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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ri Lee May 29. 2020

힙함의 끝, 조선시대 패션피플

조선시대 남성의 장신구 갓, 귀걸이, 부채, 은장도에 대하여

지난 편에서는 여성의 장신구에 대해서 살펴봤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진정한 장신구 애호가는 남성이었다. 

남성이 치장하는 것에 여성 못지 않게 신경을 썼던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했다. 오늘날은 여성화의 대표가 된 하이힐의 시초에는 루이 14세를 비롯한 남성들이 있었고, 하이힐을 대중화 시켰던 것도 남성들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남성의 힐과 여성의 힐을 비교해봐도 여성용보다 남성용이 훨씬 더 화려하고 아름다웠는데 그 이유는 여성들의 힐은 치마 아래로 가려지는 반면 남성들의 힐은 바깥으로 노출이 되기 때문에 그 외관에 더 신경을 썼다. 조선의 장신구도 마찬가지였다. 남성의 장신구는 여성의 장신구 못지않게 화려하고 다양했다. 장신구의 종류만 봐도 여성의 경우는 떨잠, 비녀, 반지, 노리개, 은장도 정도다. 그러나 남성의 경우 망건, 관자, 은장도, 탕건, 갓끈, 부채 등 그 가짓수가 더 많다.   


유교적 분위기로 당시 조선시대는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삼았기 때문에 사치 풍조를 엄격하게 규제하려고 했으나 아름다워지고 싶어하는 조선시대 패션피플들의 미적 욕망은 사회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웠다. 


여성들이 가체를 더 높이 더 넓게 쌓을 때 남성들은 갓에 신경을 썼다. 머리 장식은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의 멋의 창구이기도 했다. 여성의 가체도 궁중에서 유행하던 것이 대중으로 퍼졌 듯, 남성들의 머리 장식 문화도 궁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궁중에서는 상투를 보이는 것이 궁중 법도에 어긋난다고 여겨서 궁 안에서는 남성들이 상투를 보이는 일이 없었다. 이러한 문화가 대중에게도 퍼져서 사대부 남성들도 상투를 가리려 했다.   


일단 남성들은 상투를 튼 머리에 망건을 두른다. 이마에 대고 두른 망건 위에 갓을 고정하기 위한 풍잠과 관자를 올린다. 그리고 실내에 있을 때는 상투를 가리는 탕건이나 정자관을 쓴다. 탕건은 상투 덮개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특별한 장식은 없고 남성의 머리 둘레 사이즈에 꼭 맞아 상투만 쏙 가려주는 모자다. 정자관은 탕건에 비해 훨씬 형태가 화려한데 흔히 우리가 놀부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뾰족뾰족 솟아나 있는 모자다. 이렇게 실내에서 쓰는 머리 장신구만해도 종류가 다양하다.  


외출할 때는 갓을 썼다. 의 패션 흐름을 공부하다가 알게 된 사실 중에 하나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갓의 윗부분 모정이 점점 좁아져서 머리에 제대로 얻을 수도 없는 형태로 변했다고 했다. 패션에 민감했던 조선의 남성들은 이렇게 머리에 맞지 않는 갓도 굳이 쓰고 다녔다고 한다. 유행의 흐름을 쫓아 실용성보다는 멋을 중요시 했던 조선시대 남성들을 생각하니 불편해도 멋을 위해서 교복 통을 줄이는 오늘날 중고등학생들이 떠올랐다. 수백명이 모두 다 같은 색의 같은 패턴의 교복을 입고 다니니 개성이 강한 학생들은 수선집을 가서 모양이나 길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꿔서 획일적인 교복 속에서도 자신의 스타일을 사수 하고 싶어한다. 이 모습이 갓의 모정을 줄이면서까지 자신의 스타일을 사수하고 싶어했던 조선 후기의 남성들의 모습과 오버랩 되었다.  


갓은 기껏해야 모정 정도 줄이는 것으로 끝나는데 비해 갓 밑으로 길게 내려오는 갓 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산호, 호박, 마노, 수정 등의 아주 고급 재료들을 써서 착장자의 스타일을 살리는 동시에 그의 경제력, 사회적 지위, 신분까지도 드러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장신구였다. 길이도 길게 하기도 짧게 하기도 하면서 갓 끈으로 온갖 멋을 부렸다.  


