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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 윤 Nov 16. 2020

내가 짝사랑을 잊는 방법

공연은 짝사랑이다.  

공연 끝나고 몇 주가 지났지만 아직도 첫 공연 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관객이 입장하기 전 무대 위에서 마음을 모으듯 손을 모아 파이팅을 외치면 작은 목소리들,  공연이 주는 긴장과 흥분감, 그 기묘한 설렘을 안고 조용히 흐르던 무대 뒷 편의 서늘한 공기.  

3년을 써온 극을 드디어 나의 눈 앞에, 그리고 정식으로 관객의 눈 앞에 선보인다는 기쁨과 두려움이 섞인,  

잊으려고 해도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그날의 기분.

마치 수년을 바라만 보던 짝사랑을 눈 앞에서 맞닥뜨린 느낌이었다.  

맞다. 공연은, 짝사랑이다.


사진출저: Unsplash




공연을 준비하면서 정말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힘들고 어려웠다. 사람을 쉽게 믿고 마음을 주기에 뒤통수도 꽤나 맞았지만, 이제 나이가 있다 보니 어느 정도 그런 일들을 조심할 줄 알게 되었다고 방심했던 것 같다. 새로운 분야에서 맞이하는 새로운 사람과 상황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을 내던지듯이 내게 안겨줘 버렸고 그 안에서 나는 또다시 길 잃은 어린아이가 되어 하얗게 질린 채 한 달여를 보내야 했다. 아무도 곁에 없고 누구도 도와줄 수 없어서 이대로 영원히 미아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던 시간들.

사람이 이렇게 공황장애가 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과의 관계가 힘들어서 진심으로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작품'이라 그만둘 수가 없었다.

더불어 공연이 진행되어 가면서 점차 만나게 되는 수많은 분들이 무대 뒤에서 어떻게든 내 작품을 잘 올려주려고 애써주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대로 내가 무너지는 건 그분들께 죄송해서라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를 쓰고 이를 악물고 매일을 이겨냈다.

하루하루가 전쟁같이 싸워야하는 나날이었다. 극작을 하는 동안 창작의 고통은 다 지나갔기에 이제 편안히 감상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물론 이것도 오산이었다. 어마어마한 오산.) 제작을 한다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턱없이 부족한 예산으로 인해 직접 무대 장치를 만들고 작화를 하고 부품을 사러 뛰어다녔다.


공연 전날,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무대 세트에 열심히 작화를 하고 있는데 의상 팀분들과 음향 팀분들이 다가오시더니 선뜻 붓을 잡으신다.


"작가님, 도와드릴게요. "


의상디자인선생님은 자신의 물감을 들고 오시고 음향감독님은 감독님들이 쓰시던 테이프를 들고 와 필요한 곳에 테이핑을 해주셨다.

이건 작가님이 할 일이 아닌데. 도대체 역할이 몇 개 세요? 하고 장난스레 물어오시면서, 어느새 여러 스태프분들의 손이 하나둘씩 합쳐지기 시작했다. 오래 걸릴 줄 알았던 작화는 그렇게 금방 끝났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대본을 수정해 나가다 보면 작가로서도 많은 고난을 겪는다. 막상 읽혀보니 느낌이 다를 때도 있고, 생각보다 내가 생각한 주제가 전달이 잘 안될 때도 있어서 배우들과 아이디어 회의도 하고 의견도 나누며 수없이 고치고 또 고쳐야 한다. 끊임없는 회의와 수정 속에서 갈려나가는 대본만큼이나 갈려나가는 마음. 나 자신의 역량에 대해 의문이 생길 때쯤에 아니라고, 정말 재밌게 읽었다며 웃어주시던 분들, 꼭 본 공연이 올라왔으면 좋겠다는 덕담을 나눠주시던 분들과 우리 작품이 1등 할 거 같다며 서울로 올라가던 길에서도 시상식 생중계를 봐주시던 감독님들의 마음이 남아서 이것만 하고 그만둬야겠다...라고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게 해 주었다.

