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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ARON Oct 09. 2017

명절이 꼭 평온할 필요는 없다

추석에 쓰는, 지극히 개인적인 단상

추석(秋夕), 음력 8월 15일. 1년 중 달이 가장 큰 만월을 맞이하는 날이다.


개인적으로 명절의 기억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 아버지는 종교적인 이유로 차례 지내는 것을 거부해 왔고, 그런 아버지를 조상을 섬기지 않는다며 강제로 차례상에 끌어다 앉히려는 할아버지 사이에 싸움이 없었을 리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할아버지께서는 유서깊은+아들 귀한 양반 집안의 독자로 유교정신이 어마어마하게 투철하신 분이셨다. 여하튼 그런 부모님의 영향으로, 나는 태어나서 지금껏 차례상을 단 한 번도 구경해본 적이 없다. 싸움을 피하기 위해 명절 당일 아침을 아예 할아버지 댁에서 보내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그렇지 못한다 하더라도 차례를 지낼 시간이 되면 부모님이 나를 어딘가에 숨겨놓으셨기 때문이다. 그 장소들은 작은방이나 담너머 우물 근처 등 다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추석은 가장 큰 명절로, 가족들이 오랜만에 모여 얼굴도 보고 사는 얘기도 하고 오손도손 평화롭게 보내는 날이라고는 하는데, 우리 집을 포함하여 정작 주변에서 이렇게 보내는 집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정작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흔한 추석의 이미지는 가족끼리 오랜만에 모여 그동안 미뤄왔던 현피를 한꺼번에 치르는 날이 아닐까.


나도 예외는 아니라서, 긴 추석 연휴에 비해 정말 짧은 시간 본가를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 부모님과의 충돌을 피할 수가 없었다. 흔히 이를 우리나라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라고들 생각하는 경향이 간혹 있는 것 같던데, 외국도 똑같다. 유교문화권인 중국이나 대만과 같은 동양은 물론이고, 서양도 크리스마스나 추수감사절과 같이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은 있으며, 오랜만에 모인 가족이 한 번씩 싸우는 것도 다 똑같더라. 서로 멀리 있을 때는 오히려 가끔 전화로 안부도 물어가며 화목해 보이는 가족이 왜 명절에 모이면 서로 싸우고 못 잡아먹어 안달인 모습들이 되는 걸까.


사람들이 언제 싸우는지 생각해보자. 그 규모가 크든 작든, 인류 역사 상 벌어진 충돌의 대부분은 서로의 가치관 간의 대립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종교나 이념 간의 대립은 그러한 개념이 생긴 이래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그 대립은 아직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충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찾기 힘들다. '요즘 것들은...'으로 시작하는 기성세대의 훈계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다음 세대도, 특정 정치성향을 가진 인터넷 커뮤니티에 열중하는 친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서로를 사랑하지만 종교 문제로 파혼하는 커플도 모두 이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일반적으로 명절에는 그동안 떨어져 살던 가족이 모이게 된다. 바꿔 말하면 다른 세대, 다른 성별,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짧든 길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세대, 성별, 지역이 다른데도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기에, 높은 확률로 서로 다른 가치관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 시간 동안 아무 일 없이 평화롭게 지나갔다면 정말 다행이지만, 그러기가 매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충돌과 대립은 서로 다른 가치관을 확인하는 바로 그 순간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에는 시간과 공간이 그렇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전혀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이 본인과 다른 정치성향을 가진 다른 사람들을 철천지 원수처럼 비난할 수도 있고, 불과 1초 전에 등장한 할아버지가 노약자석에 앉아있는 젊은 사람과 싸울 수도 있다.


이런 관점을 염두에 두고 다시 생각해보면, 명절은 다른 가치관들이 만나는 날, 그리고 그 가치관들이 충돌하는 날이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배우던 명절의 화기애애하고 행복한 가족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충돌과 대립을 피할 수 없는 날이다. 이쯤 되면 내가 무슨 명절 파괴자라도 되는 것 같지만, 나는 이러한 명절의 모습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명절에 벌어지는 (적당한 선에서의) 가치관 충돌이 결과적으로 우리 명절문화를 성숙시켜왔기 때문이다. 더 이상 우리만 일하기 싫다고 뒤집개를 집어던지며 싸운 며느리들이 없었더라면, 어른들의 청문회 같은 질문세례에 고통받던 자식 세대가 명절 잔소리 메뉴판을 만들어가며 대항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명절에 받는 불합리한 고통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이는 비단 우리 명절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누군가 일으킨 충돌과 투쟁에 의해 얻게 된 것이기에.



그러니까, 명절은 평온하지 않아도 좋다. 서로 충돌하고 부딪히며 우리의, 우리 사회의 의식을 한 단계 성숙해나가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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