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먹을 술을 유럽에서 다 마신 것 같다.
파리에서는 애프럴 스프리츠(아페롤 스프리츠), 모히또, 시더를 스페인에서는 까바, 상그리아, 환타(알코올은 아니지만 즐겨 먹은 음료) 포르투갈에서는 와인을 즐겼다.
내가 평생 먹은 술을 갱신하도록 도움 준 J, W가 있지만 그녀들을 만나기 전에 나는 1년에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1980년대에 ‘비놀리아’라는 비누가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을 내세워 TV 광고 카피가 “아직도 그대로 네.”였다. 내 앞의 맥주잔이 비놀리아 같았다. 같이 마시는 것 같지만 입에 대고 넘기는 시늉만 하고 내려놓으니 맥주량은 처음과 마지막이 동일했다.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서 잔에 맥주를 받아놓는 것이 미안하고 아까워서 조금만 받기도 했다. 술을 하지 않는 이유는 한국의 술문화 때문이다. “너도 마셔.”라고 강요하는 문화가 싫다. 한번 마시기 시작하면 계속, 쭈욱 같이 들이켜야 하는 문화가 싫고 술 취하지 않고 싶다는 종교적 신념 때문에 마시지 않는다. 그렇지만 교회 오빠들의 아내들, 이제는 친구가 된 J,W 그녀들은 권하지 않았다. 먹을 만큼만 먹어도 되었다. 그녀들 덕분에 1년 동안의 총주량이 맥주 한 모금, 반 캔은 된다. 그렇게 늘린(?) 주량이지만 인생 통 들어서 마신 술 보다 유럽여행 70일 동안 넘긴 술이 더 많은 것 같다.
유럽은 수질이 좋지 않아서 발효시킨 술 문화가 발달했다. 그러다 보니 음식점의 물값과 술값이 비슷했다.
메뉴판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물 - 2유로
와인 및 알코올- 3유로
환타- 3유로.
(놀랍지 않은가? 당신의 선택은?)
음료를 반드시 주문하는 것이 유럽의 매너였기 때문에 마셔야 했다. 건강을 생각해서 물을 주문하거나 시원하고 달콤한 것이 먹고 싶으면 환타, 이도 저도 아니면 와인을 주문했다. 같은 가격이면 와인을 먹는 편이 가성비 갑이라는 생각에,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여행 중반부터는 거의 격일에 한 번은 마셨던 것 같다. 자주 접하니까 취향이라는 게 생기나 보다.
와인맛에 익숙해지면서 입맛에 맞는 와인을 안다. 살짝 달콤하거나 드라이한 맛이 좋았다.
와인보다는 까바를 더 좋아했고 시큼한 시더보다는 달달한 애프럴이 더 좋았다. 아름다운 빛깔이 유혹적이었다.
애프럴 때문에 웃지 못할 일이 생긴다. 파리에서 친구(클레오와 조카, 조카친구)들과 애프럴을 마시는데 나만 취한다. 술 초보자였으니 몸이 술에 놀랐던 것 같다. 유럽여행에서 처음으로 마신 술은 아니었지만 (영국의 런던스카이에서는 화이트 와인을 한잔 한다. ) 친구들을 기다리느라 야외에서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목이 말랐고 더웠기에 시원하고 달콤한 애프럴을 단숨에 넘겨버린다. 물도 안주도 없어서 무방비 상태로 취한다. 양 옆머리에 지잉~사인이 온다. 의자에서 일어서기가 힘들다는 걸 깨닫는다. 물이랑 같이 들이켜야 하는데 희석시키지 않았으니 빠른 시간 내에 애플러에 먹힌 거다. 거대한 애프럴 드럼통에 빠진 느낌이다. 헤엄쳐 나와야 했다. 의자에서 굴러 떨어지면 어쩌지? 정신을 차려야 해.
생각은 생각일 뿐 몸속에 퍼진 애프럴이 속삭였다
“넌 먹혔어.”
레스토랑의 즉흥연주 음악이 점점 커진다. 친구들은 고개를 까딱거리는데 나는 즐길 수가 없다. 공기를 떠도는 음표들이 알 수 없는 구름 속으로 나를 데려간다. 정신 차려!!
-아?!
