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토요일 밤11시 센강을 걷고 있다. 저 멀리 에펠탑이 노랗게 반짝이고 센강다리의 불빛들이 한밤의 데이트를 즐기는 시민들 위로 내린다. 이 늦은 시간에 파리의 밤을 즐기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이다.
- 믿기지 않아.
똑같은 말을 나중에 그라나다, 포르투에서도 중얼거린다.
센강을 따라 걷는 친구들은 프랑스 사람 클레어와 클레어의 조카, 조카의 친구(모로코)이다.
같은 시각
어젯밤에는 이들과 댄스파티장에서 광란의 밤을 즐겼다.
파리동역, 런던에서 매일 끙끙 되도록 한 유레일패스 문제가 한순간 마법처럼 풀리고 그 신나는 기운으로 재즈페스티벌을 찾아간다. 숙소를 정할 때 재즈페스티벌이 열린다는 사전정보를 입수해서 호스텔을선택했다.들뜬 마음으로 음악을 따라가서 만난 곳은 재즈 페스티벌이 아니라 댄스파티장이었다! 외부는 경호원들이 철저하고 삼엄하게 지키고 내부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도 배우기도 하는 독특한 곳이었다. 흥겨운 열기 속에 한열 한열씩 앞에서 뒤로 번갈아가며 상세하게 교습을 받았고 잘 추려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틀리면 좀 어때, 몸 개그 좋은데) 노력한 덕에 댄서에게 칭찬도 받는다. 함께 즐기고 싶어서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
며 인사를 건네지만 연결이 쉽지 않다. 혼자서도 충분히 즐거웠지만 일행이 고팠고 멀리서 눈에 들어온 클레어는 친절해 보였다.
20~30대의 사람들로 가득한 열기에서 클레어와 나는 이방인 같았다. 게다가 나는 동양인이 드문 데다 연령대가 높아서 더 이방인처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접근 시도에 성공! 조카와 조카 친구에게 파리를 구경시켜 주는 클레어를 그렇게 만난다. 그녀는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조카에게 새로운 문화를 보여주고 싶어서 늦은 시각에 춤을 출 수 있는 댄스파티장을 찾았단다. 누구보다 신나게 즐기는 모습에서 활력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졸업반이라는 조카와 조카의 친구, 클레어. 우리 네 사람은 춤추며 대화하며 가까워진다. 그러다 헤어질 시각이 된다.
- 우리 퐁피두 갈건대 내일 또 볼래?
그녀의 제안으로 시작한 일정.
오랑주리 미술관에 갈 생각이어서 새벽 1시까지만 놀았는데 그녀들은 새벽 3시까지 놀았단다. 부러워라.
먼저 퐁피두센터부터 들린다. 칸딘스키, 마티스, 피카소 등 미술시간에 배웠던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들도 보고 탁월한 전망을 퐁피두 센터에서 볼 수 있다니! 믿기지 않는다. 전망대에서 보이는 에펠탑도 근사하다. 퐁피두센터를 알차게 즐기고 펍으로, 재즈음악이 가득한 펍에서 애프럴에 먹혔다가(이야기는 나중에) 저녁을 먹으러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긴다.
- Young, 뭐 먹고 싶어?
- 갈레트. 시드, 숲 드 오뇽 …
다들 크게 웃는다. 프랑스사람보다 더 프랑스사람 같다며 전통음식을 찾아먹는다는 사실에 신기해한다. 한국에서 프랑스사람에게 뭐 먹고 싶냐고 물었는데
그가
- 국밥.
이런 대답을 듣는 것과 같은 느낌을 그녀들이 받았던 것 같다. 퐁피두 근처의
Creperie beaubourg로 간다.
- 너 행운아다. 네가 먹고 싶은 갈레트와 시드, 크레페까지 모든 걸 세트로 제공한대. 11유로! 저렴한데, 이걸 먹는 게 어때?
- 정말?
