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여성의 장신구 가체, 첩지, 떨잠에 대하여
나는 어릴 적부터 패션에 남다른 고집이 있었다. 맞벌이 부모님 밑에서 자란 나는 매일 아침 엄마가 엄청 고생한 사실을 알고 있다. 엄마가 출근 하기까지의 시간은 전쟁을 불사했다. 칭얼대는 오빠와 나를 깨워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유치원에 데려다 주다 보니 정작 엄마는 출근 준비를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온순한 (다른 말로 패션감각이 전혀 없는) 오빠는 엄마가 아침에 꺼내 놓은 옷을 군말 없이 그대로 입었다. 그러나 나는 엄마가 입히는 옷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가 마음에 드는 옷을 찾아 입을 때까지 등원을 거부했다. 오랜 고심 끝에 마음에 드는 옷을 만족스럽게 골라 입고 난 이후에는 엄마에게 그날의 스타일에 어울리는 머리를 해달라고 졸랐다. 레이스 원피스를 입은 날에는 디스코 머리를 해달라 멜빵바지를 입은 날에는 사과 머리를 해달라…
나는 요구하는 게 굉장히 많은 패션에 민감한 (까다로운) 아이였다.
어릴 때는 엄마가 나를 깨나 피곤해했지만, 내가 제법 크고 나서는 나 없이 옷을 사는 법이 없다. 늘 내가 한국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필요한 옷을 사곤 한다. 그리고 누군가 “어머, 오늘 정말 멋지시네요”라는 칭찬이라도 하면 “아휴, 우리 딸이~”이러면서 나의 패션 센스를 칭찬한다.
나도 개인적으로 “똘똘하다,” “총명하게 생겼다,” “야무지다” 등등의 칭찬보다 “옷 잘 입는다,” 혹은 “스타일이 좋다”라는 칭찬을 들을 때가 가장 좋다. 이렇게 스타일에 민감한 내가 조선시대 복식에 관심이 가는 건 어쩌면 필연적인 것일지 모르겠다. 조선시대 패션 하면 궁중 복식만 해도 엄청나게 다양하다. 옷뿐만 아니라 신발이며 각종 장신구며 다룰 주제가 정말 많지만 그중 내 마음을 빼앗은 것은 바로 가체다. 한복이야 오늘날에도 궁궐 투어를 하면서 많이 접하고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한복을 입어 본 경험이 있지만, 가체는 쉽게 체험할 기회가 없다. 그래서 나는 꼭 민속촌을 가면 가체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가체가 있으면 주저 없이 써본다.
직접 써보면 헉할 정도로 정말 무겁다. 보통 7kg에서 정말 무거운 가체는 10kg 이상이다 보니 가체를 머리 위에 올리면 거북이 마냥 목이 쏙 들어간다. 지금까지 가체를 두세 번 써보면서 ‘아니 이 무거운걸 왜 쓰려고 했을까… 이게 뭐라고…’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서 가체가 갖는 의미와 조선시대 여인들이 가체에 집착했던 이유가 궁금해졌다.
요즘 여성들의 고가의 패션 아이템은 명품 가방 정도가 되겠다. 어떤 브랜드의 신상 명품백을 들고 다니느냐에 따라 여성들은 암묵적으로 상대방의 재력이나 트렌디함을 파악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여성들이 이렇게 명품 가방에 신경을 쓰는 DNA는 어쩌면 조선시대 때부터 시작된 게 아닐지 생각이 된다.
가체는 조선시대 여인들의 중요한 자기 과시 혹은 자기표현의 수단이었다. 요즘과 같이 명품 백 외에도 선글라스, 립스틱, 악세사리, 구두 등등의 여러 가지의 표현방법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조선시대는 엄격한 유교적 분위기 속에서 사치품들이 금지되었다. 가체가 거의 유일하게 허락된 장신구였고, 다른말로 여성들이 자신의 권위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조선시대 여인들은 가체를 더 높고 풍성하게 만들어 그곳에 (마치 한을 풀듯) 온갖 장신구들로 화려하게 치장했다.
가체가 중요했던 또 다른 이유는 조선의 미의 기준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여성의 머리카락이었다. 머리카락이 얼마나 풍성하고 윤이 나는가가 조선의 미인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요즘처럼 트리트먼트나 아르간 오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미용실에 가서 헤어크리닉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조선 여성들은 풍성하고 반지르르 윤기가 흐르는 가체로 조선의 미의 기준에 맞추려고 하였다.