사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무너져 내리면서 스스로의 능력치에 대한 회의감도 엄청났다. 내 극작 인생은 여기서 끝날 것 같아-라고 생각했던 좌절감은 거의 공황상태에 이르기까지 날 떨어트렸고 그렇게 접고 싶었던 마음은 다시 또 다른 사람들로 인해 채워져 나는 이윽고 깊고 어두운 심연의 바닷속이 아닌 햇빛이 반짝이는 따듯한 수면 위로 올라 올 수 있었 것이다.

언제나 사람은 사람에게 상처 받지만, 역시나 사람만이 치유해 줄 수 있다.

사람은 나의 마음에 위협이 되기도 하지만, 위로도 위안도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받은 따듯한 위로는 내 안에서 용기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다시 내일을 꿈꾸게 하는 것이다.


사진출저: Unsplash




공연이 끝나고 며칠 뒤,  나와 연출, 조연출만 모여서 각종 일을 마무리 짓고 술을 한 잔(아니, 수정한다. 열병으로.) 마셨다. 3년을 머릿속에서만 그려왔던 공연이 끝나자 밀려온 허무함으로 인해 잠 못 드는 날 보고 조연출은 말했다.


"그러니까 언니, 연극은 짝사랑이라고 했잖아요. 빨리 잊어버려야 해요. 그렇게 잡고 있으면 언니 마음만 아프다니까요. "


조연출이 그렇게 말했던 연극은 짝사랑-이라는 말이 그제야 확실히 와 닿았다.

맞네. 짝사랑

...그런데 그럼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이걸 어떻게 해야 잊어버릴 수 있지?

연출이 말했다.


"새로운 극을 써야지. 새 극을 쓰면서 잊는 거야. "


"남녀가 사귀다 헤어지면 주변에서 빨리 새로운 사람 만나라고 소개팅 시켜주잖아요.

극도 똑같아요. 언니도 새로운 극 써야해. 그러면서 이 극을 잊고 털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최선이에요. "


그들의 말에 나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새로운 극을 써야겠다. 지난 시간들, 공연의 설렘도 아픔도 기쁨도 이제는 가슴 한 켠에 밀어 두고 새로운 극을 써야 할 차례다. 나아가기 위해.




며칠 뒤, 나는 예전에 구상했던 스토리를 떠올리며 몇 줄로 간단한 줄거리를 적어보았다.

시대극으로 그렇게 고생했는데 이번에도 시대극이라니. 심지어 조선시대라니!

혼자 헛웃음을 짓는다.

역사에 문외한인 스스로가 이럴 땐 참 원망스럽다.  

예전에 사뒀던 조선왕조실록을 꺼내 한숨을 쉬며 목차를 훑고, 인터넷을 뒤져 관련 기사나 칼럼을 찾아 읽었다.

머릿속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던 이야기들이 점차 색과 온기를 띠며 형태를 갖추려고 꿈틀댄다.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전처럼 마음이 아파서가 아니라 설레여서다.  

조연출 말이 맞았다.

연극은 언제나 짝사랑이지만, 그렇기에 다른 사랑으로 잊혀진다.

사람에게 데인 마음은 사람으로 치유되고, 그렇기에 다른 사랑을 할 용기를 낼 수 있다.



 

무언가를 끝냈을 때, 혹은 복잡한 머릿속을 깨끗이 털어내고 싶을 때 나는 여행을 떠난다.

급한 대로 혼자 1박 2일이라도 가보기로 했다.

마침 숙박 대전이라고 행사를 해서, 바다가 보이고 스파까지 갖춘 근사한 호텔을 저렴한 가격에 예약할 수 있었다. 하루를 푹 쉬면서 스파도 하고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아이유의 밤편지가 흐르면서 잔잔한 파도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나는 어제 오늘 취재도, 스토리 구상도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다음을 위해 비워야 할 시간이니까.

이렇게 푹 쉬고, 다른것들로 머릿속을 채우기 위해 취재를 시작할 거다.

전보다는 더 성장한 작가이자 나로서,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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