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를 강의할 때 각 유형의 특징과 관련된 워크숍을 진행한다. J(판단형)과P(인식형)을 이해하는 활동으로 <여행계획 짜기>를 한다. 여행기간은 3박 4일, 가고 싶은 곳은 자유롭게, 비용은 무제한으로 제안하면 모두들 왁자지껄 떠들면서 즐겁게 여행계획표를 만든다. 만든 계획표들을 서로에게 공개하는 시간!
J들은 J의 계획표를 발표할 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잘 짜인 여행계획표를 보니 마음이 편안하단다.
P들이J 유형이 만든 여행계획표를 보며 소리친다.
-어차피 계획대로 못할 거면서~
-답답해요~
판단형(J)은 주어진 세상, 환경을 통제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계획 세우기를 좋아한다. J에게 계획표 만들기는 즐거운 놀이이다. 계획대로 못 할 수도 있지만 계획표를 적는 과정이 즐겁고 만들어 놓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미 다 한 것처럼 뿌듯해지는 마음의 효과가 긍정 혹은 부정적으로 있다. 계획된 일정을 달성한 것 같다는 안정감으로 시작할 일을 해낼 동력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나태해지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P가만든 계획표를 발표할 때
P들은 즉시 박수를 치면서
- 바로 저 거지!
탄호성을 지른다.
P의 계획표를 본 J들 반응은 의아한 표정으로
- 응? 이게 뭐예요?
인식형(P)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려는 태도를 갖고 있어서 계획이 없다. P에게계획이란 있으면 좋은 건 알지만 필요하지 않으니 굳이 만들지도, 적어 놓지도 않는다. 쓰지 않아도 꼭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알고 있기 때문에 해내기도 한다. 하지만 대학생 고학년이라면 달라진다. 무엇을 해놓아야 졸업하고 취업할 수 있는지 궁금하니까 <학년별 계획에 대한 특강>을 듣는다. 직장인이라면 이전에는 쓰지 않은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한다. 그래야 허둥지둥하지 않고 원활하게 업무를 진행할 수 있다. 멀티플레이어를 요구하는 기업의 생태가 매일 전쟁터와 같아서 P유형이어도 적어 놓아야 잊어버리지 않고 일할 수 있다.
자신의 유형대로만 세상을 살 수는 없다. 판단형 J인 나,
여행 중에 다가온 모든 일들은 계획이 아니라 마주하면서 해결이 되었다.
- 숙박, 기차 등 예약은 어떻게 했어요? 다 하고 갔어요?
- 아뇨. 1/2 정도만요. 대략 30일 정도만 예약하고 떠났어요. 각 도시를 얼마나 더 머물고 싶을지 직접 보면서 생각하고 싶었어요.
- 그렇게 대략적으로 계획을 세우면 여행을 가지 못할 것 같은데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단정 지어 생각하진 말아야 한다. 참고로질문한 사람은 ESTJ 유형이었다. 최근에 가족여행을 갔다 온 그의 계획표는 같은 J유형인 내가 봐도 숨이 막힌다.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계획이 꽉 차있었다. 그러니 전체 여행 일정 70일 중에서 30일만 숙박을 예약하고 떠나는 일은 그에게 너무 위험한 일이다. -아주 오래전에 유럽여행을 갔을 때는 나도 그랬다. 하루 종일 움직였고 가족의 의견을 묻기보다 보고 싶은 대로 일정을 짜고 빡빡하게 움직였다. 지금은 가족 여행을 갈 때는 이른 아침 일어나서 나 홀로의 시간을 갖고 가족들을 위해 여유롭게 여행지에 다니는 걸 보면 많이 변했다.-
그가 보기에는 위험한, 덜 된 계획표이지만 나름, 계획한 것이었다. 런던에 머무는 기간에 <노팅힐 카니발>이 있다는 걸 알고서 흥분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카니발을 보고 싶어서 노팅힐(영화 제목과 같은 노팅힐 지역이다.) 지역에 호스텔을 잡았지만 정작 카니발은 보지 못했다.
