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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ri Lee Jun 01. 2020

마, 조선의 패션은 앞서갔다. 마!

여성 한복의 변천사 190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결혼을 준비하면서 내내 궁금했다.  


 '아니, 왜 결혼식 때는 어머니들만 한복을 입고 아버지들은 양복을 입지?'  

요즘엔 한복을 입고 궁궐을 가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그래서 궁궐을 가면 고풍스러운 한옥과 알록달록한 한복을 입은 관광객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우러져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이때 한복을 입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여성이고 남성이 한복을 입은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기껏해야 외국인 정도? 

왜 이럴까 생각해봤다.  


여성과 비교해 사회 활동과 외부의 접촉이 많았던 남성들의 복식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빠르게 변화되었다. 

개항기와 개화기를 거치면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상투를 없애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한복을 벗고 양장을 입고 다니는데 전통을 지키자고 상투를 고집하고 두루마기를 휘날리고 다니긴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 남성과 비교해 사회 활동이 훨씬 적었던 여성들은 시대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었다. 백화점이나 근대문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지방 여성의 경우는 더더욱 복식을 바꿀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남성들의 복식은 일찍이 확확 바뀌었던 반면 여성의 복식은 천천히 그것도 아주 조금씩 변해갔다. 개화기에 이르러서는 남성의 복식이 한복에서 양장으로 변하는 동안 여성의 복식은 전통 한복에서 개량 한복 정도의 변화만 이루어졌다.     


그러나 여성의 복식 변화가 시대와 유행에 둔감했다고는 할 수 없다. 여성 한복 나름도 시대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했고, 유행에 따라 길이, 옷감, 패턴이 변했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에 발맞춰 그 당시 한복에 어울리는 헤어 스타일과 곁들이는 장신구들도 더욱 다양해졌다. 이러한 변화를 이번 편 다음 편에 걸쳐서 알아볼 것이다. 

한복의 복식 문화와 관련된 많은 정보와 일러스트 자료들은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참고했다. 



(왼) 전통 한복 | 국립대구박물관 (오) 신윤복 단오풍정

일러스트에서 보이는 형태의 한복은 전통 한복이다. 색이 화려하지 않고 백의민족답게 패턴이 없는 하얀 치마와 저고리를 주로 입었다. 그리고 치마의 길이는 긴 반면, 조선 후기로 갈수록 저고리의 길이는 점점 짧아졌다. 개화기로 접어들면서는 짧아지다 못해 겨드랑이와 가슴이 다 보일 정도로 올라갔다. 그래서 조선 후기 대표적 화가 김홍도 신윤복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모습 중에는 저고리 밖으로 가슴이 드러나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다. 한마디로 조선 시대 여성들의 한복은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고리는 덮어줘야 할 부분을 덮어주지 못했고 치마는 움직일 때마다 끌리고 통풍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여름엔 엄청 더웠을 것이다.  


이러한 불편한 한복이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점 간소화되기 시작했다.  


근대 한복 | 국립대구박물관

왼쪽 그림에서도 볼 수 있는 변화로는 일단 한복의 색과 패턴이 훨씬 다양해지고 화려해졌다. 또한 저고리의 길이는 전통 한복에 비해서 길어졌지만, 치마의 길이는 발목이 다 보일 정도로 짧아졌다. 여성의 활동에 유리하게 한복이 변화되었음을 한눈에 확인 할 수 있다.  


여성의 활동성을 고려한 한복의 변화는 이화학당의 외국인 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911년 이화학당에 재직했던 진네트 월터 교사는 여학생들에게 체조나 농구와 같은 동적인 운동을 가르쳤다. 그러나 치마허리 한복을 입고 다닌 학생들은 달리거나 뜀뛰기를 할 때마다 치마가 자꾸 흘러내려서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잠깐 치마허리가 무엇인지 짚고 가자. 치마허리는 긴 치마 옆에 끈이 달려서 치마를 겨드랑이까지 바짝 추켜 올려서 끈으로 흘러내리지 않게 꽉 조여서 입어야 했다. 그렇게 입다 보니 온종일 꽉 졸린 느낌으로 답답하게 생활을 해야 했고, 사뿐사뿐 걸으면 모르겠는데 뛰거나 오래 움직이다 보면 치마허리끈이 점점 풀려서 치마가 내려갈까 항상 노심초사해야 했다.  


