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시작, 그리고 도전
매주 금요일에 만나서 함께 저녁도 먹고 안부도 주고받으며 보드 게임을 하던 친한 부부 모임이 있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몇 주 째 우리는 영상으로 대신 만났다. 평소와 같이 요즘 즐겨보는 예능과 드라마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코로나로 인해 생긴 거리감을 온라인으로나마 좁히고 있었다. 나는 얼마 전 한국에서 치러진 4.15 총선에 대해 말하면서 “이번에 최초로 북한 출신이 당선되었어요!”라고 기분 좋게 이야기를 꺼냈다. 사랑의 불시착 후기를 시작으로 깔깔거리며 가볍게 흘러온 주제였다. 그러나 생각보다 반응이 냉담했다.
“알아. 들었어. 좀 무섭더라.”
2014년 여름에 고등학생 영어 과외를 한 적이 있다. 강인이를(가명) 북한이탈 청소년 대안학교에서 처음 봤을 때 나는 나와 같은 봉사자인 줄 알았다. 겉모습도, 말투도, 신조어 스킬까지 오히려 연이은 미국 생활에 약간 감 떨어진 나보다도 더 세련된 남한 사람 같았다.
강인이는 어릴 적 탈북을 해 초등학생 때부터 남한 학교를 다니면서 말투를 비교적 빨리 고칠 수 있었고, 남한에서의 생활이 오래되어 남한 사회에 문제없이 적응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강인이가 잘 다니던 남한 학교를 나와 북한이탈 청소년 대안학교로 전학을 왔다. 다른 북한 출신 학생들에 비해서 영어 실력이 월등히 높았던 강인이는 1인 지도가 필요했고, 그렇게 나는 3개월간 강인이 전담 영어 선생님이 되었다.
밝은 아이였다. 축구를 좋아하고 학교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래 여자 친구도 만들고, 장난기 많은 여느 고등학생의 모습이었다. 가르치면 곧잘 따라왔고, 나한테 매 단원 퀴즈를 보자고 할 정도로 학구열이 높은 친구였다. 강인이를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난 궁금증이 더 해졌다. '강인이 정도면 남한 학교에서도 충분히 적응도 잘하고 곧잘 따라갔을 텐데… 왜? 왜 굳이 이리로 전학을 왔을까?' 궁금했지만, 그곳에서 나는 아이들이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와서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 그 친구들의 과거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았다. 강인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이탈 청소년 학교로 봉사를 오는 뜨내기 자원봉사자들이 많아서 학생들은 낯선 이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자원봉사자들 중에는 한두 번 신기해서 왔다가 흥미가 사라지면 발길을 끊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그래서 그곳 학생들은 믿음이 생기기 전까지는 먼저 말을 걸지도 잘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일단 마음을 열고나서는 정말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해주었다. 그 친구들을 통해서 나는 북한 꽃제비들이 어떻게 배고픔을 견디는지, 북한에서는 성형 수술을 어떻게 하는지, 북한에서 토끼 사냥은 어떻게 하는지 등등을 들을 수 있었다. 새롭게 알게 된 북한 생활상보다 나는 아이들이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와줬다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웠고 고마웠다.
강인이도 그렇게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면 고마운 거고 아니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렇게 강인이와의 과외가 계속되었다. 나중에는 내 흉내를 내면서 종알종알 문제를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같이 푹푹 웃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강인이가 내게 말했다.
“쌤, 북한 사람들은 남한에 목숨 걸고 와요. 그런데 막상 오면 아무도 우릴 반기지 않아요. 남한 애들은 우리가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무시하고 따돌려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그리고 장난기 없는 강인이의 표정에 나는 순간 어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너도 따돌림당했어?”
강인이의 밝은 웃음이 혹시나 지난 상처를 감추려고 만들어낸 모습인가 하는 마음이 들어 순간 겁이 났다.
“아, 아뇨. 저는 아니었어요. 저는 그냥 강원도에서 왔다고 하면 애들이 다 믿었어요. 초등학교부터 여기서 다녔으니까, 제 또래 남한 애들이 뭐 하면서 놀고 자랐는지 어느 정도 다 아니까 애들이 제가 북한에서 왔는지 아예 몰랐어요.”