런던에서 만난 예랑 님은 <노팅힐 카니발>을 우연히 봤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무서웠다고 한다.
- 못 갔어도 괜찮아. 무서웠다잖아.
라고 스스로 합리화했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무섭다고 느끼는 것과는 다르니까 계획대로 하지 못 한 것이 아쉽긴 했다. 그래도 과거형으로 표현하는 건 당일에 돌아다닌 여행지가 좋았기 때문이다.
<노팅힐 축제로 이용불가>라는 표지판을 보고도 '축제'라는 글자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사실은 흔들렸다!) 과감하게 지나쳐 각종 여행지를 향해 갈 수 있었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아침의 빅벤을 만나고 감동스러운 셰익스피어 극장 투어, 로열 앨버트 홀 등 재밌는 곳들을 돌아다닌다. <노팅힐 카니발>에 가지 않아서 느낄 수 있었던 훌륭한 하루였다.
- 어머, 재즈페스티벌 기간과 겹치네?
파리의 재즈페스티벌이 있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는 공연장 근처에서 숙박했다. 하지만 공연을 보지 못했다. 파리를 돌아다니기에도 -예전에 4~5일을 있었지만 -일주일로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페스티벌을 본다는 건 파리를 돌아다니는 시간을 덜어내야 가능했는데 파리를 더 둘러보고 싶었다. 재즈페스티벌을 보는 대신 새 친구들을 사귀고,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수련과 사랑에 빠지고, 예배를 드리고, 선사이드 카페에서 음악공연에 흠뻑 빠졌으며, 퐁피두 센터에서 불어책을 -읽기(?)보다 그림책 감상-감상(ㅎㅎㅎ)하고 노을을 두 번이나 볼 수 있었다.
썬사이드 재즈 공연 후 보는 노을지는 하늘
처음에 세운 계획과 바꾼 셈이다. 직접 봐야 여행지를 알 수 있었다. 날씨, 도시가 품은 내음, 정겨운 소란스러움, 잔잔한 여유로움, 길바닥에 떨어진 은행의 아름다움 등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는지 가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다. 알지 못하는 지역의 예약을 미리 한다는 건 매력을 모르는 곳들을 지나칠 우려를 낳는 일이었다.
계획을 다 세우지 못해서 일정을 점검하느라 호스텔을 떠나지 못하는 시간도 있었다. 폰을 도난당하고 종이 지도를 보고 동선을 짜려니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 나중에 인터넷 사용이 가능해져서 다행이었다. - 여행을 통해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는 일들을 자주 접하며 크게 배운다.
여행지에서는 계획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거다.
여행에서의 가장 큰 수확물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계획 세우기에 너무 오랜 시간을 투자할 필요도 없고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속상할 이유도 없었다.
더 멋진 일이 있을 수 있으니까. 계획표를 사랑하는 나에게는 정말 큰 변화였다. 그리고
결국 모든 일들은 좋고 선하게 신에 의해 인도될 것을 아니까.
여행지에서 만난 친구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재밌게도
일본친구 30세 하루토는
- 다음 여행지에 대한 계획은 말이지, 이동 중에 이렇게~~~~
핸드폰으로 열심히 검색하는 시늉을 하며 웃어젖힌다.
그라나다에서 세비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약 3시간) 세비야에 대한 여행지 검색을 한다는 이야기였다.
퐁피두센터 관람 후 얻어걸린 멋진 풍경
나에게 계획이란 가능성에 가까이 가는 방법이었다. 프로젝트 성공을 시키려면 계획이 필요했고 계획을 세우기 위한 시간과 노력의 보상은 결과로 나왔다. 하지만 진척시키다 보면 계획대로 되지 않고 때로는 계획을 세우기 위한 시간과 노력할 시간에 그냥 진척했더라면 더 빠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