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s Pick 서울 핫 플레이스 7: 피맛골
지난 시간 동안 서오릉과 창덕궁을 구경하면서 조선시대의 궁중 여인들과 왕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신분이 높아 먹고살 궁리는 안 해도 되었지만, 그들 나름대로 궁중 내의 정치적 암투로 인해서 속이 멀쩡한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궁궐 바깥 사정은 평안했는가?
골 아픈 일로 하루하루 피 말릴 필요는 없었겠지만 당장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했던 백성들의 삶도 편치 않았으리라. 국가 곳간을 채우는 건 다 백성들의 몫인데 늘 높은 사람들에게 핍박받고 수탈당하는 것도 그들이었다. 때 되면 지역 특산물을 바치고, 가끔씩은 국가적 사업에 동원되어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고, 전쟁이라도 나면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다. 나랏님들이야 스트레스 깨나 받겠지만 재물도 많고 위세라도 떨면서 살지, 백성들은 배는 곯고 몸은 고돼도 힘들다고 위세를 떨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런 그들의 불만과 피로를 고스란히 담아낸 지역명이 있으니 그게 바로 종로 2가 골목길 피맛골이다.
태조 3년 조선을 건국하고 새로운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고 궁궐 주변에 왕과 고관들이 다니는 큰길을 만들었다. 그곳이 바로 종로다. 종로는 상인, 중인, 천민의 생활 터전이기도 했다. 이들은 여기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 말을 탄 고관들이 지나가면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고관대작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 엎드려 절을 해야 했다. 하루에 시간을 정해놓고 한번 정도만 오가면 모르겠는데 이건 뭐 고관대작들이 한 두 명도 아니고 수시로 아무 때나 들락날락거리니까 그때마다 엎드려 절하는 게 여간 짜증 나고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화장실이 급하거나 긴급하게 어디를 가려고 하다가도 고관들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천천히 종로를 지나간다면 엎드리는 백성들 입장에선 정말 싫었을 것 같다. 그런 꼴사나운 양반들을 피해 백성들이 애용하던 뒷길이 바로 피맛골이다. 피할 피 말 마 뜻의 피맛골은 원래 피마골로 불렸다.
양반들이 저 멀리서 말을 타고 오는 게 보이면 백성들은 종로 큰 거리에서 다들 우르르 피맛골로 숨어 자유롭게 자기 갈 길을 가곤 했다. 오죽 짜증 나고 힘들었으면 이랬을까 싶다. 피맛골은 서민들의 아지트였다. 다들 양반 놈들 피해서 모인 곳이니 아마 이곳에서 마주치는 서민들끼리는 모르긴 몰라도 연대 의식 같은 게 있었을 것 같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나는 담임선생님을 좋아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지금 내 나이 정도의 담임 선생님이었으니까 제법 어린 나이에 임용에 합격해서 겨우 10살 정도 차이 나는 애들을 가르치니 선생님도 매우 힘드셨을 것 같다.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다 보니 선생님도 우리를 대할 때 요령 없이 무조건 학생들을 자신의 규율 안에 가두려고만 했었다. 감수성도 풍부하고 구속되는 걸 싫어하는 청소년기에 그렇게 강압적인 선생님을 우리는 싫어했다. 오후 4시 청소 시간에 좀 피곤하고 지쳐서 잠깐 쪽잠을 자려고 하는 애들 또는 청소 당번이 아니라서 모처럼 기지개도 켜고 교실에서 수다 떨고 있는 애들이 있으면 큰 몽둥이를 들고 와서 칠판을 탁탁 치면서 자는 애들을 다 깨우고 일동 청소를 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4시만 되면 담임 선생님을 피해서 모두 동아리 방에 모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매점에서 사 온 컵라면을 후후 불어 먹기도 하고 너무 피곤할 땐 20분 쪽잠을 자기도 하고 좋아하는 가수 음악을 듣곤 했다. 동아리 방에서의 시간은 담임 선생님을 피해 짧게나마 자유를 만끽하는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조선시대 백성들에게 피맛골은 그런 곳이었으리라 생각하니 나 또한 피맛골의 백성들의 심정이 십분 이해가 갔다.
