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융 Dec 30. 2018

의미 있는 삶

이란 무엇일까.

사회에 의미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가 스스로에 대해 괴로워하며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과연 '사회에 의미 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 되는 걸까. 세금을 꼬박꼬박 납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걸까, 아니면 공적인 일에 자신의 인생을 바치는 사람이 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저출산 시대이니 아이를 셋 낳아 기르는 사람이 되는 걸까.


나에게는 삶에 어떤 목적이 뚜렷이 있다고 믿었던 시기가 있다. 비록 그 목적이 모두에게 절대적인 하나는 아닐지 언정, 나에게 삶의 목적이 되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믿음은 나 자신의 삶을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어떤 목적이 있다면 분명 그 목적이 달성되지 않았을 때 오는 괴로움과 상실도 있을 것이므로. 더군다나, '삶의 목적'이라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그 목적을 이루는 삶, 그러니까, 의미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전제를 만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따로 의미 있는 삶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슬픈 일이 아닌가. '의미 있는 삶'이란 또한 '의미 없는 삶'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 그렇다고 해서 '모두의 삶에는 의미가 있다'라는 감상주의적인 코멘트를 달고 싶진 않다. 차라리 '모두의 삶에는 특별히 의미가 없다'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이들의 삶을 되돌아보면, 특별해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마치, 떠나간 연인과 같다. 오랜 기간 같이 있을 때에는 그 상대뿐 아니라 공유하고 있는 시간에 대해 좀처럼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지만, 헤어지고 난 이후에 그 모든 순간들과 상대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삶을 의미 있고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사실 부재가 아닐까. 부재는 사람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시시콜콜한 일들, 사소하고 쓸데없는 버릇에 의미를 부여하게 만들며, 그 의미는 그 삶을 특별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삶에 대한 자각은 분명 남겨진 이들로부터 오는 것이다. 남겨진 이들이, 부재한 이의 삶을 되돌아보며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삶 속에 숨겨져 있는 '특별함'의 실낱같은 희망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대부분 곧 잊혀진다. 우리는 또다시 특별하지 않은 삶의 굴레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그저 살아간다. 특별할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삶에 품고서.





매거진의 이전글 '같은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애들이 있는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