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억 매출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작년 한 해 넷플릭스의 한국 매출이 5천억을 넘었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하지. 갈곳 없이 집콕 생활을 해야 하는 시국에 별 달리 무슨 낙이 있겠는가. 현실도피가 됐든, 여행을 할 수 없는 시기에 구독이란 이름으로 발급받은 또 다른 여권이라도 됐든 간에, 플랫폼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어떤 방식으로든 위로를 준다는 건 부인할 수가 없다.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특히 영화, 드라마 얘기는 더욱.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도, 시간도 없었으니까. 365일 송출되는 라디오 원고를 쓰는 일은 다른 모든 일에 쓸 수 있는 에너지를 앗아간다. 매일 30-40장의 원고를 쓰며 글감과 아이디어를 - 이제는 가장 증오하게 된 확장자 hwp. 한글 프로그램은 왜 그렇게 오류가 많은가, 왜 그렇게 자주 다운되는가. 저장되지 않고 날아간 원고를 되살리기 위해 얼마나 한숨을 쉬었던가. - 오직 마감을 위해 쏟아붓고 나면, 뇌세포의 남은 에너지를 박박 긁어모으더라도 '창의'라는 이름의 회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다. 그때 작동하는 회로는 '생존, 취식, 수면' 밖에 없다. 금방이라도 끊길 듯이 깜빡이며 돌아가는 회로에 기름을 탈탈 털어 넣어 불을 지피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잘 챙겨 먹고 편히 잘 수만 있다면야 다행이지만.
꾸준히 글을 쓰지 못하는 브런치에도, 그나마 꾸준히 유입되는 키워드는 '넷플릭스' 밖에 없다. 그렇게 '넷플릭스 추천작'을 검색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슬프다. 밖에 나갈 수 없고, 딱히 할 일도 없는 사람들의 유일한 소확행, 내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 수 없는 상황에서, 다른 이야기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일상이니까.
가만있자, 그동안 내가 뭘 봤더라. 다들 너무 잘 쓰는 내용 말고 아무 상관없는 잡썰을 풀면서 추천작을 그저 쭉 늘어놓아 본다. 오늘은 다행히, 그게 되는 에너지가 좀 남아있다. 그래서 한번 막 던져 보는 넷플릭스 추천작.
1. 브리저튼
재미있다. 영국식 영어 공부하는 셈 치고 봐도 너무 좋다. 7천 벌이나 마련했다는 옷만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조금 야해서 - 나 너무 닳고 늙었나 그렇게 야하게 느껴지지도 않지만- 이 작품을 '으른이들의 로망 드라마'라고 부르는 이유도 알겠고. 배우들의 연기가 좋고, 감정이입에 뒤틀어짐이 없어서 좋다. 왜 시즌 2 제작이 앞당겨졌는지도 공감이 되는 시리즈. 서사보다는 개개인의 감정에 몰입하게 되어 더 좋았다. 각자의 삶의 방식과 선택이 이해되도록 잘 쓰여서 만족스러웠던 작품. 클래식으로 재해석된 감각적인 팝 음악에 귀 기울여 보는 것도 큰 선물.
2. 더 서클
노골적이고 가볍다. 하지만 그 안에 생각해볼거리도 담겼다. 재미있다. 특히 가감 없이 터져 나오는 출연자들의 반응과 그들 행동 논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면 즐겁다. 역시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된다. 교과서 영어 말고 '날것 그대로의 영어'가 재미있다. 음성인식 시스템으로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설정 때문에 메신저 창으로 대화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그래서 영어 공부에 도움이 꽤 된다. 저런 표현, 저런 단어도 쓰는구나, 그걸 확인하는 과정이 나에겐 더 재미있게 다가온 작품. SNS(TMI 참고, 외국에서는 SNS라는 단어 잘 안 쓴다.)의 허상을 즐겁게 담고 있는 감각적 서바이벌 쇼. Don't judge a book by its cover. 가 매회 떠오르는 오디션 물 같지만, 누가 탈락하는가 안절부절하는 스트레스 전혀 안 받고 재밌게 볼 수 있다.
3. 엘리트들
대학교 때 전공이 스페인어라서 본다면 억지스럽지만, 아무튼 보았다. 서스펜스도 있고, 인생도 있고, 연민도 있다. 주인공들의 처한 상황에 감정이입이 자연스럽게 된다. 내가 하이틴 계열의 작품들을 좋아하나 싶기도 하지만 - [루머의 루머의 루머]라든지, 10대들은 아니지만 [범죄의 재구성] 등은 재미있게 본 작품들- 나이를 떠나서 각각의 인물이 품고 있는 서사가 매력적이고 공감이 된다. 20년도 지난 전공 언어를 보면서 20%도 그렇게 해석하지 못하지만, 아는 단어가 조금씩 나오는 걸 알아들으며 '와 기억력 쏴라 있네' 싶은 감정에 아주 간혹 빠지는 것은 오로지 나만의 즐거움.
