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로스> (2004)
왕가위의 2004년작 <에로스>는 왕가위와 스티븐 소더버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다. 원래는 세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지만, 홍콩 영화 클럽이기에 왕가위 편만 따로 담아낸 에로스: 왕가위 특별전을 봤다.
황궁 여관에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장첸(장 역)의 얼굴로 시작한다. 그는 계속해서 누군가를 응시하며 말을 걸고, 그들이 나눴던 추억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과거 회상 장면이 바로 시작된다. 뜨거운 여름, 장은 공리(후아 역)의 집에 방문한다. 그는 진 선생님의 부름으로 후아 집에 찾아가는데, 재단사가 꿈이다. 후아는 그를 보자마자 “많은 여자를 상대해야 할 텐데”라며 그의 순결을 처음으로 빼앗는 사람이 된다.
이후 재단사인 그는 후아의 옷을 맡는 재단사가 돼 계속해서 후아를 찾아간다. 그런데 갈 때마다 그를 찾아온 남자들이 그에게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듣는다.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게 된 후아는 찾아온 장에게 옷을 맡기지 않는다. 계속해서 빈손으로 돌아가자 장의 스승은 반년째 돈 대주는 놈도 없는데 씀씀이는 헤프다며, 가망이 없다고 돈을 받으라고 조언한다.
왕가위 영화는 누가 봐도 그의 영화 같다. 영화감독에게 이런 말보다 더한 찬사가 있을까. 이 영화도 그렇다. 후아의 집 인테리어(주로 장이 기다릴 때 뒷모습과 함께 나오는 장면), 거울을 통해 보여주는 남녀 주인공의 거리감, 손짓만으로 고조시키는 영화의 긴장감 등이 그렇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The hand'라는 점을 감생각한다면 손짓 하나만으로 에로틱한 분위기를 표현해내는 능력이 특출나다. 특히 미장센도 너무나 왕가위다운 포인트였는데, 후아의 씀씀이와 캐릭터를 보여주는 화려한 벽지와 꽃병, 그러나 시들어있는, 후아의 손짓 하나에 반응하는 장의 표정 연기가 인상적이다.
왕가위의 아이덴티티라고도 할 수 있는 클로즈업씬, 직접적으로 야한 장면은 없지만 드레스나 손을 활용해 에로틱한 장면을 극대화해 보여주는 점들이 역시 왕가위 영화라고 생각하게 하는 또 다른 이유였다. 그러나 역시 영화를 완성하는 건 배우의 연기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쓸쓸한 황궁 여관에서 홀로 울음을 삼켰던 공리의 연기는 오래도록 못 잊을 것 같다. 또한, 아쉬운 감정을 표정으로 완벽하게 보여주는 장첸의 연기도 인상 깊었다. 왕가위의 영화는 언제나 표정으로 대화한다. 그 점이 이 영화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뒤로 갈수록 후아라는 인물이 가진 씁쓸함을 이해하게 되는데, 몸을 파는 직업을 가진 그가 고객이 떨어지자 황궁 여관에서 홀로 울며 병들어 기침하는 모습이 누구보다 안타깝다. 특히, 가장 누추해 보이고 초라해 보이는 곳인 여관의 이름이 ‘황궁’인 것에서 오는 괴리감은 후아라는 인물을 더욱 안타깝게 만든다. 그 여관은 후아가 자신의 몸을 팔아 돈을 챙기는 곳이므로, 장의 입장에서 가장 안타까운 공간이기도 하다.
이 두 인물은 시종일관 관객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특히 두 사람이 직접 마주 보는 대화 장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후아는 “결혼하자”고 말하고, 장은 “네”라고 하는데도 둘은 진정성 있게 대화하는 듯싶다가도 이뤄질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암시하듯 다음의 대답을 넘어간다. 또, 장이 후아에게 키스를 하려 하자 그때 당시 홍콩에 널리 퍼진 사스 때문에 거부하는 후아의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과 목, 얼굴에 키스를 퍼붓는 장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 그 사이에서 고뇌하고 고민하는 두 남녀. 그들의 사랑을 재단사와 옷으로 표현하는 추상과 비유의 영화. 왕가위 감독의 에로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