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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박 Mar 06. 2022

#1 아디다스 드래곤

나만 운동화 신은 썰 푼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와 함께 하는 주말 글쓰기 프로젝트.

사고 싶은 게 너무 많았던 어린 시절.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애착 물건이요, 가지지 못한 것들은 모두 위시리스트였던 어린 날.


내가 사랑했던 애착 물건의 역사(the THINGS)의 첫 번째는 중학교 입학식 때 신었던 아디다스 드래곤.






첫인상 : 이 중학교 완전 꼰대네;;

나, 김수박. 중학교 입학 전 나의 스펙을 말해주겠다.


1) 초등학교 시절, 모든 학년에서 운동회 계주 나감

2) 초등학교 전교회장 경험 있음 - 토요 조례마다 전교생 앞에서 MC 봄

3) 방송부였음 (혼자서 아침 영어방송 진행 가능 : 모든 기기 다룰 줄 앎)

4) 초5 때 좋아하던 학원 남자애한테 대차게 차이고 스스로에게 짝사랑 금지 선언

5) 수학경시대회 참가 경력 보유. 수상 경험 있음

6) 초1 운동회 장기자랑 연지곤지 할 때 남자 역할함. 그 외에도 스포츠 댄스 가능. 부채춤 가능


그러니까 나는 초등학교를 꽤나 명랑하고 씩씩하게 보냈으나,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는 생각에 설레기는커녕 교복을 입는다거나,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녀야 한다거나, 3학년 언니들이 짱 무섭다는데 어떡하지 하는 걱정들로 휩싸여 있었다.


나는 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전에 주의사항이 빼곡히 적힌 종이를 받고 달달 외울 수준까지 읽고 읽었지만 떨리는 마음을 잠재울 수 없었다. 중학교에서 찍히지 않으려면 지켜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일단 양말은 복숭아 뼈를 덮는 길이어야 했다. 어떠한 무늬도 들어가면 안 됐고, 하얀색 양말만 허락됐다. 음.. 벌써부터 노잼이었지만 어쩔 수 없지. 다음 주의사항.

머리 염색 무조건 금지. 귀걸이도 금지. 네일아트도 금지. 이것 역시 노잼이지만 패스.

치마 길이, 머리 길이 등 자잘한 주의 사항들이 더 적혀있었지만 내가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신발'이었다. 꽤나 자세하게 적혀있는 가이드. '검은색 로퍼' 혹은 '검은 운동화' 혹은 '흰 운동화' 중 택 1이었다. 만약 무늬가 들어가 있더라도 다른 색들은 안되며 흰색이나 검은색 무늬가 들어간 것으로 신으라 했다. 차분하고 얌전한 여중생들을 원했던 어른들의 기가 막힌 생각들.

로퍼든, 얌전한 운동화든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던 자랑스러운 前 전교회장 김수박은 중학교 입학을 맞이하여 문정동 로데오거리를 찾았다.




이거 얼마라고요?

아빠와 함께 찾은 문정동 로데오거리. 일단 로퍼를 한 번 신어볼까. 딱딱한 바닥과 발볼을 조여 오는 가죽. 어쩐지 이걸 신고는 행복한 중학교 시절을 보낼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에 흰 양말까지 신어야 하잖아요. 전 이거 하고 싶지 않아요.

뚱해진 내 표정을 한 번에 읽은 아빠는 운동화로 노선을 틀었고, 우리는 문정동 로데오 거리를 누비며 얌전한 운동화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했다. 나는 유행을 잘 아는 우리 오빠와 오고 싶었지만, 오빠가 같이 가주지 않아 아빠와 함께 온 것이 불만이었다.

어차피 교복은 똑같으니까, 가방과 신발로 기선 제압을 해야 한다고요..!!


게다가 운동화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서 선뜻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원래 운동화가 이렇게 비싼 거였나...? 맨날 시장 운동화만 신다가, 6학년 생일에 선물 받은 스프리스 운동화를 신고 나왔으나 문정동 로데오에서는 주눅 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결국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나마 싼 운동화를 골랐고, 우리는 그렇게 문정동 로데오를 떠나는 줄 알았다.


감정을 숨길 줄 몰랐던 14살 2개월 차, 김수박. 자꾸 뒤에 꿀 발라놓은 듯 머뭇거리자 아빠는 다시 내 손을 잡고 매장으로 들어섰다. 파란색 간판에 아주 크기가 작은 매장이었다. 아디다스 전문점이었을까? ABC마트? 아니면 아울렛?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빠는 "아무래도 학교 규정상 저 운동화를 사야 할 것 같소"를 선언하고 아디다스 드래곤을 가리켰다.




기선제압 실패한 입학식 썰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1학년 2반에 앉았다. 담임 선생님은 한 명, 한 명 반 친구들의 이름을 호명했고, 이름이 불린 친구는 교실 앞으로 나가 담임 선생님을 마주했다. 담임 선생님은 무언가를 건네주시면서 아이들의 옷차림을 스캔했다. 위, 아래로 움직이는 눈동자를 지켜보기를 몇 분, 나는 이상함을 감지했다.


왜... 다들 노잼 로퍼를 신은 거야...? 나만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야...?


이미 거금을 들여 운동화를 사버렸는데, 로퍼를 또 사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 나이에 '나만 빼고' 다들 뭔가를 하고 있다는 건 무서운 일이었다. 혹시 운동화가 적힌 주의사항은 잘못 온 게 아닐까? 로퍼만 신으라고 다시 보냈는데 나만 못 받은 거지... 여러 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쳤으나 담임 선생님은 내 운동화를 보고 별말씀이 없으셨다. 하지만 다시 자리로 돌아오는 내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노잼 로퍼 홍수 속 멋진 최후의 드래곤 1인이지만 그날의 나는 아주 작아졌던 것 같다.

우리 아빠의 거금, 문정동 로데오의 긴장, 그냥 로퍼 사지 왜 고집을 부렸을까-가 씨실과 날실이 되어 단단하게 엮였다. 지금도 생각나는 걸 보면, 난 아직도 이 날의 실타래를 풀지 못했나 보다.




하지만, 그 시절 문정동 로데오로 돌아가 로퍼와 운동화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다시 운동화를 고를 것이다. 학교 갈 때도, 학원 갈 때도, 놀러 갈 때도 나와 함께 한 아디다스 드래곤은 1년 만에 사망했고 나는 그를 홀가분하게 보내줬다. 택을 뜯어 온전히 내 것이 되었을 때, 검은색 스타킹에 흰 운동화라 튀어서 조금 후회했을 때, 다른 애들도 학기 중에 운동화를 하나둘씩 신고 왔을 때를 지나 내가 아디다스 드래곤을 신었다는 인식조차 흐릿해질 때쯤 낡아서 버렸다. 어디로 갔을까? 인도네시아든 태국이든 어디로든 가서 제2의 역할을 다 했다면 더 기쁠 것 같다.


내가 고른 첫 번째 운동화로 와줘서 정말 고마웠다. 나중에 꼭 한 번 다시 신으러 갈게.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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