그렇게 서민들이 모이는 곳이니 피맛골에는 서민들이 좋아하는 음식점들과 선술집이 자연스럽게 많아졌다. 해장국, 빈대떡, 생선구이, 장국밥 집들이 피맛골에 즐비했다. 피맛골은 이렇게 서민들이 자주 모이고 몰려드는 아주 활력 넘치는 곳이었다. 그래서 피맛골에서는 서민들 위주의 경제활동이 활성화되었다. 피맛골 입구에는 피마병문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쉽게 말해 오늘날 인력시장과 같은 곳이었다. 조선시대 지게꾼, 인력거꾼, 물지게 장사들이 피마병문에 서서 일거리를 찾아 대기하고 있으면 그때그때 일손이 필요한 사람들이나 가게 주인들이 피마병문으로 가서 부족한 일손을 채우곤 했다. 백정도 이 가운데 한 명이었다. 국밥집에 고기를 대주는 역할을 했던 백정들에겐 피맛골이 아주 중요한 삶의 터전이었다.
백정들은 피맛골 맞은편 오늘날 종로구 관철동에 많이 모여 살았다. 백정 박 가도 이곳에 살았다. 관철동에 살며 피맛골에 고기를 대던 이 사내는 나이도 모르고 이름도 없어 박 가라고만 불렸다.
당시 조선은 천민을 7개로 구분했다. 광대, 포졸, 고리장, 무당, 기생, 갖바치, 백정까지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일곱 천인이라 뜻의 칠천반 중에서도 백정은 가장 낮은 신분이었다. 인도 카스트 제도로 따지면 수드라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인간이 아니라고 여겨졌기에 백정은 장가를 들어서도 상투를 틀지 못했고, 갓을 쓰거나 도포를 입을 수 없었고, 코찔찔이 어린아이들도 백정을 하대했다. 이 슬프고 한스러운 백정의 신분은 대를 물려 세습되었다. 박 가에게도 백정이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난 어린 아들이 있었다. 박 가는 어린 아들에게 백정에게는 사치인 이름을 선물해 주었다. 그 아들의 이름은 박봉출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에 서양 선교사가 왔다. 미국인 사무엘 포맨 무어라는 이름의 선교사는 오자마자 고아나 가난한 집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당을 열었다. 조선어 습득이 빨랐던 무어 선교사는 자신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고치고 학당에 오는 아이들을 차별 없이 가르쳤다. 이 소식이 박 가의 귀에도 들어가고, 아들이 자신과는 다른 인생을 살았으면 했던 아버지는 아들 봉출이를 무어 선교사의 학당에 보낸다. 그리고 봉출이는 성실하게 학당에서 산수와 글을 배운다.
우리나라에 무서운 전염병 콜레라가 창궐한다. 당시에는 치료법도 없었고 이름도 몰라 콜레라를 괴질이라고 불렀다. 수많은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다. 치료법을 몰랐던 백성들은 샤머니즘에 의존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쥐 귀신과 같은 악귀가 몸에 들어갔다고 믿어 고양이 부적을 문 앞에 부치고 무당을 불러다 굿을 하여 전염병을 막고자 했다. 백정 박 가도 이 무서운 전염병에 걸려서 생사를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한낱 백정의 목숨은 하찮게 여겨 그 누구도 박 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아버지를 꼭 살리고 싶었던 봉출이는 무어 선교사에게 달려가 제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무어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의 올리버 알 에비슨에게 도움을 청하고, 에비슨은 달려와 박 가의 병을 치료한다. 에비슨은 다름 아닌 고종의 주치의였다. 임금을 치료하는 손으로 백정의 몸을 만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서양인 에비슨에게는 고종도 박 가도 다 똑같이 귀중한 생명이었다.