요즘 우리가 한복을 입을 땐 한복 치마 위에 앞치마처럼 어깨끈이 달려있어 어깨끈에 나 있는 구멍으로 양손을 쏙쏙 빼고 치마를 올려 휘리릭 둘러서 입는다. 어깨끈 덕분에 치마가 흘러내릴 걱정도 없고 혹시나 손을 올려서 저고리가 올라간다고 해도 어깨끈 부분에 천이 덧대어 있어 속살이 보일 염려가 없다. 그런데 당시는 이러한 어깨허리가 만들어지기 전이었다. 

 

월터 교수는 활동이 불편한 학생들을 위해 어깨허리를 고안했다. 한복 치마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오늘날의 앞치마와 같이 개량했다. 어깨허리의 한복은 편안하고 실용적이었다. 그런데 이 어깨허리 치마가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계기는 바로 1919년 3.1운동이었다.  


“만세 운동 때 치마가 흘러내리지 않게 하기 위해, 혹시 일본 경찰에 잡혀 모욕당할 지 모르니 치마허리 대신 반드시 어깨허리를 만들어 준비해야 해” 


3.1운동을 준비하면서 여학생들은 남모를 고충이 하나 더 있었다. 만세 운동을 하려고 손을 자꾸 올리며 뛰는 과정에서 치마허리끈이 풀릴 가능성이 컸다. 치마가 흘러내리는 것을 염려하지 않고 마음껏 만세를 부르고 싶었던 여학생들은 활동성을 높이기 위해 본격적으로 어깨허리를 보급했다. 여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3.1운동을 계기로 어깨허리가 폭발적으로 확산하였다.  


어릴 적 손을 쑥쑥 집어넣어서 입던 어깨허리 한복 치마의 유래와 대중화의 배경에는 3.1운동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어깨허리가 새삼 새롭게 느껴졌고,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던 복식 변천에 우리나라의 근대사가 녹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정말 ‘캬~ 정말 내가 이 맛에 역사를 공부하지’ 싶었다.


신윤복 월하정인

19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는 구시대적 관습으로부터의 탈피가 이루어지는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을 옥죄고 구속하던 복식 문화로부터의 탈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변화의 대표적인 시발탄이 바로 장옷과 쓰개치마의 폐지다. 장옷과 쓰개치마는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쓰던 것으로 우리가 흔히 신윤복의 그림에서 봤음 직하다. 신윤복의 대표작 월하정인에서의 여인은 쓰개치마를 덮고 있다. 쓰개치마는 여성이 바깥을 나갈 때는 얼굴을 가려야 한다는 여성을 옭아매는 가부장적인 사고관을 상징하는 복식문화였다. 구한말까지 여학생들은 이 쓰개로 얼굴을 가린 채 통학을 해야 했다.  


그러나 1900년대 초에 이런 쓰개가 구시대적이라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옳소!), 여학교에서 이러한 쓰개를 폐지하려는 움직임들이 일었다. 그리고 1911년을 마지막으로 쓰개는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1911년 이후가 되어서야 여성들은 비로소 얼굴을 내보이며 거리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모던 걸들의 한복 | 국립대구박물관

1920년대부터 1930년대는 단발머리와 짧은 통치마의 아이콘, 신여성과 모던 걸이 등장하던 바야흐로 경성이 패션의 성지가 되던 역사적인 시기다. 일러스트에서 보이는 이 시기 여성의 복식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구두의 착용과 헤어스타일이다.  


