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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ri Lee Jun 04. 2020

패션은 돌고 도는 거니까!

여성 한복의 변천사 1940년대부터 현재까지

10년 전만 해도 결혼할 때 외에는 좀처럼 한복을 입을 일이 없어 한복을 사기 위해선 혼주 한복을 하는 곳을 직접 가서 맞춰야 했다. 용감했던 스무 살의 나는 혼자서 꿋꿋하게 혼주 한복을 하러 온 커플들 사이에 앉아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아아,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워낙 어릴 때부터 한복을 좋아해서 내가 처음 번 돈으로 한복을 꼭 사고 싶었다.)


맞춤 한복이라 내 키에 딱 맞고 저고리랑 치마의 원단도 내가 직접 고를 수 있고, 자수랑 고름 모두 내가 원하는 스타일로 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모든 게 맞춤이다 보니 당시 과외를 해서 번 나의 쌈짓돈을 몽땅 다 털어야 했다. 내가 소장하는 한복 중 가장 비싼 돈을 들여 산 한복이지만 사실 맞추고 나서 입은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래서 옷장 문 열 때마다 걸려있는 나의 과외비가, 아, 아니 나의 전통 한복을 보는 게 마음이 아프지만, 나중에 나 같은 딸을 낳으면 가보로 물려줘야지 하며 애써 씁쓸한 마음을 달래고 있다.  


내가 그 비싼 돈을 들여서 맞춤 제작까지 한 한복에 손이 많이 안 가는 이유는 이러하다. 

맞춤 한복은 대부분 전통 한복 스타일이기에 치마의 길이가 길어 이 한복을 입고 밖에 나가려 하면 하루 종일 까치발을 들고 다녀 치마가 끌리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원단도 땀 흡수가 안 되는 비단과 같은 고급 원단들이라 땀쟁이인 내가 입고 생활하기에는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또 손이라도 씻으려고 하면 소매에 물이 닿지 않게 각별히 조심해야 하는데 한복을 걷어 올려 고정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손을 씻는 둥 마는 둥 해야 했다. 무엇보다 거대한 전통 한복을 입고 나가려면 타인의 시선에도 굴하지 않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두 살 나이를 먹어가며 소심 지수가 높아진 나는 전통 한복을 입고 나갈 용기가 없다… 이제. 


예쁜 한복을 사두고 막상 못 입고 안타까워하는 내 모습을 본 엄마는 생활 한복이 막 유행하기 시작한 초창기에 내 손을 잡고 인사동에 가서 나의 두 번째 한복을 사주셨다.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한복이라 내 첫 전통 한복에 비해서 가격이 훨씬 합리적이었고 땀 흡수도 잘 되는 면소재에 생활하기도 편하고 심지어 반팔이었다. 이 한복은 정말 퍽 하면 입었다. 졸업식 때도, 사촌언니 결혼식 때도, 심지어 미국에서 했던 내 결혼식 때도 입었다. 이를 시작으로 큰 행사나 중요한 날을 위해서 한복을 하나씩 사모으다 보니 벌써 8개가 되었다.  


근 10년간 모은 나의 한복 컬렉션만 보아도 한복 스타일에 변화가 생겼다. 예복 성격이 강한 전통 한복 스타일에서 계절과 실용성을 감안한 생활 한복으로 변화했고, 생활 한복 안에서도 고름이 있는 스타일에서 똑딱이 단추로 대신 여미는 스타일로 변화했다. 한복 옷감에 있어서도 처음엔 주로 면이나 마 소재가 많이 나왔다면 나중엔 벨벳, 트위드 등의 다양한 옷감이 쓰여 같은 한복이라도 옷감과 그 패턴에 따라 완전히 다른 느낌을 연출한다. 


마치 내 옷장의 한복들이 지난 시간부터 다룬 한복 복식 변천사를 압축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괜히 옷장문을 열어 한복을 한번 훑으며 “이건 1920년대 스타일,” “이건 30년대!” 하며 시대별로 정리해봤다. 

이렇게 생활 속에 적용을 하다 보면 배운 지식이 온전히 내 것이 됨을 느낀다.  




자, 오늘은 1940년대부터다. 


1940년대는 일제강점기 막바지로 전시 체제로 돌입하던 시기였다. 공출, 징용, 징병이 매일같이 일어나던 살 떨리는 총동원령의 시기라 이 때는 한복 변화의 흐름도 멈춘 패션의 암흑기였다. 일제는 물자 절약을 위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멋과는 거리가 먼 국민복 착용을 강요했다. 해방을 하고 나서도 한국 전쟁이 잇따르는 비극의 역사가 계속되었다. 당장 쫓기고 먹고사는 게 급급한 와중에 패션을 운운하는 것은 사치였다. 6.25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렇다 할 한복 복식의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6.25 전쟁이 지나고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 다시 한번 패션 강국 대한민국답게 여성 한복의 변화가 움트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인해 서양 사람들과 서양 물자들에 더 많이 노출되면서 외부 자극에 영감을 받아 한복의 옷감과 디자인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 당시에는 비로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비로드는 벨벳을 뜻하는 일본어로 ‘비로도’라고 발음을 하여 그것을 본떠서 비로드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국 전쟁 직후에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 벨벳 소재는 1930년대에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보급이 되었는데, 옷감 하나가 대학 등록금에 견줄 만큼 비싸서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벨벳이란 그림의 떡이었다. 이렇게 쉽게 가질 수 없는 소재였기에 “비로드 치마에 양단 저고리면 최고의 사치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비쌌지만! 

