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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 윤 Dec 20. 2021

어느 음대생의 회상

자식의 인생은 부모의 삶을 자양분으로 자라난다

오랜만에 뮤지컬을 봤다. 내가 무척 존경하는 감독님께서 참여 중이신 작품의 뮤지컬이었는데, 감사하게도 감독님께서 초대해 주셔서 좋은 기회로 보게 되었다.  이 작품의 초연을 거의 7-8년 전에  관람했었기에 오랜 시간을 넘어 다시 돌아온 작품을 다시 만난다는 것이 무척 설레기도 했다.

여성 1인 뮤지컬이라는 특징 때문에 재연이 가능할까 생각했었는데도 불구하고, 작품은 현명하게도 젠더 프리 캐스팅으로 바꾸면서 더 풍성하고 세밀하게 다져져 돌아왔고 이 작품을 보는 동안 나는 오랜만에 음악을 공부하던 학생의 기분으로 돌아가 감회에 젖을 수 있었다.



뮤지컬 웨딩 플레이어는 피아니스트이자 결혼식 반주자 (웨딩 플레이어)로 활동 중인 지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피아니스트의 꿈을 가졌던 주인공이 어떤 좌절과 실패로 인해 한풀 꺾인 꿈으로 피아노를 그만뒀다가, 웨딩 플레이어를 하면서 다시 피아노로 재기하였는데, 어느 날 그녀에게 파혼한 전 남자 친구의 축가 연주 의뢰가 들어오게 된다. 그녀는 어떻게든 자리를 피해보려 노력하면서 대타까지 구하지만, 결국 도망쳐선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직접 반주를 하고, 축가를 부르고 돌아온다.


이 작품을 보면서 참 잘 쓴 작품이란 생각을 했다. 주인공의 섬세한 감정을 잘 담아내어, 과거의 도망만 치던 나의 모습을 마주하기까지의 과정을 설득력 있고 공감가게 잘 풀어내었으며 주연을 맡은 정연 배우 또한 특유의 에너지와 연기력으로 관객을 극에 몰입시켰다. 작중 주인공이 피아니스트인만큼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하는 부분들이 많은데, 그 부분을 적당히 세션과 나눠 치면서도 극의 흐름에 방해되지 않게 만든 센스도 돋보였다. 특히 나는 극을 보는 내내 혼자 웃음이 빵빵 터지는 장면들이 꽤나 있었는데, 그건 주인공이 예중, 예고, 예대를 가면서 피아노를 전공한 이야기들을 쭉-풀어놓을 때의 일명 '음대생' 에피소드들 때문이었다.





악기를 전공하면서 예고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우리 집은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크게 모자람도 없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 예능을 좋아했던 아이였고, 그중에 나름 음악 쪽에 관심이 많아 어릴 때 플루트를 배우겠다고 일 년을 넘게 조르기도 했었다. 결국 엄마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레슨을 끊어주셨다. 당시 플루트를 시작하면서 구입했던 악기는 야마하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취미로 그런 악기를 산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을 중산층 가정에서, 어떻게 음악전공자를 키울 생각을 했었는지 놀랍기도 하다. 그토록 배우고 싶어 했던 플루트였지만 안타깝게도 내 선생님은 레슨생에게 큰 기대도, 열정이 없으신 생계형 취미 레슨을 하시는 분이셨다. 딱딱하고 지루한 수업에 처음엔 신이 나서 하던 악기 연습도, 매일 레슨 날만 기다리던 날도 지지부진한 내 실력과 더불어 점점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을 배우다 악기를 그만둔 어느 날, 엄마가 내게 먼저 물어오셨다.


"너 이 악기 한 번 해볼래?"


엄마가 추천해주신 악기는 이전에 공연에서 보았던 국악기 대금이었다. 나는 생소하지만 너무나 멋진 그 소리에 이미 홀딱 반해버린 상태여서, 응응! 해볼래! 하고 싶어! 하고 신나게 대답했고, 이미 이 아인 공부 쪽이 아니다-라는 현명한 판단을 하고 계셨던 엄마는 (...) 재빠르게 선생님을 붙여주셨다.