에비슨의 왕진으로 죽을 위기를 넘긴 박 가는 이전과 같은 삶을 살지 않기로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에비슨이 박 가의 몸뿐만 아닌 마음을 치료했던 것 같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백정으로 멸시와 차별을 받고 조선인 그 누구도 자신을 살리려고 하지 않았지만, 고종의 주치의는 자신을 사람으로 여기고 살려냈다. 이렇게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박 가는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무어 선교사가 목사인 교회에 들어가 교인이 된다. 모든 인간을 똑같이 사랑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약하고 소외받는 계층을 사랑하는 예수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은 박 가는 백정 최초로 세례를 받는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부으라는 말씀과 같이 박 가는 에비슨에게 새로운 생명을 선물 받고 새로이 태어난 자신에게 이름을 선물했다. 봄을 맞아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박성춘으로 짓는다. 그리고 아들 봉출이의 이름도 상서로운 태양이 되라는 의미에서 박서양으로 고쳐준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이들의 변화를 반기지 않았다. 박성춘이 교회에 나오자 잘 나오던 양반 신도들이 출석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교회가 백정 교회로 소문이 나면서 양반들은 백정과 같은 장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박 가를 내쫓든지 아니면 백정과 양반을 나눠서 예배를 보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벌써 신분제가 철폐되었지만 500년간 고착화된 신분제와 백정들을 향한 차갑고 멸시 섞인 시선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박성춘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분해방을 해달라고 국가에 탄원서를 낸다. 박성춘의 간절한 바람은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아들 서양이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해주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그리고 결국 박성춘의 탄원이 받아들여져 1896년에는 백정들이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을 수 있게 되었고 이들의 이름도 호족에 올리는 것이 허락되는 대대적인 변화들이 일어난다.
신분 해방을 아들에게 선물한 아버지 박성춘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제 제도적 신분제에서 해방되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신분 해방을 위해 아들이 교육을 받아 스스로 깨우치길 원했다. 이전엔 백정이라면 꿈꿔볼 수 없는 일을 해서 백정을 향한 오래된 사회적 편견과 시선을 아들이 깨부수길 원했다. 그래서 박성춘은 당시 제중원 (오늘날 세브란스 병원)의 원장이었던 에비슨에게 찾아가 아들 서양이를 제중원으로 데려가 서양 의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달라고 부탁한다. 박서양을 받아들인 에비슨은 2년간 서양이를 시험하기 위해 허드렛일만 시킨다. 2년간 군말 없이 묵묵히 시키는 일을 부지런히 다 하는 서양이를 보고 에비슨은 서양이가 힘든 의술 공부를 배울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정규 과정에 입학시킨다. 박서양은 의사 수련 중에도 틈틈이 배움에 목마른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자신과 같이 배우고는 싶은데 형편이 여의치 못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화학과 생물학을 가르친다.
그러던 1907년, 제중원에서 이름이 세브란스로 바뀐 병원에서 일을 하고 있던 서양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일이 일어난다. 여느 때와 같이 서양이는 열심히 서양 의학을 공부하고 실습을 하고 있었다. 나라가 어지러운 것은 알고 있었으나 빡쎈 학업으로 시국의 사태가 직접 와 닿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보낸 사실이 밝혀지면서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조선인들의 마지막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나라가 위태롭긴 해도 어디 일본 사람이 우리 국왕을 함부로 퇴위시킨단 말인가!
조선인들의 분노에 불을 지핀 일 있었으니 그게 바로 정미 7 조약이다. 일본은 그간 복병이었던 우리나라 군대를 강제 해산시킨다. 이에 분노한 대한제국 시위대가 들고일어난다. 그리고 일본군과 접전이 일어난다. 세브란스 병원 근처에서 대한제국 군대와 일본군 사이의 총격전이 일어나고 여기서 부상당한 대한제국 군인들이 세브란스 병원으로 실려왔다. 마침내 박서양은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라 없는 민족의 암담한 미래를 마주하게 된다.
일제에게 대한제국이 완전히 넘어가게 되자 박서양은 간도로 이주한다. 간도로 간 박서양은 세상을 구한다는 의미의 구세의원을 세우고 그곳에서 의료혜택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수많은 동포들을 대상으로 병원을 운영한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간도로 이주한 수많은 동포들에게 박서양의 존재는 정말 상서로운 태양과 같았을 것이다. 구세의원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유일한 병원이었다. 그래서 구세의원에는 매년 만 명이 넘는 동포들이 왔고 박서양은 이 중 상당수를 무료로 진료한다.