지난 시간부터 쭈욱 살펴봤듯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은 현실적 장애물들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했다. 1940년대부터 5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비싼 원단의 수요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 사치 풍조를 막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벨벳 사용을 제한했다. (영조가 생각이 나는구먼)  


그러나!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벨벳 밀수 기사가 따로 있을 정도로 벨벳의 수요는 계속되었고 ‘옷 좀 입는다’하는 패셔니스타들이 서울 시내에 벨벳 한복을 입고 활보하고 다니니 젊은 여성들의 벨벳 한복 소유에 대한 욕망은 활활 타올랐다. 특히 남색과 자주색의 벨벳 소재 한복은 당시 여성들의 로망이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할머니 옷장에 있는 자주색 벨벳 재킷이 떠올랐다.

어릴 때 나는 할머니가 유독 자주색 벨벳 재킷을 자주 입으셨던 것을 기억한다. 

'많고 많은 옷들 중에 왜 하필 저렇게 우중충한 학교 강당 커튼 같은 옷을 좋아하시지...? 원래 나이 들면 저런 옷을 좋아하나?' 하고 어릴 적 할머니의 패션 감각에 대해 매우 깊은 의구심을 품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주색 벨벳 재킷”하면 "촌스러운 할머니 옷"이라고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러나 패션은 돌고 돈다고 최근에 들어서 내 또래 사이에서도 벨벳이 유행을 하기 시작해서 벨벳 치마, 벨벳 셔츠, 벨벳 신발, 벨벳 머리 끈 등 벨벳을 소재로 한 다양한 패션 아이템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서 나는 최근에 들어서야 할머니의 패션 감각에 대해 재조명하게 되었고, 벨벳에 대해 재평가를 하게 되었다. (ㅎ) 


그리고 오늘 1950년대 여성들에게 자주색 벨벳이 어떤 의미였는지 알고 나니까 할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먹먹함이 밀려왔다. 1950년대의 할머니는 지금 내 나이보다도 어린 한창 외모에 민감하고 꾸미고 싶어 하는 소녀였다. 그 소녀는 아가씨가 되었고,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는 형편 때문에 돈을 벌어도 자주색 벨벳 한복을 가질 수 없었을 거다. 할머니도 아가씨 시절일 때 당시 너무도 유행했던 자주색 벨벳 한복을 입고 싶지 않으셨을까? 요즘도 흰머리가 나오면 보라색으로 브릿지를 넣는 귀여운 할머니가 아가씨였던 시절엔 오죽했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절대 살 수 없었던 벨벳이었다. 50년이 지나 이제는 학교 강당 커튼으로 사용될 정도로 흔하고 값싼 원단이 되고 난 이후에야 할머니는 자주색 벨벳 재킷을 입으실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 전쟁 스토리를 익히 들은 바 있는 나는 할머니 옷장 안에 있는 자주색 벨벳 재킷이 부의 상징이 아닌 젊은 시절 못 가져본 것에 대한 일종의 한풀이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좀 먹먹해졌다.  

1940년대부터 현대까지의 한복 | 국립대구박물관


한국 전쟁 이후부터는 여성들도 이제 양장을 비롯한 서양 스타일의 옷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평소에는 셔츠, 청바지, 원피스와 같은 스타일의 서양 스타일의 옷들을 즐겨 입게 되면서 차츰 한복을 일상생활에서 보기가 어려워졌다. 


1970년대부터는 한복의 예복화 경향이 강해지면서 결혼식과 같은 특별한 날에 여성들은 한복을 남성들은 양장을 입는 문화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복이 어쩌다 한번 꺼내 입는 옷으로 인식이 바뀌게 되면서 한복의 실용성보다는 장식적인 부분에 더 치중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의 변화로 과거에는 길이가 길었던 저고리가 다시 짧아지고, 짧았던 치마의 길이는 다시 길어졌다. 예전엔 거추장스럽다고 짧아지거나 아예 없애기도 했던 고름이 다시 넓고 길게 만들어졌다. 


한복 복식 변천사에도 패션은 돌고 돈다는 진리가 그대로 적용되었다. 저고리는 더 길게 치마는 더 짧게 변하던 흐름에서 다시 저고리는 짧고 치마는 긴 예전의 전통 한복 스타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렇게 예복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지면서 한복이 옷장 밖을 나오는 날보다 옷장 안에서 지내야 하는 날이 훨씬 길어진 것은 나와 같은 Hanbok Lover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요즘 들어 점차 다시 1920년대 30년대에 유행하던 스타일의 한복들이 일상에 종종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들을 바라보면서 한복의 일상복화가 진행되는 것인가! 하는 기대가 들기도 한다. 이대로라면! 이대로 조금만 더 버티면 묵혀두었던 거대한 내 전통 한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해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날이 올 거라고 믿는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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