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막 끝, 2막 시작
‘끝은 또다른 시작’이란 말이 있다. 초중고 졸업식에 송사로 많이 애용되는 문장이다. 생각해보면 각 학교를 졸업할 때 이보다 더 잘 맞는 말이 있을까 싶다. 하나를 마치고 나면 바로 다음이 새롭게 시작되는, 매일매일이 앞으로만 나아가던 시절이니까. 그것은 학생을 마치고 직장인이 될 때나 사표를 던지고 창업을 할 때, 솔로를 청산하고 부부가 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마치 하나의 순서처럼, 하나를 마치면 항상 새로운 다음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살다 보면 가끔은 여기가 내 인생의 끝이 아닐까 하는 절망의 시기가 찾아오기도 한다. 마치 내 삶이 완전히 끝난 것처럼, 시작이란 단어를 감히 떠올리지도 못하는 시기. 나에겐 그것이 바로 ‘이혼’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시간은 흐른다. 별거를 시작하고 친정집으로 돌아왔을 때, 한 달 전 등록해 뒀던 극작 아카데미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던 때였는데도 워낙 오랜 시간 꿈꿔온 수업이기에 한 번 들어보고는 싶어 꾸역꾸역 준비를 해 겨우 강의실에 도착했다. 세 시간의 강의 끝에 수업이 끝나고 다음 주까지 습작을 써 내란 소리에 무슨 글을 써야 할지 고민을 하며 강의실 밖으로 걸어 나왔는데 길가에 사방에 핀 벚꽃과 질 수 없다는 듯 한껏 노랗게 핀 개나리꽃이 눈에 들어왔다. 난 그제야 깨달았다. 아, 봄이었지.
겨울에 별거를 시작하면서 내 마음은 얼어붙은 채로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수업을 듣고 나오자 정말 오랜만에 마음이 설레면서 멈춰있던 내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어오는 바람은 더 이상 차갑지 않았고 흩날리는 벚꽃은 초록이 돋은 땅에 보드랍게 내려앉는다. 나만 모르는 새 봄이 와 있었구나. 왠지 눈물이 났다. 오랜만에 보는 꽃들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행복하고 싶었다. 아이도 낳고 도란도란 사는, 소소하지만 행복하고 평범한 삶을 꿈꿨었다. 매일 밤 울며 잠들던 시간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막막하던 날들. 다음날 눈뜨는 게 싫을 정도로 우울한 매일 속에서 새로운 시작은 내겐 해당되지 않는 먼 얘기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꿈을 져버릴 수 없어 용기 내 시작한 극작 아카데미는 기적처럼 조금씩 나를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전공자들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였던 난 시간에 쫓겨가며 글을 쓰느라 정신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퇴근하면 그대로 노트북을 들고 집 근처 카페로 갔다. 직장에서 어떻게 일을 했는지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우울감이 심하던 시절이었는데도 막상 눈 앞에 닥친 과제를 해야 하니 그거에 급급해 열심히 자판을 두들기게 되었다. 엉망진창이었지만 어떻게든 써가면 코멘트를 해주시는 선생님들의 말씀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어느새 난 매주 수업이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몇 달간 매달린 아카데미의 졸업 공연을 마치고 얼마 뒤 가을, 이혼 절차가 모두 끝났다. 나는 다시 완전한 혼자가 되었으며 정신을 차리고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이제 TV에서 나오는 이혼에 관한 얘기에도 눈물이 터지지 않을 만큼 조금은 단단해져 있었다. 이제 좀 쉬어. 그동안 힘들었잖아. 엄마의 말에 난 그럴게, 하고 대답은 했지만 어쩐지 쉬고 싶지 않았다. 공연을 보신 선생님들께서 장편으로 써보라고 하신 말씀이 자꾸만 생각났고 내 극이 무대 위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며 느꼈던 흥분이 나를 들뜨게 했으며 더 많은 이야기를 더 재밌게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근질거렸다. 결국 나는 아카데미가 끝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다시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갔다. 일이 끝나면 글을 썼고 잠자리에 누웠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컴퓨터를 켰다. 그렇게 장편 대본이 나오고 일 년 뒤, 나는 스토리 작가 데뷔 프로그램에 합격해 멘토링을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대본을 수정해 올해 2월, 한 공모전에 최종 선정되었다. 나를 작가님이라 부르며 걸려온 전화에도 실감이 나지 않아 몇 번이고 되묻던 것이 생각난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잠시 일정이 멈췄지만 아마도 곧 정식으로 내 극이 무대에 올라가 관객과 만날 것이다.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내일조차 기약할 수 없던 시절. 나는 꿈을 잃을 수 없어 용기 내어 새로운 일에 도전했고, 끊임없이 노력한 끝에 마침내 극작가라는 새로운 호칭을 얻게 되었다. ‘우리’로서의 끝이 결국 ‘나’의 새로운 시작이 된 것이다.
끝은 또다른 시작이란 말처럼, 전부 끝난 것 같던 절망속에서도 언제나 시작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손을 내밀 용기만 있다면,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제고 새로운 인생은 시작된다. 지금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지만 내 옆엔 언제나 날 지지하는 가족과 써야 할 글이 남아있다. 어둠 속에 하얀 불빛을 뿜으며 자신을 채워주길 기다리는 작은 여백. 지나온 시간 동안 이 여백의 빛이 내 위안이고 행복이 되었다. 지금 난, 내 인생의 2막을 시작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