조선시대의 모든 트렌드는 궁궐에서 시작되었다. 가체도 제일 먼저 궁궐 여인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대비, 왕후, 후궁, 세자빈, 등등이 차례로 가체를 쓰기 시작하면서, 궁궐을 자주 드나드는 궁녀나 기생이 이를 보고 따라 했다. 궁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운 궁녀와 기생은 궁에서 습득한 트렌드를 궁 바깥으로 퍼뜨려서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가체를 크게 유행 시켰다.
궁궐 여인들은 트렌드 세터 (trend setter)였다. 궁궐은 오늘날 파리, 밀라노 패션쇼 장을 방불케 했다. 당대 최고 세련되고 고풍스러운 스타일을 궁궐 여인들이 가장 먼저 선보였다. 궁녀와 기생들은 마치 궁궐 패션위크에 참여한 것처럼 궁에서 유행하는 트렌드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궁 밖으로 나와서 대중에게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곧 궁궐 스타일은 백성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가체에 대한 수요도 점점 높아졌고 그에 따라 값도 치솟았다. 비싼 가체는 중인 계급의 집 12채에 해당하는 가격이었다. 그러나 조선 여성들의 더 높고 더 화려한 가체를 갖고 싶은 욕망을 아무도 막을 수 없었고 때문에 고가의 가체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원래 출구 없이 자꾸 하지 말라고 억압만 하면 탈이 나는 법이다. 여성들의 꾸미고 싶은 욕구를 유교적 틀 안에 자꾸 가두기만 하니까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성들이 가체에 집착을 하면서 가체를 더 크고 더 화려하게 만들다 보니 여인들이 그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체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무거운 가체를 한 어느 양반집 어린 며느리에게 시아버지가 방문을 하였다. 며느리는 인사하려고 일어나서 고개를 숙이는데 가체의 육중한 무게 때문에 여인의 가녀린 목이 그만 우두둑하고 부러지는 웃지 못할 일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평소 검소하기로 소문난 영조는 이 소식을 듣고 가체 금지령을 내렸다. 여성들의 도가 지나친 가체에 대한 집착으로 가체 경쟁이 일어나면서 이러한 사치 풍조가 유교적 사회 질서를 흩뜨린다고 생각한 꼬장꼬장한 영조 대왕은 여성들에게 가체를 쓰지 말것을 명한다.
영조의 가체 금지령으로 가체가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나서 그 대신 새로 나온 조선의 헤어스타일이 첩지머리다. 첩지머리는 첩지를 장식한 머리로 이것 또한 궁중에서 시작된 스타일인데, 가체 대신 아래로 쪽머리를 하고 가르마에 첩지를 얹어 치장하던 헤어스타일이었다. 그래서 가채보다는 훨씬 더 간소하고 단아한 스타일이다. 가체는 자꾸 위로 옆으로 넓게 퍼져서 여성들의 목 디스트를 불러왔던 반면, 첩지머리는 머리를 아래로 묶고 위에 간단하게 첩지를 살짝 얹는 아주 간편한 헤어스타일이다.
이를 알고 나니까 사극을 볼 때 여인들이 화려한 가체를 머리에 뚤뚤 감고 나오면 “아, 꼬장꼬장 영조 대왕 전이구나!” 그러고, 반면 여성들 머리스타일이 훨씬 간소화되고 가르마 위에 장신구가 똑 하니 올라가 있으면 “아, 꼬장 대왕 이후구나!” 하면서 여성의 헤어스타일만 보고도 시대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가체의 크기와 가체에 꽂힌 장신구로 여성들의 재물과 권위를 상징했다면 첩지머리는 가르마 위에 얹는 첩지로 신분과 재력을 과시했다. 왕비와 같이 신분이 높은 궁궐 여인들의 첩지는 화려한 용이나 봉황 모양이고, 그 아래 신분들은 감히 용이나 봉황과 같은 첩지를 쓸 수 없었다. 대신 개구리와 같은 다른 첩지를 이용해야 했다. 그래서 첩지만 보아도 신분이 딱딱 구분이 되었다.
