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작은 아씨들>
고난은 마음을 깊게 파낸다. 파였기에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파인 마음속에 이야기가 고였다.
첫째는 꿈보다 가난한 사랑을 택했고, 둘째는 끝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셋째는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강한 것이라는 걸 알려줬고, 넷째는 스스로 선택하는 삶이 얼마나 당연하면서 어려운 건지 보여줬다. 네 자매의 모습이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인지하니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언젠간 죽을 걸 알면서도 왜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서로를 미워하고 사랑할까. 미워하기에 인생은 너무 짧고, 사랑하기엔 언젠간 죽는데도 말이다. 루이자 메이 올컷은 어쩌면 이 사실을 알았기에, 제 옆의 사람들을 영원히 사랑하는 방식으로 이 소설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쓴 자전적인 소설이 몇 번의 리메이크를 거쳐 2020년의 영화관에도 걸리고 누군가는 그걸 보고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걸 보면, 그녀의 사랑 방식은 정말로 영원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함께 있어도 개개인의 고독을 스스로 감당할 수밖에 없다. 한 집에 모여 사는 게 당연하게만 느껴졌던 네 자매는 어느샌가 각자의 둥지를 틀고 살아간다. 셋째가 아프다는 소식에 하나둘씩 그 집에 모이면, 함께 웃고 떠들던 어린 시절과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거기에는 부드럽고 다정한 우리 엄마와 지지고 볶았던 자매들이 있기 때문이다. 썰물이 당연하듯 밀물도 당연하다. 어른이 되어 떠나는 게 당연했다면, 사랑하는 이들을 보기 위해 다시 모이는 것도 당연하다. 다시 모여서 모두의 살아있음을 느끼지 않고서는 개인의 고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말 지긋지긋하지만, 우리는 외롭기 때문에. 외롭기 이전에 서로를 어쩔 수 없이 사랑하기 때문에 모이게 된다.
내 삶의 색깔이 흐릿하여 보이지 않고, 내 삶의 향기가 다 날아가버려 맡아지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의 인생은 모두가 한 편의 소설이기에 각자가 주인공이지만 사랑, 자유, 평등에 목숨 걸지 않는 덜 정의로운 주인공이 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오래전부터 나 대신 외쳐주었던 네 자매를 만나고 싶다. 올컷이 남긴 사랑의 방식이 영원할 거라는 사실에 희망을 걸어본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어른들이 자신의 이익에 눈이 멀어 당연한 것을 외면할 때, <작은 아씨들> 같은 고전들이 자라나는 세대에게 올바른 것을 말해줄 거라 믿는다. 각자의 고난으로 움푹 파인 곳에 이야기들이 들어차기를 바란다. 고난을 즐거운 이야기로 바꾸기까지 괴로울지라도 모두 포기하지 않기를. 올컷이 그랬듯이 우리도 그러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