신여성은 신교육을 받은 젊은 여성을 통칭한다. 이들은 조선 여성에게 기대되는 굴레와 속박을 모두 벗어던지고 모더니즘에 심취해 자유연애와 같은 이전 세대에선 꿈도 꾸지 못했던 서양의 자유로운 사고관들을 추종하기 시작했다. 파격적인 사고의 변화와 함께 외형도 파격적으로 변신한다. 길게 땋아 내린 댕기 머리를 댕강 잘라내고 짧은 단발머리로 거리를 활보해 ‘모단 걸 (머리가 짧은 여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당시에는 서구 대중문화에 빠진 허영의 아이콘으로 묘사되어 ‘못된 걸’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였지만 이들이 불러온 한복 패션 흐름의 변화는 가히 센세이셔널 했다. 오늘날 젊은 여성들이 봐도 세련될 정도로 동서양의 아름다움을 두루 갖춘 모습으로 탈바꿈하였다. 모던 걸들은 한복 위에 구두를 신고 핸드백을 들며 헤어스타일을 개성껏 바꾸며 스타일을 통해 자기 표현을 하고 구시대로부터 탈피하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모던 걸들은 멋과 실용성을 둘다 고려했다. 저고리의 길이도 더 길어져 허리선까지 닿게 되어 자유롭게 팔을 움직일 수 있었고 소매와 품도 넉넉해서 통풍도 잘되었다. 또한 치렁치렁한 옷고름을 짧게 하기도 하고 심지어 입고 벗기 간편하게 단추나 브로치로 고름을 대체하기도 하였다. 치마의 길이도 한층 더 짧아져 생활하기가 훨씬 편해졌다. 두껍고 투박한 버선 대신 양말을 신고 구두를 신으며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퓨전 한복의 모습과 아주 흡사해졌다.  


당시 전통 한복에 더 익숙하신 어르신들의 눈에는 젊은 여자가 다리를 훤하게 다 드러내놓고 요상한 뾰족구두나 또각거리면서 다니고 머리는 사내마냥 싹둑 잘라가지고 단정치 못하게 죄다 흩트리고 다니는 게 영 보기가 거시기했을 거다. 에휴…어쩔라고…말세야 말세…이렇게 혀를 끌끌 차며 모던 걸들과 신여성들의 옷차림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던 게 일반적이었다.  


보그 잡지의 한복 화보

그러나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모던 걸 신여성들이 일으킨 한복의 변화는 엣지있는 스타일의 결정체가 되었다. 짧은 한복 치마에 화려한 패턴의 저고리를 매치하고 전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반짝거리는 액세서리를 믹스매치하고 하이힐과 세련된 클러치와 함께 선글라스를 착용한 모습이 요즘 우리나라 패션잡지에서 한국의 전통미와 세련미를 자랑하기 위한 스타일로 자주 연출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던 걸들의 과감한 시도가 없었다면 어쩌면 한복은 고리타분한 전통으로만 여겨져 결혼식 외에는 묵혀두는 거추장스러운 예복 정도로만 인식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던 걸들이 멋과 실용을 다 잡아 한복을 재탄생시켰기 때문에 오늘날 나와 같은 젊은 세대도 한복이 스타일리쉬하고 자주 입고 싶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전통 복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실 나도 이번 편을 준비하면서 한복 복식 변천사를 제대로 알게 되었고 오늘 내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한복 스타일이 최근 들어 현대화된 스타일이 아니라 벌써 1920년대에 모던 걸들에 의해 이어오던 스타일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전까지 학교나 대사관 행사를 갈 때 한복을 입고 가면 늘 외국인들이 “어머 옷 너무 예쁘다, 현대화된 스타일인가 보구나”라는 칭찬을 많이 했는데 그때마다 나도 내가 입은 스타일이 현대에 들어서 만들어진 스타일인 줄만 알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는데 앞으로는 “No no, it’s traditional style~ since 1920!”라고 정정해줘야겠다.  


마~ 조선의 패션은 앞서갔다.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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