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두 개를 쓰고 드라마 교육원을 다니면서 기초반 때부터 전문반까지 5개의 단막극 대본을 썼다.
처음에 아무것도 모르고 나의 첫 이야기를 쓸 때는 마냥 신나고 '아는 게 없으니까' 뮤지컬인데 막 총격씬 넣고 폭탄 터트리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지금은 아주 쬐에끔 햄스터 발톱만큼 알게 됐다고 혼자 자체 검열하는 게 많아졌다. 이 씬은 단막이니까 사이즈가 커서 안돼, 이 씬은 단막이니까 이거면 돼, 이 씬을 구현하는 게 단막에서 가능할까? 이런 식으로 혼자 생각하고 애초에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다.
특히 이 증상은 이번에 전문반에서 제출하는 단막극 대본을 쓸 때 정점에 달했는데, 합평으로 PD님께 엄청나게 뼈 때리는 코멘트를 들은 후 그때 깨달았다. 아, 차라리 아예 모르는 게 낫지 조금 아는 건 더 괴롭구나... 라는 걸 말이다. 일명 '아모조괴'
이거슨 병아리 상태였다가 이제 막 흰털이 나기 시작하고 아, 내가 닭이란 생명체였구나, 라는걸 인식 가능할 정도로만 아는 작가의 일기.
내가 생각한 나 :중닭
PD님이 보시는 나 : ...
처음 뮤지컬 대본에서 총격씬, 폭탄씬을 썼었는데, 나중에 심사위원들에게 면접 볼 때 들었던 질문이 이거였다.
"이게 뮤지컬에서 구현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병아리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함니돠! 라고 당차게 말했고, 심사위원분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분도 계셨지만 어디 한 번 해봐라, 하고 뽑아주신 분들도 계셨다.
반면 지금은 몇 개의 대본을 쓰면서 한 편의 뮤지컬 혹은 드라마를 올리는데 드는 자본과 인력을 알게 된 터라 아무래도 극을 쓸 때 이것저것 고려하게 되어 가능한 예산에 맞춰, 혹은 극 사이즈에 맞춰 쓰려는 생각을 은연중에, 아니 대놓고 하게 된다.
오늘 합평을 받았던 대본에서는 소방관이 나오는데 드라마 단막극인데 화재가 나고 차가 폭발하는 장면을 쓴다는 건 말이 안 될 것 같아 최대한 그 부분을 잘라내고 뒷부분 (화재가 난 뒤 상처만 있다거나, 혹은 대사로 이런 일이 있었좌놔!! 하고 알려준다거나)만 알려주는 방법을 썼다. 그랬더니 작품을 보신 PD님께서, 어디서 글을 좀 쓰셨죠?라고 하시면서... 구조를 알게 되니까 그 구조에 맞춰 틀에 끼워 넣으려고 하는 게 보인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 아주 정확했다. 이 대본을 쓰며 난 나도 모르게 기본 서사 구조의 공식대로, 내가 아는 단막극의 제작 상황에 맞춰(정확히 말하면 막연하게 생각한 예산이나 촬영의 어려움에 맞춰) 극을 쓰려다 보니 씬들은 날아가고 설명적인 대사만 남아 캐릭터들이 입만 열심히 놀리는 상황이 되어버렸고 고로 이 대본은 가루가 되게 까이고 말았다.
사실 이제는 합평이 익숙하다보니 까이더라도 전처럼 타격이 강하지 않고 그냥 그렇구나 하고 듣는 편이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마치, '오~ 니가 어디서 좀 쓰다 온 모양인데 이런 게 먹힐 줄 알고? 안 먹혀! 완전 틀림'하고 딱 걸린 느낌이랄까. 마치 속내를 들킨 것 같아서 당황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 시간까지 잠이 안 오는 것이다.
합평에서 대차게 까이고 나면 그 대본을 들여다보기도 싫어지는 마음이 드는 게 있다.
거기에, 작가님, 피디님들께선 정말 신기하게도 그 안에 숨겨진 내 생각을 다 읽어내시기에 세상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내가 뮤지컬 극본을 쓰며 초기에 많이 들었던 말이 '작가님은 너무 착해서 그래. 작가님이 너무 착해'였다. 그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 줄 몰랐는데, 지금은 알고 있다. 주인공을 극한으로 몰아가야 하거나 엄청난 고난에 빠트려야 하는데 그게 안되니 '착하다'라고 표현하시는 것이다. 글 쓸 땐 이 말이 결코 좋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오늘 다시 그 얘기를 들으니 순간 좀 타격이 있었다.
틀 안에 자꾸 나를 가두고, 글을 쓰며 다 써보기도 전에 자체 검열을 통해 80년대 뺨치게 다 잘라낸다. 나 혼자서 잣대를 세우고 이 정도면 됐지하고 제한하기도 한다.
기본 구조에 맞춰 쓴 '못쓰지 않은'글이지만, 그러다 보니 대단히 예측 가능하고 또한 기존 대본들과 더욱 비교가 되는 대본이 되었다.
오늘 합평이 있기 전 친구에게 이번 대본 줄거리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친구가 한 말이 있다. 내가 학생 때 썼던 소설을 읽어본 이야길 하며,
"예전엔 내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요즘 네가 말하는 걸 들으면 뭐랄까, 좀 갇혀있는 기분이야."
친구의 말과 피디님의 말이 똑같아서 놀랍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고.
아예 모를 땐 용감하고 무식하게 막 썼는데, 조금 알고 나니 이것저것 맞춰보겠다고 제 멋대로 다 자르고 텅 비어버리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잠 못 드는 이 밤에 생각한다.
다음 달부터 쓰는 새 대본은 거침없이 하이킥 정도로 말도 안 되더라도 내가 신나게, 재밌게 써보리라고. 처음의 어처구니없는 재기 발랄함을 되찾아보겠다고.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내 극에 노심초사하며 예산핑계 구조 핑계로 이것저것 다 잘라서 아둔하게 창의성과 재미를 놓치고, 가능성을 스스로 죽이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