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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 윤 Sep 16. 2020

공들여 쓴 대본이 가지는 의미

작가가 영혼을 갈아 넣은 대본에서  대사 한 글자가 갖는 의미

길었던 초고 작업이 끝났다.

오늘 하루 나는 새벽 6시에 잠들어 9시에 일어나고, 밥을 먹고, 은행에 가서 사업자 통장을 만든 뒤

집에 돌아와 내리 6시간 정도를 더 잤다.

대략 일주일 정도 글을 쓰며 하루에 두 시간에서 많게는 네 시간 정도 자고

밤을 새우다 매일 새벽 5시쯤 집으로 퇴근하던,  그 어느 때 보다 치열했던 초고 작업이  끝난 것이다.




지금 작업 중인 작품은 2017년에 만든 나의 첫 뮤지컬이자 20분짜리 단편극을 기반으로

확장/재창작된 작품이다.

나는 역사에는 문외한이면서도 늘 일제강점기에 대한 영화, 드라마, 소설 등은 좋아했었는데,

일제강점기라는 것이 우리 민족에겐 너무나 아픈 시대지만 더불어 경험하기 힘든 아주 특수한 시대이기도 하기 때문에 작가에게는 꽤나 매력 있는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가끔 일제강점기 소재의 드라마를 보면서 '만약 내가 저 시대에 살았다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하곤 했다.

불의에 항거하는 용감한 독립투사였을까, 아니면 먹고살기 바빠 하루하루 일하느라 독립운동 따윈 생각도 못하는 사람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가슴에 차오른 분노감을 무섭고 두렵다는 이유로 외면한 채 울분을 삼키며 살아갔던 사람이었을까.

그 모든 사람들 속에 나는 어디에도 있었다.

무섭고, 두렵고, 하지만 분노하고 저항하고 싶은 나.

이러한 감정들을 가지고 캐릭터를 하나씩 만들어나갔고 그렇게 확장한 작품이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여 드디어 끝이 났다.


사실 난 대본을 빨리 쓰는 편이다. 또한 가사 수정도 작곡가의 요청이 들어오는 즉시 빨리 해버리는 편인데

나는 이것이 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대본 초고를 끝내고 나서 작곡가 친구가 곡을 만들며 늘 그렇듯 음악적 필요에 따라 가사 수정을 요청해왔다. 부분 수정이기 때문에 정말 말의 순서를 바꾸거나 하는 아주 간단한 작업이었다.


예를 들면,

술잔을 채워봐->음절 및 멜로디와 안 맞음 가사 수정 요청-> 술잔 채워봐->술잔을 채워->술잔을 들어(완성!)


와 같이 하나의 짧은 문장을 음절과 멜로디에 맞게 수정을 거듭하며 결정을 내리는데 보통 나는 이런 경우 작곡가가 제안한 가사를 바로 수긍하거나 약간만 고치거나 이도 저도 안되면 포기하고 음악에 맞춰 가려고 한다.

하지만 이번 작업에는 가사 한 글자 한 글자가 너무나 고민이 되어 작곡가 친구의 의견에 전보다 더 많이 다른 가사를 제안하기도 하고, 최종 결정까지 고민의 시간이 길었다. 그러자 작곡가는


"언니 전에는 안 그랬는데 뭔가 고집이 생긴 것 같아요."


라고 했고 나도 그제야 깨달았다.

워낙 공을 들여 텍스트를 수정해왔다 보니 뭔가 전에 없던 고집이 좀 생긴 것이다.

물론 전에 쓴 대본들이 텍스트에 공을 들이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이제껏 해왔던 작업과 이번 대본의 작업이 달랐던 점은, 나를 도와주는 드라마터그 역할을 한 연출이 '작가'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우리 연출은 스스로도 능력 있는 작가인데, 이 친구가 드라마터그


*드라마터그 :  독일어로 '드라마투르그', 영어로 '드라마터그'는 극작술(드라마투르기·드라마터지)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더 자세히는 희곡 작품이 연극 무대에 올라가는 전 과정에서 문학적, 예술적 조언을 하는 연극 전문가를 이른다. 희곡의 창작과정에서부터 배우 캐스팅과 공연 후 평가까지 맡기도 한다-출처 구글 검색)


 맡아 대본을 함께 고민해주기 시작하면서 텍스트가 의미 없게 빈칸을 채우는 의미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더 경계를 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그가 그냥 넘어가는 단어나 문장이 없었다는 의미다. 초보 극작가인 나에게 꼭 필요했던 '작가수업'의 과정을 연출이자 작가인 이 친구를 통해 짧은 시간 안에 밀도 있게 듣다 보니 그만큼 나는 따라가느라 매일 밤을 새워야 했고 그 결과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본이 나아졌다.

더불어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는 전에 없던 내  텍스트에 대한 소중함과 고집이 더 강해지게 된 것이다.  


이미 기승전결의 형태로  써둔 가사가 음악적 형태에 따라 변화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가끔은 앞 뒤 다 작곡된 상태에서 연결 브릿지 부분의 한 두줄만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는데

이럴 때 나는 그 멜로디의 빈 공간을 '채운다'라는 느낌으로 가사를 썼다.

하지만 이번 작업에서는 그 어느 한 줄의 대사나 가사도 낭비되지 않도록 오랜 시간을 기울여 써내다 보니 그만큼 나에게 한 글자 한 글자 모두가 소중해진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영혼을 갈아 넣은' 대본이었기에.




대본 리딩을 하다 보면 가끔씩 배우들이 기존 대사를 말맛에 맞게, 본인이 발음하기 쉽거나 말하기 쉬운 대사로 바꿔 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대본은


[당신,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군요]


라고 한다면 배우가 그것을


[당신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에요]


와 같은 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의미도 같고 별 다르지 않은 문장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 역시 리딩을 할 때 배우가 내 동의 없이 이렇게 말맛에 맞게 바꾸는 것에 대해 크게 기분 상해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좋아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대본 수정을 너무 오래, 많이, 힘들게 하면서 만들었다 보니, 첫 대본 리딩날 배우가 대사를 조금이라도 다르게 치면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한 배우가 그런 부분이 꽤 많았는데 그 친구가 원래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내심 속상했던 기억이 난다.

작가가 열심히 쓴 대본에서 배우가 연기하기 편한 대로 조금씩 바꾸어 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이때 반드시 작가에게 동의를 구해야 하는 부분이라는 것을 생각해주면 좋겠다. 그래야 작가의 의도가 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작가는 ", "와 같은 부호조차 의미와 흐름을 생각해 부여하고 사용하는 것이므로.


내일이면 나의 첫 장편 뮤지컬의 대본 제본이 나온다.

사실 작가와 작곡가가 아무리 공들여 쓴다 해도 결국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것은 배우이며, 더불어 연출이나 안무감독, 음악감독 등 구성된 스탭진들의 노고가 들어가지 않으면 관객과 만나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일이 된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글 쓰는 게 좋아서 시작한 이 일이 그들의 노고에 폐를 끼치지 않으면 좋겠다.

부족하지만, 부족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수정하여 고친 만큼 이 극이 잘 만들어져 무대 위에서 관객과 만나길 바란다. 완성한 대본으로 처음 연습할 내일이 기대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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