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든 집과의 이별 시간
나에게 '집'은 출발점이다.
세상에 태어나 기억나는 우리 집은 옥상과 마당이 있는 작은 주택이었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에 운 좋게도 집이 있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가족의 따뜻한 온기 속에서 보호받으며 나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학창 시절 간간히 기숙사를 이용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여정 속의 '숙소'와 '집'은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집으로 돌아온다는 행위 자체로 바깥활동을 통해 쌓인 불안과 공허한 마음에 위안을 받았고, 자고 일어나면 뭐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솟아났다. 자연스레 집에 대한 애착이 생겨나서 큰 변화를 준비할 때마다 우선적으로 살게 될 집을 고려하게 되었다.
결혼 후 두 차례의 전세 집에 살다가 처음으로 집을 샀다. 상대적으로 커진 대출금의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전셋값과 매매값이 비슷한 시기였기에 우리 부부는 가성비가 좋은 쪽으로 선택을 하였다. 첫째 아들과 함께 좌충우돌 신혼 생활을 한 전셋집은 사진으로 남긴 추억이 되었고, 새로운 집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을 맞이하였다. 옮겨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결혼 후 처음으로 안정감을 느꼈고, 어린아이들의 많은 짐들을 방 한편에 몰아넣고 눈에 담고 있지 않아도 되는 것에 해방감을 느꼈다. 메르스, 코로나와 같은 바이러스가 위협할 때는 집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었다.
22층의 높이에서 가장 잘 보이는 것은 하늘이다. 파아란 하늘과 함께 마음도 맑아져서 기분 좋은 아침을 시작하고, 해가 지는 빨간 노을을 보면서 하루 종일 뜨거웠던 내 심장을 새삼 느끼며 하루를 마감한다.
깜깜해진 밤에는 불이 들어온 맞은편 아파트 옥상의 구조물을 바라보며 우리만 아는 이야기를 나눈다. 구조물의 형상이 긴 코를 늘어뜨린 코끼리를 닮아서 얼핏 코끼리 7마리가 행진하는 모습 같다. 맞은편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은 위를 올려다볼 일이 없을 테니 절대 알 수 없는 귀한 모습이다. 조명불이 들어오면 머리에 띠를 두르고 있는 것 같아 밤에 더욱 눈에 잘 띄는 코끼리가 우리 집을 지켜 주는 수호신 같다며 아이들과 웃음꽃을 피운다.
장난꾸러기 유치원생은 6학년이 되어 엄마의 발 사이즈를 따라잡았고, 꼬물꼬물 기어 다녔던 아이는 2학년이 되어 제법 의젓해졌다. 성실한 신랑은 오랫동안 바라던 직장으로 이직을 하였다. 집 안의 화목과 온기를 책임지고 있는 나는 사랑크기가 커지고 두꺼워졌다. 좋은 일만큼 시련도 많았지만 온전한 가족이 되기 위한 과정이었을 뿐이고 결과적으로 이만하면 잘 살고 있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인생사 그러하듯 일부러 계획하지 않았음에도 변화가 다시 진행되었다. 이직한 신랑 회사에서 저금리 주택대출을 신청할 수 있다는 소식에 이사 결심을 하게 되었다. 대출 금리가 높고 경기도 안 좋고 부동산 가격이 내려가고 있던 터라 매매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니 시세보다 높은 가격으로 내놓고 이사 갈 집을 천천히 알아보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동산에 내놓은 지 일주일도 안되어 집이 팔려 버렸다. 계약자도 우리 집의 숨은 진가를 알아챈 것일까? 우리 집을 마주 보고 있는 코끼리들이 마법을 부리는 건 아닐까? 그건 그렇고 발등에 불 떨어진 격으로 이사 갈 집을 백방으로 찾아보는데, 다행스럽게도 멀지 않은 곳에 아이들의 등교와 신랑의 출퇴근이 편한 조금 더 넓은 평수의 집을 계약하게 되었다. 집을 팔고, 집을 사는 일련의 과정 속에 전학 가야 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달래면서 대출을 신청하였다. 이사 갈 집의 새 단장을 위해 최소한의 공사 업체도 섭외해야 했다. 이제 이사까지 남은 기간은 한 달 남짓. 정들었던 집에서의 추억을 되새기고 감사함을 느끼며 아쉬움 없는 이별을 하려고 한다. 곧 펼쳐질 새로운 삶의 모습을 기대하며 이사를 준비한다.
에필로그 : 갑작스러운 이사 준비로 인하여 브런치글을 쓰지 못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초심으로 돌아가 정성스럽게 글짓기를 이어 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