좋아서 눈과 입이 모두 쩍 벌어진다. 한입 베어 먹고는 입이 귀에 걸린다. 정말 운이 좋구나. 친구들도 만나고 맛집도 얻어걸리고. 맛있고 저렴해서 퐁피두도 볼 겸 이 식당에 내일 예배 후에 다시 올까? 생각한다.
푸른 밤하늘아래 운치 있게 밥을 먹고 일어나니 9시 40분. 토요일 밤, 센강을 향해 걸었다. 늦은 시간에는 상점 문을 닫는다고 들었는데 상점들이 운영을 하고 있어서 신기했다. 서울의 청계천 같은, 물론 매우 다르지만 비슷한 활기에 유람선도 흘러가고 영상에 담기지 않는 생생한 풍경에 할 말을 잃는다.
그곳에서 발견한 연인들의 자물쇠. 세계 어디에나 있는 사랑하는 마음. 나도 우리도 사랑하고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 광장에는 마르고 연약한 여성이 엄청난 성량으로 노래를 하고 한쪽에서는
결혼 피로연이 진행되었다. 신부에게 축복해 주는 것 같은 퍼포먼스. 신부로 보이는 사람이 부케꽃을 높이들고 서 있고 부케에 묶여 있는 리본이 10줄, 10명의 사람이 한 줄씩 들고 시계 방향으로 빙빙 돌아가며 리본을 신부에게 건네고 모든 리본이 신부 손에 들어가니 행사가 마무리된다. 지켜보는 사람들도 참여하는 사람들도 한마음이 되어 새로 탄생한 부부의 행복을 기원한다.
루브르박물관 앞의 빛나는 피라미드 주위로 흥에 겨운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밤풍경에 취해서 목소리가 높아지고 발걸음이 취한다.
-J’aime la vue. 잼므 라 뷔. 풍경을 좋아해. (맞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한다)
덤으로 에펠 야경까지 봐서 너무 행복한 순간이야. 난 행운아야.
나의 들뜬 표정에 클레어는 무척 만족해한다.
-Young, 가족들에게 보여주는 영상을 찍는 거야?
-응, 친구들 가족들에게 보여주는 거야.
클레어는 자유로운 영혼, 속박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20대 초반의 어린 조카와 조카 친구와도 잘 어울리는 그녀가 존경스러웠다. 8년의 나이차, 그녀처럼 나이 들고 싶었다.
-Young, 이거 해볼래? 하고 싶은 거, 가고 싶은 곳 있니?
타인에 대한 배려가 넘쳤던 따뜻한 클레어. 그녀가 대기업의 변호사라는 걸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클레어는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시간이 되면 언제든지 연락 줘. 우리 집으로 초대할게.
너무나 따뜻한 제안이 고마웠지만 파리일정이 이틀 밖에 남지 않아서 초대에 응하지 못하고 클레어와 만나지 못한다. 지금도 후회한다. 남편과 한국에 여행을 왔다며 혼자 다시 한국에 오고 싶다고 했는데 클레어가 한국에 오면 꼭 연락해 주길 바라면서 생각한다.
파리에 갔어. 친구가 되었어. 초대했는데 가지 않는다고? 너에게 도대체 뭐가 의미가 있는 거지?
이것저것 다 하고 싶어서 시간을 절약하다가
추억을 절약해 버렸다.
(폰도난으로 클레어의 연락처가 사라졌다. 그 후에 조카친구를 통해 알게 된 연락처로는 연결이 되지 않았다.....)
* 왜 이제야 쓰는 걸까.
나는 맛있는 음식, 제일 먹고 싶은 음식을 나중에 먹는다. 김치, 김구이 등을 먼저 먹고, 주메인 음식을 나중으로 미룬다. 제일 따듯하고 맛있는 때를 놓치는 셈인데 만족 지연이 주특기인가 보다. 오늘은 추리소설이 재밌어서 다 읽고 이 글을 썼으니까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미뤘다가 나중에 냠냠.
영화, 드라마를 보고 싶어도 해야 할 일을 하고 보상으로 본다든가 하는 습관이 있다. 함께 여서 행복했던 파리의 친구들 그리고 그라나다, 포르투의 친구들을 아직 글에 올리지 않은 걸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