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연년세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효진 Nov 25. 2020

2020년 결산 (2)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동네에는 작은 피아노 학원이 많다. 이사 온 지 1년 가까이 되었는데 집 근처를 오며 가며 ‘피아노를 한번 배워볼까?’ 생각만 했다. 하는 일과 전혀 상관없는 취미를 가져보고 싶다는 이유가 하나, 새롭게 뭔가를 배워보고 싶다는 이유가 또 하나였다. 과감함이나 유연함을 잃은대로 잃은 어른이다 보니 어린이들만이 가득한 피아노 학원에 어느 날 갑자기 불쑥 찾아가 레슨을 받기로 결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어서, 피아노를 배우겠다는 결심은 생각만으로 그치고 있었다. 번아웃이 오기 전까지는.


번아웃... 두어 달 전의 내 상태를 설명하자면 번아웃이라는 단어가 딱 맞는데, 그것을 인정하게 된 지금까지도 번아웃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려고 하면 어딘가 민망하다. 약간 눈을 흐리며 먼 산을 바라보게 된다. 정말 꼼짝 하지 못할 정도가 돼야 번아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예전에는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가 번아웃이라는데, 그냥 일이 힘들다는 걸 과장되게 느끼는 거 아닐까?’라고 조금 삐딱하게 생각했었던 것을 먼저 고백한다. 기자로 일하며 밤샘 마감을 할 때도, 지역을 시 단위로 옮겨야 하는 이사와 회사 일을 병행하면서도 힘들고 피곤하긴 하지만 번아웃이라는 단어는 떠올린 적 없던 사람인 내가, 현대인의 피로와 고단함을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자기가 지친 걸 모르는 사람은 당연히 남이 소진되는 것도 볼 줄 모른다. 너그러움이나 공감 능력을 잃는다. 누군가 힘들다고 하면 다 힘든데 너만 왜 그걸 굳이 입 밖으로 꺼내냐고 말하게 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정도까지 형편없는 인간이 되기 전에 나는 나에게 번아웃이 왔다는 걸 인정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가만히 있으면 침울하고, 가만히 놔두면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잠자는 데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난 김에 네이버 지식백과를 검색해보니 번아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극도의 피로를 느끼고 이로 인해 무기력증, 자기혐오, 직무 거부 등에 빠지는 증상을 말한다.”


그랬다.


번아웃이라는 걸 알고 나서 용기를 내어 피아노 학원에 찾아가 바로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배울 정도의 의욕이 있다면 번아웃이 아닌 걸까?) 어린이들이 많은 동네 특성상 성인 레슨을 해주는 학원이 많지는 않았는데, 포기할 때 즈음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어본 곳에서 기적적으로 성인도 받는다고 했다. 주 5일, 하루에 한 시간씩,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2시부터 5시 타임에는 어린이들이 몰리니까 그때만 빼고. 초등학생 때 이후로 처음 피아노를 치게 됐으니 악보를 봐도 왼손은 어쩔 줄을 몰랐고, 테스트 결과 나는 바이엘 2권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요즘은 바이엘 상, 하가 아니라 바이엘 1권부터 4권까지 있다는 사실에 나도 친구들도 놀란 첫 날을 지나, 나는 거의 매일 피아노를 치러 다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꼬질꼬질한 슬리퍼를 신고 체온을 스스로 재고 이름을 써넣고 손 소독을 마치고 바이엘 책을 챙겨 ‘쇼팽’ ‘바흐’ 같은 이름이 붙어있는 작은 방에 들어가 피아노 앞에 앉으면 아무리 단순한 음을 치더라도 마음이 안정됐다. 수영을 배울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호흡하랴 팔 돌리랴 다리 차랴 바빠서 잡생각을 할 틈이라고는 도무지 없었던 수영처럼, 피아노 역시 음표를 보고 굳은 손가락을 움직여 정확히 건반을 누르기 바빠 일 생각 같은 것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학원에 나가는 한, 피아노 실력은 아주 조금씩이지만 꼬박꼬박 늘었다. 이제는 왼손으로 쳐야 하는 음표도 (거의) 정확히 볼 줄 안다.


피아노를 배운 지 약 한 달이 흐른 오늘, 바이엘 2권과 3권을 순서대로 떼고 드디어 4권에 돌입했다. 세상에, 내가 피아노 영재라니? 신나게 ‘어린이 왈츠’를 치고, ‘하마의 행진’도 치고, 내일부터 배우게 될 페이지를 살짝 넘겨보니 ‘오, 필승 코리아!’가 기다리고 있어서 조금 심란하지만 아무튼 내일은 내일의 바이엘이 있고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체르니도 있을 것이다. 아직은 옆방에서 울려 퍼지는 피아노 선배님들의 웅장하고 화려한 연주를 들으며 기가 죽는 신입이지만 언젠가 다가올 체르니 100, 30, 40, 50까지 오래오래 피아노를 치고 싶다. 그러고 보니 번아웃은 이미 다 잊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2020년 결산 (1) 두 번째 책을 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