갑자기 숙취해소에 꿀물이 좋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가방을 열고 조식에서 챙겨 온 꿀맛 나는 허니잼(Honey Jam)을 찾아 허겁지겁 들이마신다. 놀란 친구들은 배고프냐고 묻는다. 서툰 말과 바디랭키지로 술에 취했다고 설명한다. 겨우 한잔을 먹고 취했다고? 의아해하는 표정이다. 나의 몸상태가 친구들에게는 전달되지 않는다. 한 스푼의 잼을 먹었지만 숙취는 그대로이다. 물을 주문했지만 바쁜 웨이터는 잊었는지 한참이 지나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목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알코올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더 이상 술에 먹히면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정신을 잃고 나동그라질 것 같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외국 친구들에게 물을 부탁할 수가 없었다. 직접 물병을 가지러 갔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바짝 긴장하고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다. 고개를 천천히 돌린다. 빨리 돌리면 핑그르르 돈다. 구석구석 살피며 물병을 찾는다. 웨이터에게 양해를 구한다. 무례하다고 느꼈을 법한 행동인데도 나의 간곡한 표정을 보고 상태를 이해한 것 같았다. 물을 급히 수혈하고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세상에나! 귀에 음표가 들려오는구나. 재즈 흥을 조금씩 느낄 무렵, 클레어가 나가자고 제안한다. 술이 완전히 깨지 않아서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일어설 수 있었다! 구름에 둥실 뜬 기분으로 조심조심 걸었다. 파리의 센강, 밤산책을 시작한다.
클레어와 파리의 센강, 밤 산책은 링크에
그렇게 만난 애프럴을 그라나다에서 두 번째로 만난다. 잔이 어마어마하게 크다. 파리에서 마신 잔보다 큰, 성인의 두 주먹만 한 크기의 글라스에 한가득 담겨있다.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외친다.
내가 한 잔을 마시면 너희들은 돌을 보게 될 거야 (난 술이 약해서 돌처럼 잠든다)
나의 고백에 친구들은 왁자지껄 웃으며
Young을 프랭키 가방에 넣고 가자
고 말한다. 이옌은 그런 우리가 재밌다며 재현해 달라며 영상 촬영을 한다. (이옌이 영상촬영을 해준 덕분에 그라나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던 추억의 영상이 남았다._ )
흥겨운 마음으로 한 모금을 가득히 마신다. 그런 나를 보더니 에릭은 애프럴이 도수가 높다고 설명한다. 강렬한 색만큼이나 도수가 높았다(11도). 그제야 파리에서 왜 그렇게 빨리 취해버렸지 알았다.
-천천히 마셔 Slowly
에릭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한잔을 다 마시기도 전에 파리에서 처럼 몸이 휘청하리만큼 취해버린다. 알코올에 더 먹히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등 뒤로 담벼락이 보인다. 담벼락 위로 야경을 보는 몇 사람들이 보인다. 저기다. 저기에 가자.
더 취하기 전에 물 한잔을 마시고 바람을 쐴 겸 야경을 보러 담벼락을 향해 길을 나선다. 그라나다의 좁고 좁은 골목길을 걷는다. 다 마신 술병들이 길 가에 있다. 이 걸 기억하고 돌아와야지. 이정표를 모르면 친구들 곁으로 못 돌아갈지도 몰라. 골목길이 꼬불꼬불해서 구글맵으로 알기 어려웠다. 헨젤과 그레텔처럼 떨어뜨릴 빵가루도 돌멩이도 없어 멍한 눈이지만 길을 뚫어지게 살폈다. 길의 좌우 선들을 보고 사진을 찍듯이 관찰하며 조심스럽게 길을 돌고 돌았다. 겨우겨우 아까 본 담벼락에 도착한다. 어머나, 길치인 내가 길을 찾다니.
담 아래로 친구들이 보인다. 친구들을 소리쳐 부른다. 친구들은 손을 한 번씩 흔들고 각자의 수다에 빠진다. 활기차게 이야기하는 그들의 모습이 좋아서 사진을 찰칵, 한 컷 남긴다. 애프럴 때문에 (?) 갖는 이 여유로움이 너무 좋다. 팔짱 낀 팔꿈치를 낮은 담 위에 대고 고개를 쭈욱 내뻗으니 알바이신 지구의 새까만 밤이 눈앞에 펼쳐진다. 거대한 캔버스를 보는 듯하다. 수십 미터 반경 내에 흰 불빛들이 수십여 개가 빛을 뿌려댄다. 숨이 잠시 멎는다.
레스토랑에 자리 잡을 때 즐겼던 노을, 반대편 땅 능선을 비추던 애프럴 닮은 주홍빛줄기가 서서히 황금 빛을 데려왔었지. 하늘과 땅 경계선을 주위로 보라와 푸름이 짙게 내려 앉았다. 테이블 주위로 내려온 나뭇가지 사이로 짙푸른 하늘이, 나뭇가지마다 늘어진 전구가 빛나고 있었다. 그 빛들을 닮은 흰 빛들이 내 주위에, 알바이신 지구에 가득했다. 삶의 흔적들이 메아리치며 반짝였다.
노을이 지나간 밤풍경은 따스했다.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즐겁고 진지하게 했던가. 그렇게 밤이 우리 곁을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