수업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다행히 소질이 있는 편이라 처음에는 금방 금방 실력도 늘고 레슨도 재미있었다. 아마 내가 플루트를 불었기 때문에 더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대금 전공자 중에 플루트를 배웠던 사람이 꽤 많다. )  하지만 재미로 하던 것과 다르게 전공자가 되어 본격적으로 입시란 것을 준비하게 되자 점차 악기 연주가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연습해도 내 실력은 생각보다 오르지 않았고 선생님께는 매일 혼이 났다. 농음(바이브레이션)은 멋지게 표현하기 어려웠으며 국악기 특유의 풍부하고 다양한 시김새를 표현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연습이 필요했다. 선생님은 내게 연습을 시키기 위해 녹음테이프로 하루 60분-120분짜리를 만들어오라는 숙제를 내셨고, 나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음악에 질질 울면서 수많은 녹음테이프들을 채워나갔다. 그렇게 시작한 예고 입시가 끝나고 고등학교에 올라가 대회도 나가고 입시도 준비하며 대학에 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지난한 시간들이 있었다.

 고3 대입 준비 시절, 학교가 끝나면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을 달려 레슨실에 갔다. 자리를 붙이고 앉아 연습을 하고 레슨을 듣고 레슨이 끝나면 또 연습을 한다. 친구들과 저녁도 먹고 수다도 떨다가 다시 연습을 한다.

그렇게 12시가 되면 아빠가 연습실로 데리러 오시곤 하였다. 그 늦은 시간까지 아빠는 사무실에서 퇴근도 하지 않고 기다리셨다가 고3 딸내미 데려오겠다고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매일같이 달려와 나를 태워가시면서 1년을 오가셨다.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새삼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나이가 들고나서 생각해보니 내가 부모님에게 받은 만큼 나도 내 자식에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라는 사람은 부모님의 인생의 많은 날들을 바쳐 지금이 된 것이었다.

새벽 다섯 시 반, 추운 날씨에 스쿨버스를 타러 걸어가는 내가 안쓰러워 면허증을 따고 초보운전으로 매일 날 데려다주시던 엄마. 엄마는 나보다 먼저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다섯 시 반이면 날 데려다주셨는데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는 온 가족이 다 알람을 못 듣는 날이 있었다. 그럼 그때부터 우리 아빠의 카레이싱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 번은 아빠가 놓쳐버린 스쿨버스를 따라잡기 위해 말 그대로 분노의 레이싱을 하며 날아갔던 적이 있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앞에 가는 스쿨버스에 몇 번이고 쌍라이트를 껐다켰다하고 클락션을 울렸다. 그래도 아저씨가 알아채지 못하시니 1차선에 선 버스 옆으로 2차선에 붙어서 달리다가 신호대기 중 차가 멈추었을 때 아빠가 버스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 사이 엄마는 얼른 내려서 버스를 잡으려고 문을 열어 반쯤 내리신 상태였는데, 버스가 출발하자 아빠가 그대로 액셀을 밟아 엄마는  길거리에 그대로 나동그라져버렸다.


"아빠! 엄마가!!"

"아저씨!!!!!  (버스 문 두들김) 넌 빨리 버스 타!"


그 난리통 덕에 다행히 버스기사 아저씨가 드디어 차를 세우고 문을 열어주자, 아빠는 엄마를 확인할 새도 없이 어서 타라고 소리치셨다. 엉거주춤 일어나는 엄마에게 멀리서 엄마 괜찮아? 하면서 버스에 오르자 학생들이 환호를 보내며 박수를 쳤다. (아, 웃으면서 쓰지만 이 얼마나 웃픈 장면인가. )