첩지를 공부하다 보니 미국의 약혼반지 문화가 떠올랐다. 우리나라도 결혼을 할 때 미국과 같은 다이아 반지 문화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한국에서 지낸 시기는 학생때여서 약혼반지나 결혼반지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부모님이 결혼하시던 시기도 한창 경제 발전을 이룩하던 때다 보니 결혼비용 대는것 조차 빠듯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크면서 나는 엄마의 결혼반지를 본 적이 없었고, 있던 예물도 다 금 모으기 때 내놓았다고 해서 집에서 그 흔한 돌 반지 하나 구경한 적이 없다. 이렇다 보니 나 또한 결혼할 때 예물이나 반지에 대한 로망이 전혀 없었고 욕심도 없었다. 게다가 남편도 나도 이제 막 학생 신분을 벗은 사회 초년생이라 고가의 예물은 서로 원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스타일이 깔끔하면서도 우리 마음에 드는 반지를 골라 나눠 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의 호스트 부모님은 놀라셔서 남편한테 따로 연락을 해서 무리하더라도 다이아 반지를 해주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평소 검소한 호스트 부모님의 그런 주장에 신랑은 놀랐지만 이후 듣게 된 미국의 다이아 약혼반지 문화를 듣고 호스트 부모님이 걱정하셨던 이유를 이해했다고 한다. 지금에야 내가 잘 모를 수 있지만 나중에라도 주변에 결혼한 친구들이 많이 생겨 미국의 기혼 문화에 익숙해졌을 때 내가 자존심이 상하거나 부러워할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염려하셨다.
미국에서는 약혼을 할 때 남성이 여성에게 고가의 다이아 반지를 주며 청혼을 한다. 이때 프러포즈 반지는 여성의 자존심과 남성의 재력이 응축된 장신구 그 이상의 의미라고 한다. 그래서 기혼 여성들이나 약혼을 한 여성들은 사교모임이나 큰 파티에 갈 때 약혼반지를 꼭 끼고 가서 (과장을 약간 보태면) 다이아 크기가 크면 클수록 여성의 기가 살고 남성의 재력이 부각되어 우쭐거릴 수 있고 다이아 크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이하 생략하겠다.
그래서 보통 남성들은 자신의 능력의 2배 3배가 되는 다이아로 약혼반지를 해주고 이걸 결혼을 하고 나서 몇 년에 걸쳐서 갚는다고 한다. 그래서 평소 장신구에 관심이 없는 여성들도 약혼반지만큼은 아주 신경 써서 다이아를 가능하면 크고 좋은 거를 고르고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반지를 만들기 위해 반지 디자인을 주문 제작한다고 한다. 이를 듣고, “누구를 위한 반지인가….”라는 온갖 회의적인 생각이 다 들었지만, 미국 문화가 이렇고 기혼 여성의 반지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그렇다 보니 호스트 부모님께서 걱정하셨던 게 이해가 갔다.
다이아 반지가 자신의 위엄과 남편의 재력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는 그런 아주 중요한 여성의 장신구라는 의미에서 조선의 첩지와 비슷하다고 생각 했다. 머리 위에 올라간 아주 작은 장식이 손가락 위의 다이아 크기와 같이 착장자의 신분이나 재력을 과시할 수 있는 상징적 장신구였다.
가체와 첩지머리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장식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떨이다. 떨은 우리나라 전통 장신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장식이다. 작은 용수철(떨) 위에 나비나 꽃을 달아 비녀나 왕후의 관모나 떨잠에 올려서 움직일 때마다 미세하게 자르르 떨려 마치 꽃과 나비가 머리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떨을 통해 우리나라가 흔들림의 미학을 사랑했다는 것과, 미세한 흔들림을 여성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할 때 쓰였음을 알 수 있었다. 요즘 떨이 달린 장신구는 흔히 볼 수 없지만, 오늘날의 장신구 중 떨의 느낌에 가장 가까운 것은 귀걸이 정도가 될 것 같다. 귀에 딱 붙는 귀걸이 말고 그렇다고 너무 치렁치렁한 귀걸이도 아니고 귀 바로 밑에서 달랑달랑거리면서 움직일 때마다 미세하게 흔들려 그 존재감이 뚜렷하지만 크기가 작아 과하지 않은 귀걸이가 조선시대의 떨의 느낌이랑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복식 문화가 많이 바뀌는 과정에서 조선시대 여성의 장신구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이 생소하지만,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은 한결같다는 것을 느꼈다. 성형도 없고 화장도 그다지 발달하지 않은 조선시대에는 화려한 머리와 머리 장신구로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구를 해소했구나 생각하니 조선의 여인들이 훨씬 더 가깝게 느껴졌다.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면, 아르간 오일을 박스 채로 가지고 가서 조선 여인들을 모아다 놓고 사용법을 알려드리고 고운 떨잠 하나 받아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