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반 수업은 처음 몇 주는 이론을 배우고 이후에는 각자 70분 단막극 하나씩 써서 합평하는 시간을 갖는데, 하필 내가 1조로 제출하고 합평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아 왜! 나 말고 다른 두 명은 자원이라지만 나는 왜!)
... 아무도 1조하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반장이라는 이유로 1조를 득템(...)한 나는 졸지에 시간에 쫓겨가며 단막극 초고를 완성했다. 몇 날 며칠을 하루에 두어 시간만 자면서 첫 드라마 대본을 썼고, 나름 영감 받은 부분이 있어서 퇴고 한번 못하고 제출했지만 망하진 않았겠지 하는 작고 소듕한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지난주 합평일
"다른 분들도 이렇게 쓰신 거 아니죠? 하지 말라는 건 다했네~~"
보기 좋게 가루가 되었다.
드라마 작가는 내 오랜 꿈이었다. 워낙 드라마를 좋아하고 공상을 즐겨하다 보니, 드라마 작가를 해보고 싶단 생각에 대학 3학년 때쯤 PD로 일하는 학교 선배에게 진로 상담을 했다.
하지만 선배는 방송작가나 드라마 작가는 너무 힘들고 특히 방송작가는 (당시엔 방송작가도 생각했었음)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리고 싶다는 말에 팔랑귀인 나는 역시 그렇지 라며 또 맘을 접었다.
하지만, 아주 오래된 꿈은 결국 언젠가 실행해 보고 싶어지나 보다.
뮤지컬 극작을 하면서도 드라마 쪽을 배워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고 결국 올해 초에 방송작가교육원에 지원했다. 코로나로 인해 면접이 아니라 에세이 제출을 했는데 어찌어찌 써써 낸 에세이로 합격해서 들어가 보니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 있었다. 방송작가, 약사, 교사, 직장인, 디자이너, 강사, 이미 책을 낸 회사원, 학생 등등... 우리 반은 저녁반이라 특히 성인 회사원 분들이 많았는데 정말 신기했던 점은 확실히 작가가 꿈인 분들 이어선지 온라인 카페에 올린 자기소개서들이 다 개성 넘치고 재밌었단 사실이다.
각 반에서는 수업 진행에 도움을 주는 반장을 뽑는다.
나는 뭐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반장을 지원했고 이것은 훗날.... 합평 1조 당첨이라는 큰 결과를 낳았다.
이론 수업이 끝나고 대본 제출일을 말씀해주시던 날, 생각보다 열흘은 빠른 1조 대본 마감일에 사람들이 모두 침묵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 우리를 보며 약간 당황하시던 선생님은 "생각보다 시간이 없네요...."라면서 이틀의 여유를 더 주셨고, 다행히 그 이틀 덕에 나는 겨우겨우 초고를 써서 제출할 수 있었다.
나는 나름 뮤지컬 대본, 연극 대본을 써본 '작가'고 어느 정도 글을 쓰는 중요한 감을 익혔다(초보지만)라고 생각해서, 어떻게든 작가정신이란 걸 담아 주제에 벗어나지 않게 완성하려 애를 썼는데, 다행히 소재는 있었다. 우연히 티비에서 보고 영감 받은 배우(차지연 배우 사랑해요)를 바탕으로 돈 때문에 행복을 잃은 여성 사채업자 이야기를 적어내기로 하고 제목도 나름 그럴듯하게 돈으로 울고 웃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 한 노래 제목을 패러디하여 적었냈
는데 아, 기가 막히다,라고 생각한 제목을 접한 선생님의 코멘트는...
"이건 가제로 두고 다른 제목을 써보세요. 제목을 짓는데 노력을 좀 해봅시다"
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저 엄청 노력한 건데요... 흐흑)
게다가 본문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드라마 대본이나 뮤지컬 대본을 쓸 때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이 뭐냐면... 나는 작가로서 스토리만 전개하는 게 아니라 연출적인 부분까지 디테일하게 적게 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드라마는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려주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한 여주인공 얼굴에서 컷. 이런 식으로 적어나갔는데, 바로 그 점을 많이 지적당했다. 대본을 쓸 때 보통 머릿속에서 그림을 떠올리고 그걸 글로 풀어내다 보니 생겨나는 현상이었는데 (게다가 난 연출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연출적인 부분이 자꾸 떠오른다...)