갓은 형태도 색도 획일적인 오늘날 교복과 같다면 갓 끈은 그나마 자유롭게 허용되었던 중고등학생의 신발이나 책가방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나는 초등학교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쭈욱 교복을 입고 다녀서 스타일 한끗발 날렸던 조선시대 남성들의 답답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교복이 예쁜 학교를 가면 모르겠는데, 교복이 마음에 안드는 학교를 가면 정말 답이 없다. 그래도 하는 수 없다. 학생이 교복을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 학교에 들어가면 학교에서 정해준 교복을 맞춰야 했다. 그러면 나는 교복점에서 받아온 교복을 학교 앞 수선집에가서 엄마 몰래 약간의 튜닝을 했다. 교복점보다 학생들의 주머니 사정과 학생들의 needs를 훨씬 더 잘 아는 학교 앞 수선집 아주머니께 교복을 들고 가면 알아서 5,000원 안에 잘 수선을 해주셨다. 이렇게 튜닝한 교복의 화룡정점을 찍어주는 것이 바로 운동화와 책가방이었다. 교복으로는 할 수 있는게 한정적이니까 신발이라도 내가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신어야 했다. 책가방 또한 그때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형광 핑크를 가지고 다녀 저 멀리서도 친구들이 가방만 보고 나 인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신발과 가방은 통일된 교복으로 억눌린 자기 표출의 욕구를 해소 시켜줄 수 있는 중고등학생들의 유일한 장신구다. 조선의 남성들도 갓의 획일성을 상쇄하기 위해 갓 끈이라도 본인의 취향껏 개성 넘치게 하고 다녔다.  


남성들의 장신구를 살펴보면서 또 하나 신기했던 점이 바로 남성들의 귀걸이 착용 문화이다. 세종 시기 사대부 자손들의 귀걸이를 제외하고 금과 은의 사용을 자제하라는 명령이 담긴 기록에서 조선 전기 남성들이 귀걸이를 하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오늘날도 귀걸이를 하는 남성들이 많지만 조선 전기 남성들은 정말 귓볼이 늘어질 정도로 큼직하고 무거운 귀걸이를 했다. 


귀걸이와 관련된 재미난 일화가 있다. 연산군의 아들인 양평군을 사칭하고 다니는 만손이라는 자가 있었다. 

양평군은 중종반정이 일어날 때 9살의 나이로 분명 죽었는데 양평군이 안죽고 살아있었다고 하니 조선이 발칵 뒤집혔다. 조선시대에 DNA 테스트를 해볼 수도 없는 일이고 어떻게 사실을 밝혀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양평군이 죽을 당시 큰 진주 귀걸이를 하고 있어 귓 볼에 아주 큰 구멍이 나 있었다는 기록을 발견한다. 그러나 양평군을 사칭하는 자의 귀에는 귀를 뚫은 자국이 없어서 가짜임이 들통난 에피소드가 있다. 이처럼 조선 전기 귀걸이는 어린아이 성인 남성 할 것 없이 보편적으로 남성들이 즐겨하고 다니던 장신구였다. 그러나 선조 때에 이르러 신체발부 수지부모라고 하여 부모가 주신 몸에 구멍을 내는게 옳지 못하다고 하여 남성들의 귀걸이 착용을 금지했다. 그래서 조선 후기로 가면 남성들의 장신구에서 귀걸이의 자취는 사라진다.   


갓, 갓끈, 귀걸이 외에 조선 사대부 남성들이 가장 사랑했던 장신구라고 하면 부채를 빼놓을 수 없다. 부채는 갓 못지 않게 조선 사대부라면 누구나 가지고있는 필수 패션 아이템이었다. 고구려 때부터 널리 사용되던 이 부채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사대부들 사이에서 풍류를 즐기는 남성을 상징하는 최고의 장신구였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왕이 신하에게 부채를 하사하기도 하였고, 신하가 왕에게 진상을 하기도 하였다. 


부채는 여름에만 들고 다니는 한 계절용 장신구가 아니었다. 더위를 날리는 용도 뿐만이 아니라 사대부 양반이 하품을 할 때 입을 가려주는 매너용, 누군가를 부르거나 지시할 때 사용하는 지시용, 비나 뜨거운 햇볕을 가려주는 우산이나 양산과 같은 용도로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였다.  


뿐만 아니라 부채질을 통해서도 비언어적 의사소통을 하기도 하였다.

