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와 데미언 셔젤의 <라라랜드>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영화 <라라랜드>는 노래와 영상미가 그 사랑에 한몫했지만 스토리와 대사에 조금 더 점수를 주고 싶다. 모두가 간절히 원했지만 그렇게 흘러가지 못한 결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응원할 거라는 무언의 눈빛. 미아가 Sep’s에 가서 세바스찬과 나눈 그 눈빛이 라라랜드를 오랫동안 기억하게 한다. 그리고 예전에 사랑했던 연인이 다시 만나 무언의 눈빛을 나누는 장면은 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에도 나온다.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과 결국은 다른 길을 걸어야만 하는 도로에서 그들은 서로 멀어진다. 여전히 니콜은 찰리의 신발 끈을 묶어주지만 그들의 사랑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셈이다.
두 영화는 실로 닮았다. 배경이 LA이라는 점뿐만이 아니라 사소한 대사가 중요한 사건의 발단이 된다는 점이 닮았다. 결혼 이야기는 오프닝 장면부터 강렬하다. "니콜은 ~하다, 찰리는 ~하다"와 같은 수많은 형용사들이 난무하며 부부 사이인 니콜과 찰리는 서로의 장점을 읊는다. 사소한 에피소드들이 장점으로 인해 보여진다. 후에 니콜이 찰리에게 이혼 소송을 걸기 전에 발생한 아주 사소한 일이 법정에서 에피소드로 쓰인다. 평범했던 대화, 의미 없던 일상적인 말이 그들에게 되려 무기가 된 것이다. 그들은 한마디 말도 없이 변호사들이 설전을 벌이지만 고개 숙인 그들의 모습은 이미 서로의 간격을 나타내듯 멀어진 표정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듯 라라랜드는 새드엔딩이다. 그리고 그들이 헤어진 결정적인 이유는 꿈에 대한 서로의 환경 차이,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벌어진 감정의 간격이었다. 결국 세바스찬과 미아는 연결되지 않았고, 그들은 서로가 원했던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 결혼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결국 니콜과 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같은 집에서 살지만 어느새 격차가 벌어진 환경의 차이로 재결합하지 않는다. 찰리가 니콜이 쓴 자신의 장점에 대한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리고,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니콜도 결국 돌아선다.
둘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결혼을 아직 하지 않았지만 우리 부모님을 24년 동안 지켜보며 느낀 것으로는 ‘이혼’이라는 단어는 쉽게 뱉을 수 없으며 부부가 ‘사랑’만으로는 오래 이어가기 힘들다는 점, 자식이라는 끈으로 서로를 버텨오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우리 부모님은 아직도 사랑하시고, 매일 통화를 나누신다. 하지만 조금 더 깊숙이,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그들이 신혼 때처럼 사랑하지 않음을 알고 있고 서로에게 화가 날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자식이라는 끈으로 극복해나가는 게 아닌가 싶었다. 매일매일을 열렬한 사랑의 감정으로 살아가는 부부는 매우 드물 테니까. 니콜과 찰리도 역시 그렇다. 헨리 때문에 서로에게 더 양보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헨리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러지 말자는 주문을 스스로 몇 백번은 되뇌었겠지.
영화는 니콜과 찰리가 부부 상담을 받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둘이 같이 속한 극단의 뒤풀이에서 그들은 서로가 끝이 보임을 예견한다. 뒤풀이 도중 무대 연출가가 찰리에게 무언가 속삭인다. 찰리와 니콜은 집에 도착한 후 찰리는 자신이 적은 노트를 만지작거린다. 니콜은 "오늘 내 연기에 대해 할 말 있지 않아?"라고 물어본다. 찰리는 "아니? 없어."라고 하지만 "솔직히 있어. 그렇지만 말 안 해도 돼."라고 말한다. 니콜은 "말 안 하면 잠도 못 잘 거면서."라고 한다. 찰리는 두 개의 피드백을 준다. 그리고 니콜은 "잘 자"라고 한 후 방에 와서 울며 잠든다.
이후 니콜은 제안받은 영화 파일럿 촬영을 위해 LA로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작가가 이혼을 생각 중이라면 자신이 고용했던 노라라는 변호사를 만나라고 권한다. 니콜은 노라를 만나고 노라에게 자신이 왜 찰리가 싫어졌는지 말한다. 그녀는 찰리를 보고 2초 만에 사랑에 빠졌다. 그래서 LA에서 만났던 그들은 찰리의 바램으로 뉴욕에서 극단 생활을 하게 됐고, 젊을 때 라이징 스타였던 자신의 명성을 이용하여 연극을 키웠다. 그리고 찰리는 감독으로서 점점 성공하지만, 자신은 배우로서 점점 퇴화함을 느낀다. 결정적으로 니콜은 부부로서 찰리와 모든 것을 같이 나누고 성장하고 싶어 하지만 찰리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우월감을 어느 정도 느끼고 싶어 했다. 그때 니콜은 자신이 찰리에게 ‘독립된 인격체’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찰리가 무대 연출가와 잔 것도 같다고 느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샌가 변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타인’이라는 공포가 엄습한다. 특히 부부관계에서 그렇다. 몇 년, 몇십 년을 같이 살아왔는데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면? 지금까지 우리는 같은 대화를 한 게 맞을까, 같은 곳을 바라보며 온 게 맞을까. 즉 자신에게 모든 의문을 던질 것이다. 타인에 대한 질타가 아닌 왜 나는 뭐든지 의존하려 했지, 찰리처럼 독단적으로 생각하지 못했을까 등등.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한 장면만 꼽으라면 양육권을 위해 구한 찰리의 LA 집에서 니콜과 싸우는 장면을 택할 것이다. 니콜과 찰리는 처음에는 싸울 의도가 없었지만 결국 서로에게 폭언을 붓는다. 이혼 변호사가 개입함으로부터 그들에게 생긴 균열과 싸움. 그것이 서로의 감정을 폭발하게 만들었다. 싸움이 고조되고 찰리는 니콜에게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어. 심각한 병에 걸린다든지, 길 가다가 차에 치여버렸으면 좋겠어.”라고 소리 지른다. 찰리는 이후 자신이 무슨 말을 뱉었는지 무릎 꿇고 오열하고, 니콜은 위로해준다. 이 장면에서 둘의 연기가 소름 돋았고, 싸우는 대화 내용이 정말 평범해 보였다. 부부라면 한 번씩은 마음속에 담아둔 응어리를 풀 때 나올 것 같은 말들.