처음부터 내겐 이게 참 곤란한 점이었다. 나름대로 도입부엔 선 그래도 연출적인 부분을 적지 않으려 의식할 수 있었으나 며칠 밤을 새우며 마감을 겨우 맞추고, 반 가사상태에서 글을 쓰고 퇴고조차 못한 것을 제출하다 보니 그 부분들이 아주 많이 있었고 당연히 지적받을만했던 부분이었다.
게다가 기획의도와 시놉시스도 퇴고를 못했더니 반복도 많고 내용도 길다는 코멘트가 있었고...(고백하건데 엉망이었다)
퇴고 한번 못한 생 초고는 주제와 제목과 대본이 조금씩 엇나가 내가 보기에도 할 말이 없는 상태긴 했다.
교집합은 있는데 서로 따로 노는 그림이랄까.
그래도 우리 반 분들은 대부분 말씀을 예쁘게 해 주셔서 적절한 당근(설탕에 절인 수준으로 담)과 채찍(안 아픔)을 사용하며 멘트를 해주셨지만 선생님은.... 프로시다. 프로에게 자비란 없다.
말 그대로 합평 일의 나는 가루가 되어 사라질 만큼 까이고 또 까였다.
사실 까이는 것에 대해 불만은 없다. 오히려 작품이 까인다는 것은 고쳐서 개선될 수 있다는 말의 반증이기도 하다. 아예 엉망인 대본은 코멘트조차 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기에 까이는 것 따위야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쓰신 건 아니시죠?라는 까임을 듣고, 그다음 주 2조의 합평 시간에는 "오늘 제출하신 분들은 다 처음 쓰신 대본인데... 이 정도면 이 바닥에 깃발 하나 꽂을 수 있겠어요. 아주 잘 썼어요"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는 2조 합평 수업 중반쯤에 결국 맥주를 한 캔 땄다. 잘 쓴 분들에 대한 부러움과, 선생님의 칭찬과, 지난주 까임이 격려+까임이 아니라 너는 재능 없어, 그만둬야 해. 쓰레기를 냈네 라는 뜻이었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물론 선생님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이해해주시라. 원래 작가는동굴에 자주 들어가는 직업이다) 씁쓸해서 술이 필요해졌다.
줌 수업이니, 컵에 맥주를 담아서 홀짝거리며 수업을 들었다.
첫 대본을 훌륭히 쓰신 분들이 대단하게 느껴졌고 쓸데없이 공연 대본 써봤다고 역으로 그것 때문에 드라마 대본 쓰기 힘들던 게 생각났다. 더불어 시간이 일주일만 더 있었어도 그 정도 말은 안 들었을 텐데 라는 억울함. 나는 정말 쓰레긴가 라는 좌절감과 자책감, 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날이 무색해질 만큼 무너지는 자존감속에서 진심으로 아, 나는 드라마가 안 맞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극작 아카데미 때도 난 마지막까지 까이던 학생이었다.
극작 과정 세명의 학생 중에 한 명은 연영과 연기 전공자이자 아역배우 출신이었고, 다른 한 명은 드라마 작가 아카데미 수료자였으니 음악만 전공한 내가 젤 뒤쳐지는 건 당연했다.
남들 시놉시스 통과돼서 대본쓸 시간에 나는 울면서 시놉을 몇 번이고 갈아엎었다. 다른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대본을 수정하고 선생님께 마침 도장 쾅 받았을 때 나는 첫 초고를 제출했고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건 그 작품이 나중에 무대에 올랐을 때는 세 개중 (그나마) 쪼오끔 더 낫다 라는 평을 들었다는 점이다. (그게 작년에 정식으로 올라간 작품이다. 3년걸림...)