결국 나는 그날 그렇게 잡은 버스를 타고  무사히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1교시 마치고 쉬는 시간에 뛰어내려 가 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엄마가 엉덩이에 파스 붙였다며 엄마의 희생을 잊지 말란 우스갯소리 하시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외에도 스쿨버스를 타야 하는 시간을 훌쩍 넘겨버린 7시에 일어나 1시간 반 거리를 40분 만에 달려간 적도 있었다. 아빠의 분노의 질주 속에서, '하느님, 이번에 저희 살려주시면 담엔 제가 잘할게요'를 외치며 손잡이를 꼭 잡고 눈을 부릅뜬 채 학교까지 가던 일, 그렇게 도착한 학교 앞 던킨도너츠에서 아침거리까지 챙겨주시던 아빠, 매일같이 연습실에 남아 팔이 떨어져라 악기를 불며 밤을 새우던 날들, 뜻대로 되지 않는 부분 때문에 악기를 내던지고 싶은걸 간신히 참던 것 (악기는 비싸고 소중하다), 어느 날은 잠이 들면 꿈속에서 내 악기가 거짓말같이 똑! 부러지는 꿈을 꾸기도 했다. 얼마나 생생한지 자고 일어났더니 얼굴이 눈물범벅이던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건 지금도 스트레스받으면 가끔 꾸는데, 매번 꿀 때마다 생생하고 끔찍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대학 입시곡을 받고 그 곡만 몇 달을 연습했는데, 1 지망이었던 학교의 실기시험에서 연주 마지막쯤에 손가락이 갑자기 풀려 저 혼자 말도 안 되게 돌아가서 망치고  당황해서 두 번째 곡을 날려버린 일, 2 지망 학교에서 앞사람의 연주를 들으며 긴장하던 일, 공개시험이라 의자에 주르륵 앉아계신 교수님들과 엄마들이 다 보여 어떻게든 잡념을 떨치려고 애썼던 기억,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귀에 울려서 숨을 고르다 겨우 연주를 시작했던 일, 졸업 연주회 한다고 연주복을 고르고 매일같이 동기들과 학교 연습실에서 하루를 보내던 시간들이 뮤지컬 웨딩 플레이어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이 극을 보면서 울었던 장면은 사실 주인공 지원이 아버지와 있었던 일을 얘기할 때였다.

지원의 그랜드 피아노를 사주기 위해 자신이 아끼던 '전축'을 팔았던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는 피아노를 치지 못하는 딸을 위해 '치자'꽃 화분을 사다 주며 치자. 피아노 치자.라고 중얼거리던 그 모습에 나는 우리 엄마가 왈칵 떠올랐다. 연습을 하다가 제풀에 화가 나 씩씩대면 엄마가 아까 거기 좋았어. 하면서 달래주고, 슬쩍 넘어가던 부분을 지적하며 내 연습을 지켜봐 주시던 엄마. 악기를 사고, 매달 나가는 수십만 원의 레슨비를 감당하면서 무척 힘들었을 우리 엄마 아빠를 극을 통해서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내게 레슨비를 말해주지 않던 엄마와, 이사하면서 작아진 집을 보면서도 악기를 바꾸고 싶어했던 고3의 나. 농담처럼 내가 우리 집 기둥뿌리 4개 중에 3개 뽑았다고 하면 알면 다행이지 하고 웃으시던 엄마. 나는 우리 부모님의 인생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희생하며 큰 걸까.

나라는 사람의 인생은, 두 사람의 삶 위에서 그분들 인생을 자양분 삼아 자라났다.






내가 공연을 보고 온 날이면 엄마는 꼭 "공연 재밌었어?"하고 물으신다. 오늘도 엄마는 내게 그렇게 물으셨다. 나는 아무도 안 웃는데 나 혼자 공감해서 빵빵 터졌다고 말하다가, 엄마 생각이 나서 찔끔 울었다고 했다.

주인공 아빠가 전축 팔아서 피아노 사줬대. 피아노 치자-치자 하면서 치자꽃을 사 왔어. 거기서 엄마 생각이 나더라. 우리 엄마도 저랬지 싶어서. 그냥 툭 던진 말에 엄마는 어이구- 알면 다행이네 하고 웃으셨다. 말하지 못했지만 아마 엄마도 아셨을 것이다. 내가 한 이 말이, 엄마 고마워, 란 뜻으로 한 말임을.


마음이 힘들었을 시기에 악기를 하루 종일 불어댄 날이 있었다. 그리고 글에 빠져, 극작 아카데미를 다니며 몇 달을 글만 쓰던 날도 있었다.  음악과 글은 내게 많은 좌절도 줬지만 기쁨과 위로도 주는 소중한 동반자다. 그리고 그런 소중한 것들을 내게 선사해준 부모님의 희생과 사랑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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