아랫사람에게 자신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는 행동을 반복하여 감정을 표출하기도 하고, 부채질을 하는 행위를 통해 악귀를 쫓기도 하였다. 때로는 부채가 배려의 차원에서 쓰이기도 하였다. 피맛골 편에서 살펴봤듯, 조선시대 백성들은 고관들이 지나갈 때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엎드려 절을 해야했는데 이게 번거롭고 피곤한 일인 줄 아니까 서민들의 번거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부채로 얼굴을 살짝 가려서 서민들이 굳이 절을 하지 않아도되도록 센스를 발휘하기도 하였다. 


갓에 갓끈이 있듯, 부채에도 선추라고 하는 장신구가 달렸다. 부채를 다른 말로 선이라고 했는데 이 선에 달리는 장식품이라는 의미에 선추라고 불렸다. 부채의 세련미나 품격을 더 해주는 이 선추는 신분 높은 사람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선추에 향기가 나는 향을 집어 넣어 늘 지니고 다니면서 이동식 향수와 같이 쓰기도 하고, 급할 때 약을 꺼내 먹을 수 있도록 약을 보관하기도 했다. 또한 나침반과 같은 아주 고가의 사치품을 달고 다니면서 자신의 재력이나 신분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던 장신구가 바로 선추였다. 오늘날 선추와 비슷한게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차 키가 아닐까 싶다. 크기는 매우 작으나 늘 가지고 다니다가 탁자나 책상 위에 무심코 올려두고 상대방에게 자신이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지 넌지시 알려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차 키와 선추가 비슷하다고 느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장신구는 은장도다. 은장도는 남성만의 장신구가 아니었다. 은장도는 남녀 모두가 사랑한 전통 장신구였다. 여성의 은장도는 작고 섬세하고 우아한 느낌의 곡선의 형태로 주로 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남성의 은장도는 여성의 은장도에 비해 더 각지고 투박하고 용맹하고 강인한 느낌을 자아내는 산수 문양이나 용 문양이 그려져 있다.   


원래 은장도는 생필품이었다. 은장도를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며 일상 생활에 요기 나게 쓰곤 했다. 초반에는 실용적인 측면이 강해서 은장도에 젓가락과 같은 생필품을 달아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은장도의 칼날을 보호하는 칼자루와 칼집의 재료가 다양해짐에 따라 그 용도가 점차 변해갔다. 나무, 금, 은, 옥, 호박, 산호, 뿔, 뼈 등등의 귀한 재료를 다양하게 섞어 만들어 은장도가 더 화려해지고 값비싸졌다. 이렇게 은장도의 가치가 점점 높아지면서 임금이 아끼는 신하에게 하사하는 귀한 공예품으로 인식되기 시작되었다. 이렇게 화려함과 그 의미가 더해지면서 생활 필수품이었던 은장도가 사치품으로 변해갔다.  


은장도에 비유할 만한 오늘날의 장신구는 손목시계가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여성과 남성이 모두 하는 장신구로 여성의 손목시계는 남성의 시계에 비해 더 작고 섬세하지만 남성의 시계는 훨씬 더 투박하고 크다. 시간을 확인하는 실용적인 용도로 쓰였지만 디자인이 더해지고 값비싼 보석들이 박히며 그 가격과 가치가 올라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시계 하나에 차 한대 값을 능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항상 들고 다니며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재력을 자랑할 수 있는 장신구이기에 그런 고가의 시계도 늘 수요가 있다.




오늘은 이렇게 조선시대 남성의 장신구에 대해 살펴봤다. 장신구를 떠올리면 늘 여성의 것으로만 생각해서 조선 남성의 장신구가 생소하게만 느껴졌었는데, 장신구 뒤에 숨겨진 조선 패피 남성들의 미적 욕망을 알고 나니 더 이상 생경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여성의 가체나 첩지처럼 더 이상 그 형태와 모습이 사라졌지만 오늘날의 많은 물건들이 그 용도를 대체하고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 시간과 이번 시간을 통해서 장신구의 용도와 종류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도 참 의미 있었지만, 무엇보다 장신구를 쓸 때의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게 훨씬 더 의미 있고 재미있었다. 과거나 현재나 남성이나 여성이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욕망은 변하지 않았고 어떠한 방법으로든 내적 욕망을 표출 하는 것을 보며 다시 한번 과거와 현재가 이어져 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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