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이 없던 시절
내 인생 첫 번째 핸드폰이다. 저 아이를 품에 안았던 날이 기억난다.
가장 친한 친구는 집전화가 없다는 이유로 초3부터 핸드폰을 갖고 다녔고, 중학교에 입학하자 주변 친구들에게도 하나둘씩 핸드폰이 생기기 시작했다. 초조하고 부러운 마음을 숨길 수 없었으나, 사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졸라서 될 일이 있고, 졸라도 안 될 일이 있고, 조르면 안 되는 일이 있다. 핸드폰은 조르면 안 되는 일이었다.
어느 날, 막내 삼촌이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나에게 박스를 건넸다. 그 박스에는 싸이언 폰이 얌전히 누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촌이 좋은 거 갖고 간다"라던가 "오늘 수박이 집에 있니?"같은 언질도 없이 갑자기 핸드폰을 들고 나타났다. 역시 삼촌은 멋을 아는 사람이다.
지금 보면 말도 안 되게 두껍고, 무거운 폰이다. 교복 치마 주머니가 항상 불룩했고, 바지 주머니가 항상 늘어나 있었다. 그렇지만 손가락으로 아주 살짝만 건드려도 부드럽게 넘어가는 슬라이드 화면이 나에겐 무엇보다도 멋지게 느껴졌다. 대부분 세로 화면이었던 핸드폰 시장에서 가로 화면에 맞는 최적의 배경화면을 찾기 위해 매일 모키토키를 뒤적였다. 키패드가 닳도록 문자를 했고, 소중한 문자들은 보관함에 따로 넣어놨다. 글씨체는 무조건 기본에서 바꾸지 않았고, 핸드폰이 손에 익었다 싶으면 언어 설정을 영어로 바꾸곤 했다.
고등학교 가서는 막내 삼촌이 연아햅틱으로 바꿔줬다. 간지에 죽고 간지에 살던 나는 모토로라 페블(일명 조약돌폰)이나 레이저를 갖고 싶었으나 막상 핸드폰 가게에 들어가면 합죽이가 되곤 했다. 하지만 핸드폰 가게 사장님이 매직홀 폰을 추천하는 순간 그것만은 싫다고 했고, 결국 그 당시 가장 최신 폰이었던 연아햅틱으로 바꾸게 됐다. 역시 삼촌은 멋을 아는 사람이다. 애매한 건 하지 않는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아이폰4S까지 책임지시고는 조카의 핸드폰 키다리 아저씨 사업을 접으셨다.
5학년 때 날 찼던 남자애가 중학교 가서 나에게 문자를 먼저 보냈을 때. 친구랑 싸울 때. 아빠가 생일 축하한다고 문자 했을 때. 축축한 손으로 몇 번이고 지웠다 썼던 답장들이 아직도 선명하다. 나의 작은 분신들은 내 모든 걸 알고 있고, 내 모든 마음을 대신 말해줬다. 아주 작은 화면에 가득 들어찬 20여 개의 글자들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진심들. 잘 전달이 됐을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문자 세대임을 감사하게 여긴다. 오히려 그 전인 편지나 삐삐 세대였으면 더 좋았을 거다. 나는 다시 문자 시대로 돌아가라고 하면 무조건 예스다. 커플 요금제. 비기알 충전. 미니게임천국. 누르는 게 느껴지는 물리 키패드. SK텔레콤 현대생활백서... 낭만으로 포장되는 그 시절의 답답함과 느린 속도를 좋아한다.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 했던 시간들과 그렇기에 우리 사이에 생겼던 가능성들을 사랑한다. 문자의 한계로 생겼던 아름다운 오해들과 그걸 풀어가는 과정들을 좋아한다. 평생 잊지 못하는 몇 개의 문장이 생긴 이 시절. 다시 오지 않으므로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두껍고, 무겁고, 불편한 핸드폰 시대.
우리는 해야 하는 말보다 더 많은 걸 말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어서 안 해도 될 말을 하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꼭 말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1234여도 말해주지 않으면 모른다. 그러니까 편지든, 삐삐든, 문자든, 카톡이든, 브런치든, 틱톡이든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사람에게는 각자 꼭 해야 할 말들, 전달해야 할 메시지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문자 시절의 낭만을 더 좋아하지만, (카톡이든 뭐든) 우리가 나누는 대화에는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우리는 카톡마저도 안 하는 시대에 살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때에도 우리들의 대화는 나름의 방식대로 가치를 찾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브런치가 누군가에게 닿고 있는지, 누가 읽어 주고는 있는지, 답장이 오기는 할런지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나 혼자 보내는 이 편지 같은 글에서 내가 모르는 누군가와 아주 가치 있는 교감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 긴긴 문자를 누가 읽어줄까. 걱정도 살짝 곁들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