4. 스위트 홈
나는 아직도 너무 궁금하다. 검색창에 이래저래 검색해도 나오지 않던데, 스위트(Sweet) 홈이라는 제목에 이응 (ㅇ)에 X 표시가 되어 있어서 '슅(Shit) 홈'이 된다는 게, 너무나 신박한 제목이라고 생각한 건 나뿐인가. 아무도 팔로우하지 않는 트위터에 그걸 써봤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 보면 첫째, 내가 잘못 생각했거나 둘째, 모두가 이미 알고 있거나, 마지막, 아무도 몰랐었는데 알게 됐어도 재미가 없거나. 뭐 그런 거 아닐까. 또 다른 예가 딱히 생각나지 않지만, 어찌 됐든 전 세계가 열광한 이유를 너무 잘 알겠는 작품. 언어유희를 좋아한다 나는. 스위트 홈이 슅 홈이 됐고, 그런 슅 홈이 유일하게 안전한 스위트 홈이라는 거, 너무 재밌지 않나. 아니야, 당신은 틀렸다 라는 제보를 기다린다.
5. 에밀리, 파리에 가다
무작정 밝은 에밀리의 좌충우돌 프랑스 정착 이야기. 프랑스 사람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는 재미도 있고, 그걸 조금씩 비틀어 놓은 위트도 꽤 웃기다. 덮어놓고 도전하면서, 아무리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적응하는 돌파구를 찾는 에밀리 덕에 묘한 힘도 얻는다. 말레이시아에 처음 갔을 때 나를 보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던 작품. 에밀리의 속사포 같은 대사, 에밀리를 둘러싼 주변 인물이 구사하는 영어를 들으면서 외국어 학습에 도움이 되는 지점이 많다. 코로나 시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에너지를 얻고 싶다면 추천.
6. 퀸스 갬빗
그냥 강추. 주인공의 인생 이야기에도 몰입이 되고, 체스라는 소재를 어떻게 화면 속에 이렇게 잘 구현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감동이다. 연기도 일품. 주인공 하나만 믿고 보아도 부족함이 없는 작품. 시간이 훅훅 간다. 영어 공부에도 꽤 도움이 된다. 체스 킹&퀸들의 불꽃 튀는 대사가 재미있기도 하고. 게임이 진행될 때마다 느껴지는 긴장감도 말도 못 한다. 어찌 됐건 주인공이 이기겠지만...이라고 가정하고 봐도 재미있다. 너어어어어어무나 매력적인 주인공임은 아마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터.
7. 소셜 딜레마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소셜미디어를 지우는 사람이 꽤 많다고 들었는데, 뭐 그렇게까지야. 다 알고 쓰는 거고, 모르지 않지만 각자 나름대로의 효용이 있으니까 매일 들여다 보는거 아니겠나 싶다. 매우 사실적이고 충격적이라서 입을 떡떡 벌리며(Jaw-dropping) 봤는데, 여운도 강하고, 메시지도 의미있어서 참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우리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소셜미디어에 대해 진지하게, 그러나 지루하지 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작품.
8. 줄리 앤 줄리아
방송원고에 이 작품을 넣어야 해서 봤던 영화. 기대하지 않고 봤지만 너무 좋았다. 천하제일의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정말이지 명불허전이다. 11년이나 된 영화라, 아날로그 냄새가 나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블로그만 봐도 느껴지는 레트로 갬성) 그래서 따뜻하고 좋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더욱 재미있었고, 결론이 뻔한 이야기 - Happily ever after라고 기대했지만 아니었던 - 와 달라서 더 좋았다. 나에게는 눈 씻고 찾으래야 찾을 수 없는 '꾸준함'을 실천한 - 500여 개가 넘는 요리를 1년 동안 만들고 블로그에 매일 기록한 기적적인 성실함- 주인공의 여정을 보다가 나와 너무 달라 잠시 우울해졌지만, 나도 언젠가는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환상을 잠깐 품게 됐다. - 4년 동안 브런치 160개 쓴 작가의 감상, 끝. -
9. 더 프롬
너무나 좋아하는 니콜 키드먼, 그리고 줄리 앤 줄리아의 주인공 메릴 스트립이 나와서 기대하며 기다렸다가 본 작품. 내용에 대한 단서를 하나도 모르고 봤기에, 꽤 흥미진진하게 감상했다. 21세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잘 그린 작품 아닌가 싶기도 하고. 뮤지컬 영화 다들 좋아라 하지 않나. 플롯은 좀 뻔하지만, 노래가 모두 좋고, 내용이 밝고, 흐름이 경쾌하다.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니콜 키드먼과 메릴 스트립만 봐도 만족스럽다. 라라랜드나 위대한 쇼맨 같은 뮤지컬 영화랑은 내용과 결이 다르니 호불호는 좀 있을 수도.
10. 굿모닝 에브리원
라디오 작가로 일하다 보니 궁금증이 생겨 보게 된 2010년 영화. 레이철 맥아담스를 좋아해서 즐겨봤다. 꿈을 좇는 사람의 이야기라 보고 나니 조금 기운도 생겼다. 지방 방송국 PD였던 베키가 어렵게 메이저 방송국에 취직해, 시청률 최저의 쇼에 심폐소생술을 하는 이야기.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새벽 4시에 알람 맞추고 일어나는 베키만 봐도 내 얘기 같아서 꽤 집중해서 본 영화. 그 어느 작품에서나 그렇듯 레이철 맥아담스는 한결같이 사랑스럽다.
아무리 집콕이 길어진다지만 그냥 조금 궁금해지는 것들만 둘러 보기에도 시간이 너무 없다. 그러니 하루 바삐, 열심히 더 파보자. 넷플릭스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