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이 불고 눈이 펑펑 내렸다. 이번 겨울은 유독 춥지 않아서 견딜만했다. 이렇게 봄이 오나 싶었는데, 역시 그냥 지나갈 리가 없다. 오랜만에 겨울 같은 겨울날이었다.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을 봤다. 예전에는 밤을 새우고 영화를 봐도 졸지 않았는데, 요즘엔 앉기만 하면 눈이 감긴다. 졸고 싶지 않아서 설탕을 잔뜩 넣은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아마 커피를 안 마셨어도 졸지 않았을 거다. 재밌고 따스하다. 많이 울었다.
영화를 다 보고 아이스 녹차라떼를 마셨다. 맛이 없었다. 이 카페의 음료는 기가 막히게 맛이 없다는 걸 알면서 왔다. 특히 아이스 녹차라떼는 엉망인데 또 시켰다. 반도 못 마셨다. 그래도 이 동네에서 이 사람이랑 함께 카페에 간다면 이 곳이 제일 좋다.
당신과는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일상만큼이나 쉽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와는 가벼운 이야기조차 무거운 볼링공 같아서 대화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또랑에 빠지기 일쑤다. 모두 이런 '당신'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당신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당연한 듯 보여도, 사실은 우리 사이에 쑥스러운 노력과 수많은 솔직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됐다. 눈 내리는 오늘이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고 반갑고 고마운 이유는 당신과 나처럼 이대로 겨울을 보낼 수 없다는 자연의 의지와 노력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봄에는 꽃이 필 것이다. 이번 여름에는 나시를 입고 돌아다니고 싶다. 가을이 오면 다시 슬퍼질 테고, 겨울에는 눈이 올 것이다. 꽃, 나시, 슬픔, 눈 중 당연한 것은 없다. 그래도 어김없이 돌아오는 것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그리고 가장 변하기 쉬운 존재지만, 변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당신도 있다. 나도 그렇다. 나아지려고 노력할 테지만, 변함은 없기를 소망한다. 눈이 안 내리는 겨울이 오더라도 당신을 사랑한다.
* 100일 동안 '하루에 한 개'의 글을 쓰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이 글은 45번째 글이다. 갑자기 눈이 펑펑 내렸던 2020년 2월 17일에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