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일을 그만두게 됐다는 글을 쓰자, 누군가 인스타그램 다이렉트 메시지로 글 한 편을 보내주었다. <뉴턴의 아틀리에>라는 책의 한 챕터 중 일부로, 거기에는 라파엘 로자노헤머의 전시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로자노헤머는 한 논문의 내용을 인체에 무해한 금분에 나노 인쇄하여 전시장에 뿌렸다고 한다.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들이마신 금분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의 호흡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또 세상에 계속해서 퍼져나가고 있을 거라는 것이 그 글의 요지였다. 글을 보내준 사람은 내게 말했다. “회사와 효진 님이 만들어온 가치는 어떻게든 세상에 남아서 돌아다니고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지난달부터 나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읽을 수 없다면’이라는 제목의 북클럽을 만들어서 운영했다. 여성 작가들의 훌륭한 SF 소설을 빛의 속도로 빠르게 읽지는 못하더라도 함께 차근차근 읽어나가 보자는 의미로 내가 만든 이 클럽에서 천선란 작가의 <어떤 물질의 사랑>과 김보영 작가의 <얼마나 닮았는가>를 읽었다. 북클럽 멤버들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이는(당연히 줌으로!) 시간을 앞두고 <얼마나 닮았는가>를 허겁지겁 읽다가, 로자노헤머의 전시에 관한 글을 떠올리게 만드는 부분에 북마크를 붙였다.
“내가 만나고 인사하고, 잠시 스쳐 만나고 악수를 하는 사람에게서 나를 봐. 우리가 손을 잡을 때, 내 손바닥에서 증발한 분자가 손바닥을 통해 상대방에게 전해지고 그 사람의 일부가 되는 것을 봐.”
(‘엄마는 초능력이 있어’ 중)
줌 모임을 하며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끝나면 자신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까 봐 걱정된다고 말하는 북클럽 멤버에게, 나는 짐짓 의연한 척을 하며 이 문장을 읽어주었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아도 분명 뭔가가 변했을 거예요,라고 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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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내게 자주 위로가 된 것은 여성 작가들의 SF 소설이었다. 지난해 읽고 또 읽었던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도 무척 좋았지만(그리고 여전히 가장 사랑하는 SF 소설집이지만), SF 소설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올해는 이런 작품에 자꾸만 기대고 싶었다. 세상이 계속 나빠지기만 한다는 생각이 들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 무력감을 떨쳐내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자면 현실에 너무 가까이 발붙인 이야기보다 현실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는 이야기, 미래로 시점을 이동해서도 변하지 않을 인간의 무언가를 탐구하는 이야기가 절실했다. 적어도 세상을 덜 나쁘게는 만들 수 있다고, 인간이 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누군가 말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천선란이, 정세랑이, 김초엽이, 김보영이 그렇게 말해주었다. 이들이 쓴 작품을 통해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 특히 여성의 - 사랑이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는지 확인했고, 많이 감동하고 많이 안심할 수 있었다. SF는 멸망을 전제하는 장르가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고 믿는 장르라는 걸 알게 됐다.
그건 동시에, 이들의 소설을 읽으며 자주 멈추고 고개를 들고 생각에 빠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울고 싶은 날에는 울기도 했다. 다른 해보다 우는 날이 많아져서 그냥 눈물이 많아진 건 아닐까 조금 의심해보기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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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물질의 사랑>과 <얼마나 닮았는가>로 멤버들과 온라인 모임을 진행하는 동안에는 많이 웃었다. (우리는 제목을 무리하게 줄여서 <어물사>와 <얼닮>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서로 같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는 데 놀라기도 하고, 책을 읽다 떠올린 누군가의 엄마 이야기에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과학 용어 때문에 책장을 빨리 넘길 수 없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나를 포함해 총 아홉 명의 여성들이 지식도 정보도 남지 않을 모임에 기꺼이 시간을 쓰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 천선란 작가에 따르면 “모든 대화는 초능력”이라는데, 모두가 최대치의 초능력을 쓰고 있었다.
바쁘고 힘들고 무기력한 와중에도 좋은 소설을 찾게 된다는 것이, 나를 멈추게 한 문장에 밑줄을 긋고 의미를 곱씹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 언제나 이상하고 신기하다. 인간이 실용적이고 완전히 현실과 닮아있는 무언가만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늘 나를 뭉클하게 만든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보고 듣고 생각해도 인간에 대해 내가 제대로 아는 것은 결국 거의 없을 거라는 사실이, 그래서 계속 고민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솔직히 말해 정말 골치 아프고... 너무 좋다. 다들 그렇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