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냥 성빈 Just Seongbin Mar 02. 2021

[디자인 일반] 디자인은 버내큘러를 질투한다

 언젠가부터 버내큘러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얼마간 지속되는 을지로적인 감성의 홍수 속에서 버내큘러라는 말은 그 모든 것들의 자리를 큰 소리로 알려주는 편리한 단어 같아 보이기도 하다. 을지로 식당 사장님이 직접 쓰신 간판과 메뉴판, 옛 골목 담 위에 박힌 깨진 유리파편들, 빨래를 말리기 위해 쳐놓은 끈과 색색의 집게들을 우리는 흔히 버내큘러라 부른다. 디자인 활동을 성실히 하는(혹은 하려는) 사람이라면 이런 일상의 흔적들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는데 그들은 이런 자생적인 흔적에서 삶의 디테일을 끄집어내어서 '버내큘러적 디자인'이라 부른다. 나는 섭섭하게도 '버내큘러'와 '디자인'이 함께 쓸수없음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관습적으로 쓰이는 '버내큘러 디자인'을 곧이 곧대로 해석해 엄밀함을 친구 삼아 '이건 말이 안 되잖아!'라 떼쓰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그 둘이 지니는 가치와 방향이 서로 다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버내큘러 디자인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려는 시도를 통해 더 버내큘러에 근사(近似)하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버내큘러를 갑갑한 디자인에 갈기는 어퍼컷으로 느낀다면 말이다.


 일반적으로 ‘버내큘러 디자인(vernacular design)’은 민중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자생적이고 토속적인 디자인을 말한다. '토착의'라는 뜻의 버내큘러(vernacular)가 디자인(design)을 만나 하나의 문화 범주를 뜻하는 단어가 탄생했다. 나는 '버내큘러'와 '버내큘러 디자인'을 구별하고자 한다. 우리는 왜 버내큘러에 주목하고 소비하는지 생각하기 앞서 내가 생각하는 버내큘러(버내큘러 디자인 아님)가 무엇인지 개별 사례로 확인하기 위해 지난 몇 달간 곳곳에서 발견한 버내큘러들을 소개하고 싶다.



용산구 남영동, 나무 밑동을 적당한 곳에 비치해 의자로 사용한다.


강남구 수서역, 적당한 판재로 임시방편의 박스를 만들어 띄엄띄엄 앉게 한다.


강남구 신사동, 가판대가 넘어가지 않게 물통을 놓았다.


세종시 빌라 옆, 폴리 재질 선재로 건조대를 만들었다.


종로구 누하동, 주변 공사에 쓰인 것 같은 화강암 블록이다. 노끈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종로3가역, 지하철 플랫폼 표지판의 오류(위에 큰 글씨로 쓰여있어서 진짜 오류는 아니다)를 익명의 누군가가 고쳐주었다.


마포구 합정동, 가로수가 있던 자리가 누군가의 화단이 되었다.


세종시 골목, 배수구이다. 창작자의 재치가 보인다


위의 예시들을 보면 버내큘러는 몇 가지 특징들이 도출된다.


1. 명확한 기능을 한다. 실용적이지 않을지언정 목표와 이유가 있다

2. 익명의 누군가(아마 한 명의 창작자)가 만들었다

3. 저렴한 주변 재료를 활용한다

4. 직관적이다

5. 개인적인 스토리가 있다

6. 투박한 위트가 있다


 디자인이 버내큘러에 주목하는 이유는 첫 번째 특징에서 기인한 것 같다. 버내큘러는 목적이 있다.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당장에 처한 상황을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결과이다. 이런 adhoc적인 처신은 비록 처음에는 당장의 사건을 모면하기 위해 급조한 해결책이지만 굳이 다른 것으로 대체할 이유를 찾지 못하면 그 공간의 일부가 된다. 디자인의 관점에서 이는 문제 해결(problem solving)이다. 디자인 프로세에서는 아주 익숙한 개념인데 말 그대로 사용자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을 해결해주는 것이다. 다만 버내큘러는 이러한 문제 해결을 아주 저렴하고 사적이라는 것이다. 디자인은 이 문제 해결 지점에서 버내큘러와 디자인의 공통분모를 발견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문제 해결에서 버내큘러는 웃길 정도로 직관적이고 기상천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디자인은 다섯 번째, 여섯 번째 특징으로 버내큘러가 될 수 없다. 삶과 가장 밀접하게 접해있는 개인적인 바운더리에서 창작된 버내큘러는 타자를 의식하지 않고 무심한데 디자인은 그 지점과 반대에  서있다. 디자인은 소비될 것을 의식하는 순간 더 이상 사용과 스토리에 있어 '진심'과 멀어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디자인은 버내큘러의 진실된 스토리에 이끌려 '버내큘러 디자인'을 하고자 한다.


 물론 디자인도 그러한 개인적인 서사를 반영하는 프로세스를 만들 수 있지만 자칫 껍데기만 그래 보이는 속 빈 강정이 될 위험을 항상 염두해야 한다. 이에 반해 버내큘러는 사용자 자신을 위한, 관점에 따라서는 초라한, 프로젝트이지만 명확한 사용과 이야기가 있다. "가게 앞에 가로수 자리에 씨앗을 심고 보양 구와 표지를 달았어" " 종로 3가라 써져야 할 자리가 비어있어서 종로 3가라고 낙서했어. 사람들이 보고 웃겠지? " "바람에 가판대가 넘어가서 물통을 받쳐놓았어" 모두 소비를 염두하지 않은, 진심이 담겨있다.


 우리는 이런 사적인 스토리와 진실성에 목말라서 버내큘러에 빠져있는 것이다. 디자인은 필연적으로 목표를 정하고 사용자의 행동을 예상하고 구획한다. 행동을 유도하고 욕망을 읽어 이를 실험 안에서 평가하고 분석하고 수정한다. 수요를 분석해 상품을 브랜딩 한다. 같은 용도를 가진 사물이고 조형언어를 사용하지만 디자인은 듣고 싶은 말을 속삭이는 반면 버내큘러는 자기 마음대로 한다. 디자인이 체계를 가진 개념이라면 버내큘러는 개별 사례로 파악 가능한 파편이다.


 버내큘러의  방식, 조형, 맥락을 디자인적으로 풀어 제품을 만드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버내큘러라 매력 있다고 여겨지는 속성을 없앤다. 디자인은 결국 이성의 통제 안에서 규격화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만든 파편들인 버내큘러의 속성 중 몇 가지 선택해 활용할 수 있지만 버내큘러 디자인은 버내큘러가 될 수 없다. 결국 버내큘러 디자인은 '버내큘러적'이라는 형용사를 달고 있는 디자인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