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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박 Feb 11. 2020

혼자일 때 어른이 된다


 세탁기를 돌려놓고 양치를 하는데, 빨래 헹궈진 물이 배수 호스를 통해 콸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눈을 뗄 수가 없어서 양치하는 내내 호스를 쳐다봤다. 문득 왜 결혼해야 어른이 된다는지 알 것 같았다. 가정을 이룬다는 추상적인 이유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이유들 때문인 것 같았다. 우리들은 보통 태어났을 때 이미 집이 있었다. 월세, 전세, 자가 할 거 없이 일단은 집이 있다. 그 집에는 세탁기도 이미 설치되어 있고, 티비도 리모콘만 누르면 나오고, 내가 덮을 이불도 당연하게 준비되어있다.


 그런데 결혼을 하면 컴퓨터와 인터넷을 연결해야 하고, 공유기도 사야한다. 티비도 골라야 하고, 건조기를 살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해야 한다. 항상 집에 있던 것들이라 쉬울 것 같지만, 생각보다 살림을 갖추는 건 쉽지 않다. 기계들은 내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이게 원래대로라면 작동해야 하는데 왜 안 되지..? 하는 것들이 계속 생긴다. 그럴 때마다 더듬더듬 해결해나가면서, 문득 '누구에게든 처음은 쉽지 않았겠다'라는 생각과 '세상에 저절로 되는 건 단 하나도 없었구나'라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모든 사람들이 다 이런 번거로운 일을 겪으면서 정착하는 건가? 나만 이게 어렵고 귀찮은 건가? 다들 어떻게 알아봤고, 결정했고, 돈이 어디서 났지? 새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로 자라왔다는 괜한 반성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건 굳이 결혼까지 갈 필요 없이 독립해도 겪을 일들이다. 그러므로 정정하자면, 결혼해야 어른이 된다기보단 혼자 일 때 어른이 된다는 게 맞겠다.


 기숙사에서 살면서 느낀 건 혼자 살 때 사람은 강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특히나 욕실 청소를 하고 나면 그 전보다 무조건 (+1)씩이라도 강해져 있다. 강해지고 싶으면 욕실 청소를 해야 한다. 처음 욕실 청소하는 날에는 선글라스를 끼고 했다. 도저히 맨 눈으로는 그것들을 볼 수 없었다. 지금은 시리얼을 먹는 표정으로 하수구의 머리카락을 솎아내고 변기를 청소한다. 욕실 곳곳에 락스 칠을 해놓고 영화 한 편을 보거나 낮잠을 잔다. 락스를 씻어 내린 후 빤딱빤딱해진 욕실을 볼 때의 뿌듯함은 내가 혼자 살면서 느꼈던 가장 즉각적이고 효과적이며 가시적인 성과였다.


 혼자가 되면 당연하게도 혼자 해야 한다. 혼자 먹고, 혼자 자며, 혼자 벌레를 잡아야 한다. 도망쳐봤자 혼자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렇게 혼자인 것도 좋다. 나는 결국 도망칠 곳이 없어져야 맞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해버리면 그게 다행이다.

 혼자일 땐 외롭지만,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다는 건 필연적으로 외로워지는 일이라 덜 외로우려고 결혼을 하는가 보다. 외로워져도 좋으니 어른이 되면 좋겠다. 벌레 따위는 손으로 턱턱 잡고 냉장고나 건조기, 티비도 턱턱 고르고 살 수 있는 어른.




* 100일 동안 '하루에 한 개'의 글을 쓰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이 글은 20번째 글이다. 프로젝트는 4월 중순쯤 끝난다. 6월쯤엔 100개의 글을 엮어서 독립출판물을 낼 예정이다. 마음에 드는 글이 써지면 가끔 브런치에도 옮기겠다. 아무쪼록 다들 건강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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