박서양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백정으로 태어났지만 교육을 통해 생각이 열리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 트인 경험이 있는 박서양은 누구보다 교육의 중요성을 알았다. 박서양은 간도에 조선어를 가르치고 민족교육에 비중을 두는 숭신학교를 세웠다. 한반도에서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감히 받을 수 없었던 민족교육을 받은 간도 숭신학교 출신 학생들은 급기야 간도 심장부에서 만세 운동을 한다. 항일 운동의 중심 학교가 된 숭신학교는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가 된다.
그러나 박서양은 좌절하지 않았다. 3.1 운동 당시 일제의 잔학한 무력 진압에 목숨을 잃은 수많은 우리 민족을 본 독립운동가들은 손에 쥐었던 태극기는 마음에 새기고 대신 총과 칼을 들었다. 본격적인 무장독립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국내에서 무장독립운동을 뿌리내리기 어려웠던 독립운동가들은 만주 지역으로 가서 무장독립전쟁을 준비한다.
박서양의 능력과 재능이라면 한 곳에 정착해서 충분히 배불리 먹고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서양은 그런 편안한 삶을 거부했다. 도리어 자신이 영위하고 있는 이 삶은 아버지의 노력으로 선물처럼 받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자신의 일생을 바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북만주 지역의 항일 무장투쟁의 최전선으로 간다. 그곳에서 박서양은 피 흘려 싸우는 독립군을 치료하는 군의관이 된다.
나는 처음 박서양을 KBS 역사 다큐 “백정 아버지와 서양의사 아들”을 통해서 접했다. 제목이 흥미로워 시청하게 된 다큐를 마칠 때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나는 이번에 그 다큐를 찾아 다시 한번 봤다.
과연 나 같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생각이 되었다.
내가 만약 백정 아버지 박성춘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았다.
비록 내가 천대받았지만 내 아들만큼은 고개 들고 갓도 쓰고 도포도 휘날리며 살게 하고 싶었을 거다. 거기까지는 박성춘의 마음과 같다. 나야 30년 넘게 백정 노릇을 하고 살다가 죽을 뻔한 목숨 공짜로 한번 더 살게 된 셈이니 아쉬운 게 없다. 다만 똘똘한 내 아들만큼은 구김 없이 편하게 살게 하고 싶어서 신분 해방운동에 앞장섰을 거다. 당시 1920년에 우리나라에서는 백정들의 형평운동이 한창이었으니까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해 아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해주려고 노력했을 것 같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신분 해방이 되고 난 이후에는 난 박성춘처럼 못했을 것 같다. 서양 의술을 익힌 한국 최초의 의사가 된 아들 서양이가 내 몫까지 누리며 적당히 대접도 받고 돈도 벌어서 단란한 가정 꾸리면서 편안하게 살길 바랬을 것 같다. 그러나 박성춘은 아들을 조국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바쳤다. 백정 최초로 세례를 받고 훗날은 장로가 된 박성춘은 서양이가 더 이상 자신의 아들이 아닌 나라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서양이가 좁은 길을 가도록 아버지 성춘은 인도했다.
위험천만하고 고되고 혹독한 독립운동의 길을 가라고, 그렇게 힘들게 배운 재능을 독립운동하는데 쓰라고 아들을 간도로 만주로 보냈다. 아들 박서양은 그런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 비록 백정 출신이지만, 늘 세상의 바꾸는 일에 앞장섰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편안한 삶보다는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다.
국가는 오랜 시간 백정이라고 멸시를 하고 그들의 목숨마저 하찮게 여겼지만 박성춘 박서양 부자는 그런 조국을 품었다. ‘한 많은 이 더러운 세상 이제 어디 한번 떵떵거리고 살아보자’가 아니라 ‘이젠 내가 고기 나르는 일 외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니 이 한 몸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보자’ 하고 조국을 품었던 박성춘 박서양 부자의 마음이 너무 넓고 투명해서 그들의 이타성과 순수함 앞에 내 이기적인 마음이 적나라게 비쳤다. 박 부자의 삶이 나를 너무도 숙연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