찰리에게 아빠로서, 배우자로서 잘못한 점을 묻는다면 니콜과 각방 쓴 이후로 니콜이 잠자리를 거부했다며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가졌다는 점이다. 사실 영화 속 찰리는 굉장히 다정한 아빠로 나오지만 사실은 헨리와 잘 못 놀아주는 아빠이기도 하다. 헨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한 가지 안타까웠던 것이 바로 찰리의 배경이었다. 그들이 이혼하기까지 무수히 복합적인 이야기, 감정들이 있었을 텐데 무대 연출자와 가진 잠자리가 가장 커 보였기 때문이다. 만약 찰리에게 이 배경이 없었다면, 그들은 다시 살 수 있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니콜은 반면 자신의 커리어를 열심히 쌓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엄마로 비친다. 헨리와 잘 놀아주고, 헨리가 좋아하는 것을 안다. 니콜은 더불어 이혼 후 배우가 아닌 감독으로도 성공하는 삶을 산다.
이 영화를 보고 지독히 현실적인 결혼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을 느꼈다. 좋다, 기쁘다, 행복해 보인다, 슬프다, 단편적인 감정들이 아닌 내 마음속에 있는 묵직한 감정들 여러 개 말이다. 결혼 가정에서 살고 있는 나는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언제나 환상으로 생각해왔고 결혼 이야기보다는 결혼해서 어떻게 살아야지.라는 미래지향적 사고를 해왔다. 신혼집은 몇 평 정도가 좋겠고, 어떤 인테리어로, 아이는 갖지 않는 게 좋겠다 등등.
영화를 본 뒤 결혼 이야기는 그런 것이 아니구나. 결혼 후에 부부의 마음, 모습, 생각들이 어떻게 변하는지가 결혼 이야기구나. 인간은 계속해서 성장한다. 결혼했다고 성장이 끝난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엄마로서, 아빠로서 성장을 계속한다. 그리고 결혼이 시작하고, 이혼을 생각하고, 이혼 소송을 실행하는 것까지가 결혼 이야기구나. 결혼에는 시작과 끝이 있구나. 이혼이 끝이 아닌 결혼의 끝.
영화 속 노라가 니콜에게 조언하는 장면이 있다. 부부 관찰사(?)로부터의 인터뷰를 미리 진행해보는 것이었는데, “술은 자주 드시나요?”라는 질문에 니콜은 솔직하게 답변한다. 밥 먹을 때 한 잔, 두 잔, 병을 나눠 마실 때도 있고요. “마약 하시나요?”라는 질문에도 “대학 다닐 때 해봤죠. 아, 공연 끝나고 한 번.” 노라는 그때 절대 솔직하게 말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좋은 아빠’라는 말은 이 세상에 나온 지 30년 밖에 안됐다며 아빠는 언제나 무뚝뚝하고 엄격하고 근엄한 이미지다. 그래서 애 보는 게 서툴러도 사람들은 그러려니 한다. 그러나 엄마가 서투른 건 사람들이 절대 인정하지 못한다. 엄마도 처음 엄마를 해보는 것일 텐데 엄마는 무조건 완벽해야 한다.
이 대사가 아주 공감 갔다. 누군가의 첫 엄마로서 아이를 전문적으로 키워야 인정받는 현실이 한국이나 미국이나 똑같구나. 육아는 이미 여성의 전유물로 남아있다는 게 이 대사로부터 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나아가 내가 좋아하는 티비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기획의도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왜 <슈퍼우먼이 돌아왔다>는 없을까. 그것은 모든 엄마들이 아이를 잘 돌보기 때문에(으레 엄마라면 능숙히 아이를 잘 돌봐야 할 것 같다는 착각이나 고정관념이 여전하기 때문 아닐까?) 재미있는 예능 프로그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서툰 아빠들이 노력하는 이야기를 담은 것이 예능 프로가 된다(지금은 남성분들도 아이를 잘 돌볼 수 있는 인식이 예전보다는 많아져서 이야기가 많이 달라졌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두 성별에게 기대하는 기대치는 다를 것이다). 씁쓸하면서도 슬펐다. 사회가 요구하는 엄마, 아빠의 인식부터 달라져야 우리나라에서도 육아에 대한 책임감이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북유럽 ‘라테 파파’들이 대단하다는 것 아닐까.
결혼은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 관계를 맺음'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서로가 이전과는 다른 관계에 놓이면서 이전보다 더 좋은 것들도 많겠지만, 감내해야 할 것들도 많지 않을까. 무조건적으로 좋은 이야기만 담는 것이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 그 깊은 감정을 꺼내 읊는 영화였다. 결혼을 생각 중인 커플이라면 한 번쯤 보고 이야기를 나눠보았으면 좋겠다. 결혼은 인생에서 또 다른 단계의 시작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