이야기는 이러했다. 강인이는 남한 학교에서 나름 친구도 많았고 학교 생활도 잘하는 아이였다. 그런 강인이의 학교에 탈북을 해서 이제 막 하나원에서 나온 학생이 전학을 왔다. 말로만 듣던 탈북자가 전학을 왔다는 소문이 학교에 싹 퍼졌고, 그 학생은 동물원 원숭이 신세가 되었다. 쉬는 시간마다 이 친구를 구경하려고 중학생 남자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짓궂게 장난을 쳤다. 아이는 좀 참다가 더는 견딜 수 없어 반항을 했고, 이를 아니꼽게 본 아이들이 그 친구를 심하게 왕따 시켰다.
이야기를 듣는데 속이 거북했다. 구석구석 속사정은 모르지만, 분명 탈북을 하는 과정에서 생사를 오가는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있었을 거고, 가장 어두운 곳만 찾아다니며 숨죽여 지내야 했을 거고, 동남아 국가를 거쳐오는 과정에서 그 어린 나이에 감옥 생활을 해야 했을 거고, 혹시나 아직 북한에 가족이 남아있다면 자신으로 인해 가족이 위험에 처하지 않을까 남한에 와서도 마음이 늘 불안했을 거다. 그렇게 온 남한이다.
그러나 도착한 학교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온갖 외래어와 영어가 난무하고 북한에서는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을 급식으로 먹고 소화를 못 시키는 날들도 많았으리라… 그렇게 모든 게 낯설고 힘들지만, 그래도 이 친구는 남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려고, 북한에서는 누릴 수 없었던 자유를 누리며 새로운 도전을 해보려고 온 용감하고 대단한 중학생이다. 잘 왔다고,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고 꼬옥 안아줘도 모자랄 판이다.
그러나 남한 학교에서의 생활은 이 친구의 시작과 도전을 잔인하게 짓밟아 버렸다.
끝내, 이 친구는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했다.
남한 학교에서 쏟아지는 차별과 멸시는 한창 사춘기 예민한 나이의 중학생에겐 너무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남한만 가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그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온 자기 자신이 용서가 안되었을 것이다.
강인이는 그 친구가 탈북자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할 때 그 친구 편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만에 하나 자신도 탈북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다음 타깃은 자신이 될 것 만 같았다. 어쩌면 거짓말을 했다고 더 심하게 따돌림을 당했을지도 모르겠다. 무서웠던 강인이는 그 친구를 외면했고, 그 친구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강인이는 그 사건이 있은 후에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고, 남한 사회에 환멸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숨기고 살아온 10년이란 세월을 뒤로하고 북한이탈 청소년 학교로 들어왔다.
약속된 3개월이 끝난 후 나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강인이와의 연락도 끊겼다. 지금쯤 강인이는 대학을 가서 졸업을 했거나 졸업반의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마음을 열어서 자신의 속 이야기를 해줬는데, 그렇게 날 믿어줬는데, 여느 뜨내기 선생님들처럼 나도 그렇게 강인이와 연락이 끊겼다.
강인이와의 만남 이후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대학원을 들어갔고, 또 졸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취업을 하고, 퇴사도 했다. 인생에 많은 변화들이 생기며 정신없이 살다 보니 연락이 뜸해진 거라고 자연스러운 거라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비겁하지만, 내가 만난 학생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겠다고,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선 최선을 다해서 목소리를 내주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러나 그 다짐마저 서서히 잊혀 갔다.
“알아. 들었어. 좀 무섭더라.”
이 한마디에 나는 마음이 철렁했다. 내가 잊고 있던 다짐을 마주했다.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강인이가, 그리고 더는 이 세상에 없는 그 이름 모를 친구가 떠올랐다. 너무 미안했다. 그 친구가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바랐던 북한이탈주민들을 향한 남한 사회의 따뜻한 이해와 포용이 아직 많이 부족함을 느꼈다.
부디, 나는 강인이가 그리고 지금 남한 사회 있는 3만 5천 명이 넘는 수많은 이들이 '탈북자'라는 프레임에서 자유로워져 한 개인으로서의 삶을 멋지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들의 낯선 곳에서의 시작을 뜨겁게 응원한다.
그리고 나는 그 프레임을 부수기 위해 내 할 일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