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융 Oct 23. 2017

태양을 안는다

내가 지내던 그곳은 주소가 없었다. 인적과 떨어진 산 한가운데 지어진 집인지라 우체부도 주소를 몰라 찾아 올 수가 없었다. 따라서 전기며 물세의 고지서도 집에서 오분을 차로 달려야만 보이는 큰 나무에 꽂혀 있었다. 집은 전기 계량기와도 차로 달려 십분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전깃줄을 통해 집으로 전기가 통해 오는 중간에 정체를 모를 누군가 전기를 자꾸 끌어다 써서, 집에 도착하는 전기량은 아주 적었다. 방 안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고, 어느 때는 집 전체에 전기가 나갈 때도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다른 것보다도 물이 문제였다. 지하수를 끌어다 쓰는 펌프는 전기가 없으면 작동되지 않았고, 그게 작동되지 않을 때에 나는 물도 없이 짧게는 몇 시간에서 길게는 며칠까지 버텨야 했다.


 꼭 한 달에 한두 번씩은 그런 일이 발생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나는 기약 없이 전기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 물 부족으로 샤워는커녕 세수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건 적응의 동물이라고, 물이 없으면 없는 대로, 전기가 없으면 없는 대로 살게 된다. 떨어진 음식도 씻기는 커녕 그냥 후후 불어서 먹게 되고, 눈에 묻은 눈꼽은 그저 슥슥 닦아내면 그만이다. 가끔은 식수가 없어 빗물을 받아 식수로 써야 했다. 처음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는 발을 동동 구르며 전기가 고쳐지기만을 기다렸지만, 점차 이렇게 전기가 끊기는 횟수가 잦아지니 불안해하며 불평하는 대신에 나는 가진 것으로 뭘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더 집중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자연 속의 샤워가 시작된 것이다. 


내가 말하는 이 자연 속의 샤워란, 산속에서 발가벗고 빗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나는 비가 내리면, 자연이 소화할 수 있는 꽃이며 식물로 만든 비누 하나를 손에 쥐고 내리는 비 아래서 발가벗고 몸을 씻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마치 나 자신이 이 대자연의 일부분이라도 된 것처럼 느꼈다. 잊고 있었던 그 사실이, 억수 같은 비를 맞으며 나를 씻어낼 때면 온몸으로 체감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시 구절처럼, 마치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씻어내는 것 만 같았다. 그럴 때면, 나는 웃기게도 나 자신이 마치 산속의 요정처럼 느꼈다. 내 몸은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내 마음만큼은 바로 그 순간 내 눈 앞에 보이는 이 초록들 사이를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웃고 있었다. 지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 시원하고 충만한 기분이 느껴진다. 지금도 떨어지던 빗물 한 방울 한 방울을 내 몸이 기억하고 있다.



 수많은 종교에서, 사회에서 우리 몸을 죄악시하는 것을 나는 본다. 그리고 이 모두가 남녀의 결합, 몸을 섞는 행위에 대한 오해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단지 쾌락을 위한 것뿐만이 아니다. "당신이 사랑을 나누는 방법은 당신이 당신의 신과 함께하는 방법"이라는 루미의 시 한 구절이 있다. 실제로 누군가와 진심으로 사랑을 나눌 때면, 나는 내가 우리를 초월하는 어떤 존재와 함께 하고 있다고 느꼈다. 사랑을 나누는 행위는 단순히 쾌락을 쫓는 행위가 될 수도 있지만, 영혼을 울리는 기도가 될 수도 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사랑을 나누는 행위로부터 우리들의 몸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서로의 생명과 만나곤 한다. 

 이 온 지구가 그 안에 존재하는 생명을 품는 하나의 자궁인 것처럼, 우리의 피부와 근육, 신체 부위들도 우리 생명을 소중하게 품고 있는 태반이며 자궁이다. 왜 우리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라나면서 불과 몇 년 사이 급격히 우리의 벌거벗은 몸에 대해 죄악시하도록 배우게 되는 것일까. 루미는 또 그런 말도 했다. "그대가 내 안에서 보는 아름다움은 그대 자신의 투영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몸을 죄악시 하는것은 자기 자신을 보는 시각을 투영하는 것일지 모른다.


샤워 뒤면 항상 나는 벌거벗고는 산 언덕 위에 올라가 햇빛을 온몸으로 맞이하며 누워 있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태양이 내 온몸과 존재로 들어오는 것 같은 체험을 하곤 했다. 나 자신이 저 태양 안으로 흡수되는 것만 같았다. 내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나는 내 안의 태양과 같이 호흡했다. 그 호흡 안에서는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장소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나와 태양 사이의 속삭임만이 있었을 뿐이다. 어떤 단어를 써야 그 충만감을 전할 수 있을까? 아무리 쓰고 지우기를 반복해 보아도 부족하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계속해서 태양의 에너지를 들이마시고 있다. 식물들은 태양이 떠오를 시간이면 고개를 있는 힘껏 내밀고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태양을 바라본다. 그들은 우리와 다르게 태양의 은혜를 온몸으로 체감한다. 그 식물들은 먹는 행위를 통해 우리의 몸속으로 흡수되고, 그 식물들의 안에 있는 태양은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좀처럼 우리 안의 태양을 느끼지 못한다. 


 꼭 벌거벗지 않아도 된다.

내일은 그저 내리쬐는 태양 아래 가서 손 목이든, 내 손바닥이든, 목이든, 내 살갗에 닿는 해를 한번 느껴보자. 

해가 나의 살갗 안으로 들어와 온 몸을 가득 메운다.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우리가 천천히 호흡을 반복하는 동안 우리 안의 태양이 점점 그 존재를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햇빛은 우리에게 속삭이기 시작한다. 자, 이제 우리는 단지 그 말을 귀담아듣는 것으로 족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래서 나는 점점 조용해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