솔직히 고백하자면 악기를 전공할 때는 이런 좌절감과 실패감을 맛 본적이 별로 없다.
어느 정도 음악적 재능이 있었고 그래서 연주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그렇다고 초상위권인 천재나 수재도 아니어서 적당히 잘하는 정도의 수준이었으나 음악이란 분야에서 타고난 감각과 재능이 있는 사람은 남들과 같이 연습해도 기본적으로 더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기에 매우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얄팍한 재능이었지만 얄팍하단 걸 알았기에 꾸준히 연습했다. 그래서 대학을 갔고, 장학금을 탔고, 악단 활동도 해봤다. 하지만 나는 다른 길을 가고 싶었다. 교육자가 되고 싶었고 작가가 되고 싶어 일을 그만뒀다. 그렇게 내가 악기를 그만두고 -아니 학교를 졸업하고- 10여 년이 지났을 무렵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 지금 현역에서 선생님 소리를 들으며 활동하는동기 몇 명은 학창 시절 중위권에 속했던 평범한 친구들이었으며, 그들은 나처럼 그만두지 않고 꾸준히 한 우물만 판 결과로 결국 인정받는 연주자로 우뚝 섰다는 것이다. 국립악단에 못 들어갔더래도 자신의 악단, 혹은 다른 악단에 들어가고 레슨을 하고 협연을 하고 강의를 나가며 독주회를 연다.
그랬다. 결국 재능이 있는 것은 초기에나 편리하고 유리한 것이지 끝까지 살아남아 선생님 소리를 듣는 연주자가 되는 것은 그 길을 떠나지 않고 마지막까지 노력하며 버티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끊임없는 노력으로 어느 정도 반열에 올라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결과를 낸다. 그것이 몇년이 걸릴지언정.
월요일 수업 이후로 이틀 정도는 무척 우울한 기분이었다. 여기서 접을까? 그냥 다른 작가님이 말씀하신 대로 웹소설판으로 들어가 볼까? 드라마는 접고 쓰던 뮤지컬극이나 마무리지어야 하나? 내가 그렇게 엉망이었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떠돌아 연 이틀을 맥주캔과 막걸리병을 땄다. (막걸리는 느린 마을/지평막걸리)
그 난리를 치면서 쓴 극이 가루처럼 까이고 나자 자신감도 자존감도 작품과 함께 풍화되어 사라진 기분이었다.
'여기서 그만할까?'
수도 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여기서 그만두면 정말 끝이라는 걸.
나만 손을 놓지 않고, 나만 계속하면 언젠가 성과를 거두고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를 수 있을 거라는 걸.
음악이 그랬고, 뮤지컬이 그랬으니 드라마 작가도 분명 그럴 것이다.
그만두는 건 그만두자. 대신 좀 쉬자.
쉬면서 자존감을 회복하고 어느 날 다시 번뜩이는 그분이 오셨을 때 또 신난다고 써보자.
처음보단 두 번째 대본이 낫고 한 번 고친 것보다 두 번, 세 번 고칠수록 좋아지는 게 글이니까.
지금의 나는 무너져 내렸지만, 무너진 곳에서 다시 쌓아 올리면 되는 거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 나는 조금씩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내 대본은 정말 엉망이었을지 몰라도 빈말이라도 재밌다고 해준 사람이 있다.
한 대사를 콕 집어 좋았다는 엄청 단 당근을 던져주는 사람도 있다.
입바른 말일지언정 그거 하나 붙잡고 가야지.
아아, 글 쓰기 싫다. 근데 언젠가 다시 쓰겠지.
잘 쓰려면 공부나 더 해야겠다. 오늘은 작품상 수상한 대본이나 읽어볼 테다.
어디 얼마나 잘 쓰는지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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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쓰네.
난 쓰레긴가?
오늘도 나는 이 말을 반복하면서도 노트북을 켜고 있다.
까이고 또 까이다 보면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다시 쌓아 올릴 것이다. 엉망인 건물을 허물고, 멋진 새 건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