주변의 도시들 Arkansas주까지 여행하기도 하였다. 때때로 그는 먼지역까지 이동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블루스 기타리스트 Johnny Shines와 함께 Chicago, Texas, New York, Canada, Kentucky, and Indiana 등의 지역까지 여행한 기록이 남아있다. 그는 한 곳에서 머물며 재혼하지 않고 연주 여행을 하며 그곳에서 사귄 애인집에 머물렀는데 때때론 짧게 가정을 꾸며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새로운 장소로 이동할 때마다 항상 새 애인을 사귀었으며 얼마 후 애인을 뒤로 한채 홀연 떠나기를 반복하였다. 그가 연주를 통해 남긴 흔적을 추적해보면 그는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적어도 8개 이상의 이름을 사용한 걸로 추정된다. 



1936년 존슨은 미시시피 주 잭슨에 머물고 있는 당시 유명 스카우터였던 H. C. Speir을 찾아가게 되는데 존슨의 재능을 알아본 H. C. Speir는 ARC레이블의 세일즈 맨이었던 Ernie Oertle을 소개하여주게 되고 이는 존슨의 첫 리코딩 세션으로 이어지게 된다. 1936년 11월 23일 샌 안토니오의 Gunter Hotel의 414번 방 임시 스튜디오에서 가졌던 이 역사적인 리코딩은 그가 유일하게 남겼던 두 번의 리코딩 세션 중 첫 번째 녹음 세션이자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그의 존재를 알릴 수 있었던 결정적인 녹음 세션이었다. 이때 그는 그의 자자곡 16곡을 녹음하였으며 각 곡마다 사이드 트랙을 남기기도 하였다. 



1937년 존슨은 다음 음반 녹음을 위해 텍사스주 달라스로 이동하게 되고 이 리코딩은 Brunswick Record Corporation에 의해 녹음되었다. (508 Park Avenue, Vitagraph Building 3층에 위치하였던 이 음반 회사는 후에 Warner Brothers에 의해 매입된다.) 1937년 7월 19일 그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녹음 세션이 진행되었고 이틀에 걸쳐 총 13곡을 녹음하였다. 그는 각곡 마다 사이드 트랙을 남겼으며 이는 우리가 한곡을 다른 장소 다른 시간대에 걸친 그의 연주를 비교해서 들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이 두 번의 녹음을 거쳐 총 29곡의 그의 전체 음반이 완성되었으며 이는 “Sweet Home Chicago” (1936),“Cross Road Blues” (1936), “Hellhound on My Trail” (1937), “Love in Vain” (1937) 총 4장의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존슨은 1938년 8월 16일 미시시피 그린우드 지역 근방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모호했던 인생처럼 죽음 또한 몇몇 다양한 가설들이 존재하며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이 믿고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존슨은 그가 꾀었던 여자의 남편에게 질투심을 사 어느 날 살인을 당했다는 게 가장 일반적인 정설이다. 당시 블루스 뮤지션이었던 Sonny Boy Williamson의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그린우드 근방 15마일 떨어진 마을에서 연주를 하며 지내던 그는 한 유부녀와 바람을 피우게 되었는데 이에 질투심이 많았던 그녀의 남편이 살해 의도로 존슨에게 독이 든 술병을 권하게 되었다. 이를 마시게 된 그는 저녁부터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3일 동안 서서히 악화되다가 경련과 심한 통증과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George Van Eps (조지 반 엡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